가수가 되고 싶었던 촌놈, 색소포니스트·클라리넷 연주자·성악가·톱 연주자로 서다

1977년 개봉한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톱 연주로 시작된다. 날이 채 밝지 않은 새벽 한 호송차가 아메리카 사막을 가로지른다. 이때 흘러나오는 톱 악기의 선율은 음산한 분위기를 낸다. 바람 소리처럼 들리기도, 어느 한 여자가 흐느껴 우는소리 같기도 하다. 톱 연주는 관객을 단숨에 몰입시킨다.

최근 몇 년 사이 나무를 자르는 톱으로 음악을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도내에서는 진효근(63) 씨가 대표적이다.

지난 6월 2일 창원에서 열린 '제1회 환경음악회'에 참여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는 도내 여러 행사에서 여는 공연을 도맡아 하고 있다.

진 씨를 만났다.

태풍 '찬홈'이 지나간 지난 7월 13일 그가 산다는 창원 동읍을 찾았다.

색소폰에서 비파, 피아노, 징, 피리, 톱까지

태풍의 간접영향으로 습기가 많고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창원 동판저수지를 지나니 그의 작업실과 가까워졌다. 그런데 쉽게 찾지 못했다. '경로를 이탈했다'는 기계음을 여러 번 듣고서야 과수원 옆에 있는 하얀색 이층집을 찾아냈다. 인근에는 '공무수행' 스티커를 붙인 차량과 사람들 서너 명이 서 있다. 자세히 보니 태풍 탓에 보호수 가지가 꺾어져 있다.

"어제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만 당산나무가 부러져버렸네요."

진 씨가 2층 작업실에서 인사를 건넸다. 하얗고 검은 콧수염과 턱수염, 구레나룻이 이어져 있고 꽁지머리를 한 그는 음악인보다 산사람 같다. 간편한 옷차림으로 한 손에는 빨간 파프리카를 들고 있다. 늦은 점심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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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효근 톱연주자./김구연 기자

작업실은 날씨와 걸맞지 않게 산뜻했다. 나무향이 은은했다.

커다란 스피커와 앰프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콘트라베이스와 비파, 색소폰, 피아노, 징, 피리들이 작업실 한편을 채우고 다른 벽면에는 주인장도 개수를 모르는 LP판과 CD, DVD가 책장에 수북이 꽂아있다. 저수지가 보이는 커다란 창문 밑에는 찻잔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다.

"차 한잔 마시고 시작합시다. 귀한 손님이 왔으니 비싼 거를 내야 하는데. 보이차 좋은 게 있어요."

작업실 가운데 놓인 테이블에는 까만 차판이 있다. 진 씨는 뜨거운 물을 차판에 붓고 차를 내린다. 투명한 갈색빛이 도는 보이차가 향긋하다.

진 씨가 알려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서 검색하면 '피아노 조율'이라고 나온다.

그는 피아노 조율사다. 또 색소폰 연주자고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가수가 되고 싶었다는 그의 어린 시절.

그의 말처럼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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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효근 톱연주자(오른쪽)./김구연 기자

음대 낙방 또 낙방, 그리고 설악산 도피

동읍에서 태어난 진 씨는 자신을 가리켜 '촌놈'이라고 했다.

"촌놈이 가수가 되고 싶어 혼자 이것저것 많이 했어요. 목소리를 낸다고 소금물과 간장을 먹고요. 음악을 너무 하고 싶어 마산상고 시절 악기부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색소폰을 처음 봤어요. 완전히 매료됐죠. 자나 깨나 색소폰 생각뿐이었어요. 제가 매일 불고 닦으니 선생님이 반출을 허락했어요. 학교 악기를 가지고 다닐 수 있게 해준 거죠. 지금도 기억나요. 당시 시내버스가 창원 39사단 터까지만 운행했는데 색소폰을 고이 안고 동읍까지 걸어갔죠. 그 밤길을요."

그는 음대에 진학하고 싶었다. 대학 실기 면접날 색소폰 하나 들고 동아대를 찾았다. 반주자도 없이 말이다.

"당연히 낙방했죠. 반주자도 없이 혼자 간 거예요. 무엇보다 색소폰으로 음대에 갈 수 없었어요. 그런 사람도 드물고 전공과도 없고요."

어머니는 낙방해 상심한 당신의 아들을 위해 클라리넷을 샀다.

그는 1년 후 클라리넷으로 음대 진학에 도전한다. 하지만 결과는 불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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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효근 톱연주자./김구연 기자

진 씨는 홀연히 설악산으로 향했다.

"그때를 말하려니 자서전에 쓸만한 얘기네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현실도피였죠. 죄송한 마음, 창피스러움, 상처가 뒤섞여 집을 떠난 거예요. 산에서 3박 4일을 지냈어요. 나무와 풀을 깔고 누워 옷을 덮고 잤죠. 미숫가루로 버티고요. 화채봉까지 올라갔습니다. 나흘째 되던 날 산에 있던 사람들이 저더러 내려가자고 하더라고요. 비 오는 새벽에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순간 두려움이 밀려오더군요. 사실 산에서 살까 생각했어요. 어린 마음이었죠. 아저씨들 따라 내려갔습니다. 산 밑에서 불을 피워 몸을 녹이는데 마음이 한순간 사그라졌어요."

설악산에서 내려온 그는 직업안내소를 전전했다. 차마 집에 갈 수 없었다고 했다.

"이때부터 고생이 시작됐죠. 참 마음이 아파요."

그는 창 너머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봤다.

"강릉 직업안내소를 찾아갔어요. 직장은 못 구했죠. 누가 어린애를 써주겠어요. 새벽 기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갔죠. 표 살 돈이 없어 입장표만 받아들고 들어갔어요. 몰래 열차에 올랐죠. 심장이 두근두근하죠. 승무원에게 걸릴까 봐. 결국 대구까지 가지 못 하고 영주에서 내렸어요."

그렇게 도망친 진 씨는 빈속을 움켜쥐고 대구까지 걷고 또 걸었다. 깨끗하지 못한 행색에 배낭을 둘러맨 그의 모습은 간첩으로 오인을 받기도 했다.

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의 바람이었던 클라리넷을 대구의 한 전당포에 맡겨버린다.

"클라리넷을 계속 들고 다녔거든요. 분신이었죠. 열심히 일했습니다. 부산의 한 가축병원에 취직해 돈을 벌었습니다. 몇 년 후 대구에서 클라리넷을 찾았죠. 악기를 위해 머슴처럼 일했나 싶어요."

부산에서 톱과 마주하다

5년 후 그는 창원으로 돌아온다.

"'형님 빽'으로 제약회사에 다닙니다. 형님이 마산 산호동에서 한의원을 했었거든요. 한의원 일도 돕고요. 그러다 빵집을 했어요. 그런데 제빵사에게 인건비를 주고 나니 남는 게 없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 서울에서 제빵 기술을 6개월간 배우기도 했죠. 그때 하나 둘 레코드판이며 책을 모았어요. 여전히 음악을 사랑했죠."

한의원에서 만난 손님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가장이 된 그는 친구 추천으로 피아노 대리점 사업을 시작한다.

"피아노를 사고파는 일었어요. 일종의 투자였죠. 한 날은 피아노 조율사가 조율을 끝마치지 않고 퇴근을 했어요. 호기심에 이리저리 만져봤어요. 사실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남의 밥그릇이잖아요. 그런데 한 번 만지기 시작하니 손을 못 놓겠더라고요. 조율 전과 후가 아주 달라요. 혼자 끙끙대며 차이점을 찾아냈죠. 오로지 귀로만 듣고요."

귀로 터득한 피아노 조율은 20년 넘게 해온 그의 일이다. 마산역 근처, 소답동에서 피아노 수리점을 했다. 지금은 가게를 정리하고 단골 위주로 피아노를 봐주고 있다.

피아노는 톱을 만나게 했다.

"한 날 부산에 악기상에게 피아노를 사러 갔어요. 커다란 톱 두 개가 케이스 안에 담겨있대요. 악기상 주인에게 물어보니 톱 연주자가 케이스를 제작해달라 부탁했고 마침 완성해 전시해놓고 있었대요. 제가 관심을 보이자 주인은 톱 연주자가 톱 두 개 중 하나를 나에게 선물한다 했으니 하나는 팔겠다더군요. 그래서 녹이 슨 톱을 가져왔죠. 호기심에 산 거예요."

진 씨는 그때부터 목재상에서 톱을 여러 개 구매해 소리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연주하는지도 몰랐던 그는 며칠 동안 혼자서 톱질을 했다. 톱을 발 사이에 끼고 활로 톱날을 건드렸다. 톱마다 소리가 달랐다. 단단한 것은 손이 아프고 날이 부드러우면 음이 가벼웠다. 또 새 톱은 쇳소리가 심했다. 그가 부산 악기상에서 산 시커먼 톱이 아름다운 선율을 뽐냈다.

톱 연주는 나무를 자르던 사람들이 나무 사이에 끼워져 파르르 떠는 톱에서 공명하는 소리를 발견한 게 시초라고 알려졌다. 연주자는 톱을 무릎 사이에 놓이고 현악기의 활을 톱에 문지르면서 소리를 낸다. 사실 그 소리를 짐작하기 어렵다. 납작하고 길쭉한 강철판이 활과 맞닿아 떨리면 낯선 고음이 울려나온다. 톱의 끝을 구부리면 높은 소리가 펴면 낮은 소리가 난다. 으스스한데 매력적이다.

"진정으로 나를 원하는 무대를 찾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색소폰 연주자로 인정을 받았다. 마산관악단원으로 무대에 올랐다. 단무장까지 역임했다. 국내 중견 지휘자로 이름 알려진 이동호(제주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씨와의 인연, 색소폰을 함께 불었다던 최충경 창원상공회의소 회장과 알게 됐다.

그는 이들의 과거사를 줄줄이 읊었다.

그의 톱 연주가 주목을 받은 것은 옛 마산시립교향악단 뒤풀이서였다.

"지역 음악가들이 저를 많이 챙겼어요. 술과 담배를 안 해도 뒤풀이 때 신나게 놀았죠. 어느 날 혼자 갈고 닦은 톱 연주를 선보였어요. 반응이 아주 좋더라고요. 그 이후 톱 연주자로 유명해지기 시작했죠."

도내에서 색소폰 연주자로 이름나 있고 톱 연주로 이색적인 이력도 갖춘 그는 늦깎이 대학생이 된다. 95학번으로 창신대에서 성악을 전공한다.

"어쩌면 어렸을 적 꿈을 이룬 거죠. 가수가 되고 싶은 꿈이요. 제가 노래도 잘했거든요. 저기 보이시죠? 노래대회에서 1등을 했다니깐요."

그가 작업실에 놓인 오래된 텔레비전을 가리킨다. '1등 마산문화방송(주)'라고 적힌 아날로그 텔레비전이다.

직업안내소를 전전하며 배를 곯던 청년은 크고 작은 축제에서 수백만 원의 출연료를 받는 유명인이 됐다.

이에 대해 진 씨는 할 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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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효근 톱연주자./김구연 기자

"처음에는 돈을 많이 주는 게 좋았어요. 나를 알아봐 준다고 여겼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돈에 맞춰 연주를 하는 게 아닐까, 돈에 음악을 파는 거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정 내 음악을 원하는지, 아니면 돈에 맞춰 연주자를 부른 것인지. 단돈 몇만 원을 줘도 내가 마음껏 무대를 펼칠 수 있는 곳이 좋죠. 그래야 관객도 알아주고요. 내가 편안한 무대가 최고죠."

그는 기회를 주는 대로 자신을 요구하는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악기를 사랑한다고 죽어 가져갈 것도 아니고 노래를 부른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 한 번 하기보다 100번 하고 1000번 하는 게 낫다고 했다.

"음악 하며, 살며, 깨친 이치 지켜갈 것"

지난 1988년 가축 냄새가 코를 찌르는 동읍 월잠리의 한 터를 사놓고 돈만 벌면 조금씩 집을 지었다는 그.

7년 정도 혼자 지내다 작년부터 가족이 다 함께 산단다.

"제가 역마살이 대단하죠. 아내가 고생을 했어요. 음악이 좋다는 이유로 혼자 살아도 별말 없이 응원해줬죠. 참다못한 아들내미가 다 같이 살자고 설득을 했죠. 창고로 사용했던 1층을 집처럼 꾸며 산답니다. 좋아요. 농사도 안 되고 습도가 높고 모기도 많지만 멀리 동판저수지가 보이고 대나무, 감나무가 푸르죠. 2층에서 공연도 열고 음력 보름날에는 차모임도 하고요."

그가 작업실을 천천히 돌며 톱이며 색소폰, 피아노를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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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서정적인 노래 한 곡을 신청하란다. 톱 연주를 보여준다며.

의자에 앉아 톱을 무릎 사이에 낀 그는 소리새의 '그대 그리고 나'를 시작한다. 악보대로 연주하는 게 아니다. 기본은 지키되 현 감정과 분위기대로 활을 이리저리 옮긴다.

"오래 살다 보니 하나는 알았습니다. 자신을 감당할 수 있는 이치를 깨쳐야 한다는 걸. 나와 직업을 분리해야 해요. 음악이 아무리 좋더라도 악기 없이는 못 살겠더라도 도피로 이용하면 안 된다는 걸요. 자신을 감싸는 권력과 자리, 이름이 사라졌을 때 이겨낼 힘을 키워야 합니다. 젊은 친구들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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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효근 톱연주자./김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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