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개빈 멘지스(Gavin Menzies)라는 영국 작가가 지난 2002년 출간한 '도발적인' 책 제목이다. 2004년 국내에 번역 출판된 이 책은 많은 이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서구 열강에 늘 치이기만 했던 동양이 사실은 아메리카를 처음 탐사한 '전 지구적 선구자'였다니!

멘지스는 명나라 영락제가 기획한 대항해가 알려진 것처럼 아프리카 동부해안에서 끝난 게 아니라 대서양 너머 아메리카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한다. 사실이라면 콜럼버스를 지우고 세계사를 다시 써야 한다. 물론 주류학계가 정설로 받아들이지 않아 이 주장은 주장에 머무르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 함대, 아메리카 발견'은 역사 속에서 빛바래가던 '대항해'를 많은 이들에게 다시 환기시키면서, 중국 대망론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영락제는 정란지역(靖亂之役 조카 건문제를 내쫓고 황권을 뺏은 사건)을 통해 황제에 오르자 대국의 위엄을 만천하에 떨치고 싶었다. 스스로는 몽골원정을 통해 북방을 진압했으며, 대 함대를 조직해 남방도 아우르고자 했다.

450px-Zhen_he.jpg
▲ 정화의 석상./위키 백과

함대는 영락제가 가장 신임하던 환관 정화(鄭和 1371~1433)가 이끌었다. 총 7차에 걸친 대항해에 동원된 선단은 역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였다. 첫 항해에 동원된 배만 모두 62척, 군사는 2만 7000명으로 정화가 탄 기함인 보선(寶船)은 길이가 137m에다 1500t 규모였다. 1492년 콜럼버스가 200t짜리 산타마리아호를 비롯한 배 3척에 선원 120명을 태우고 아메리카로 향한 것과 비교하면 그 압도적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락제는 어떻게 거세남인 일개 환관에게 이 거대한 역사(役事)를 맡긴 것일까? 명사(明史) 정화전(鄭和傳)에 따르면 무슬림이자 색목인인 정화는 영락제가 연왕(燕王)시절 벌인 운남(雲南)원정 때 포로로 잡혀 영락제 진영에 합류한다.

포로가 되면서 거세를 당했으나, 총명한 자질에다 충성심이 깊어 영락제로부터 깊은 신임을 얻게 된다. 실제로 정란지역이 벌어지는 동안 정화는 영락제를 보좌, 일등 공을 세운다. 열전은 그를 키 9척에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위엄 있는 외모에다 병법과 지략에 통달했다고 말한다. 역사에서 흔히 만나는 '간살스런' 내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는 7차례에 걸쳐 말라카, 인도, 호르무즈 해협, 아덴만, 모가디슈, 몸바사(케냐)에 이르는 긴 여정을 오가면서 명나라의 위엄을 만천하에 떨쳤다. 상륙작전을 통해 명나라 군대를 업수히 여기는 곳은 직접 정벌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대개는 위력을 과시하면서 선물을 주고 조공을 받는 관계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서세동점(西勢東漸) 시절 열강이 현지인들을 분열시키면서 정복과 착취에 올인한 것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행보다.

대 함대를 이끌고 7차례나 해외원정을 하는 동안 그라고 해서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현지에서 적군의 속임수에 빠져 고립되기도 했으며, 지친 부하들이 일으킨 선상반란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정화는 정란지역을 통해 쌓은 실전 노하우와 카리스마를 활용, 이런 어려움을 모두 극복하고 명나라에 엄청난 보물과 영광을 안겼다.

멘지스는 이 과정에서 정화가 보낸 휘하 지대(支隊)가 희망봉을 돌아 대서양 북쪽까지 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7차에 걸친 대항해 기록은 영락제가 죽자 모두 파기돼 버렸다. 명나라는 이와 함께 선단도 파괴해버렸다. 몇 가지 간단한 서류만 남았을 뿐, 항해를 상세하게 묘사한 일지는 사라지고 말았다. 기록으로 당대를 평가하는 후인들이 볼 때는 아쉽기 그지없는 일이다.

명나라가 대항해 이후를 지켜나가지 못한 이유는 엄청난 비용 때문에 내륙(북쪽)과 해상(남방)이란 두 전선(戰線)을 이끌고 갈 수 없는 현실적 한계 때문이었다. 개척한 남방이 민간교역을 통해 중국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것도 한 요인으로 지목된다. 정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유교로 무장한 기득권세력이 해상교역을 주도하며 새롭게 떠오른 파워그룹을 견제하기 위해 아예 씨를 말렸다는 분석도 있다.

정화는 중화문명이 세계적인 위세를 떨치던 시절 그 정점에 있었던 행운아였으나, 동양이 서양에 압도당한 뒤로는 회한에 잠긴 동양인들이 옛 영화를 반추할 때 등장하는 '안타까운' 인물이 되고 말았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