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란 '같은 이야기'를 공유한 사람들의 집단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태어나면서 시작해 죽음으로써 완성되는 '이야기 한 편'이다. 그 이야기는 중요한 마디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고, 성장하고, 또 확산된다. 이야기의 마디들이란 인생과 관련한 사자성어들에 잘 녹아들어 있다. 우리 문화권에서는 관혼상제(冠婚喪祭)와 생로병사(生老病死) 등이 한 사람의 인생을 마디 짓는 중요한 이야기 골격들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집단이 공동체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이야기 마디들은 어떻게 구성돼 있을까?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다음 열 가지 정도로 추려볼 수 있지 않을까? '탄생, 백일, 돌잔치, 초등학교 입학, 대학교 입학, 대학교 졸업, 취업, 결혼, 칠순 잔치, 장례.' 물론 사람마다, 집단마다, 문화권마다, 믿는 종교에 따라 이 항목은 보탤 수도 있고, 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순간들을 웬만하면 홀로 보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친지와 이웃들에게 알리고, 또 돈을 들여 근사한 사진을 찍어두기도 한다. 특히 결혼과 장례에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초대한다. 정교하게 설계된 의식(Ritual)도 치른다. 한 사람의 이야기 마디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 마디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친지가 되고 이웃이 되고 또 공동체가 된다. 이야기 마디들에 연결된 사람, 중요한 이야기 마디에 참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야기란 관점에서 보자면 공동체란 '같은 이야기'를 공유한 사람들이다. 같은 이야기 위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뛰어넘는 공동체의 정체성이 만들어질 수 있다.

도시 공동체도 같은 이야기를 기반으로 형성된다는 측면에서 개인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와 중세 도시들 중심에 신전이나 성당, 모스크가 자리했던 것은 도시 생존에 통합된 이야기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같은 이야기를 공유할 때 도시는 통합된 정체성을 형성하고 도시 경영도 원활해질 수 있다. 통치자 입장에선 비용이 줄면서 효율성이 높아지고, 시민 입장에선 소속감과 안정감을 얻게 된다. 그렇다고 통합된 이야기 자체가 무조건 바람직하다는 뜻은 아니다. 통합이 지나쳐 획일과 강압으로 치달을 경우 도시의 이야기는 종종 도시 내 약자를 향한 폭력의 근거로 악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도시들의 문제점은 최소한의 도시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통합된 이야기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하게 표현한다면 이야기의 무정부 상태로 치닫는 분위기다. 내적으로는 아파트 중심의 주거문화가 도시 공동체를 조각내며 분열시키고 있고, 외적으로는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해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외국인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기존 도시 정체성이 도전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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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아파트가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면서 도시의 전통적인 지명이 밀려나고 있다(경기도 광명시 하안동의 네이버 지도 항공사진 지명표시).

아파트 시대에 허약해지는 도시 정체성

같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도시공동체라고 부른다. 일정한 공간에서 제한된 자원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니 생존을 위한 공동체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시민들이 과연 정서적으로도 같은 공동체라 느낄까?

도시의 이름과 갖가지 상징, 그리고 랜드마크들이 일단은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어준다. 서울이면 남산과 궁궐들이, 뉴욕이면 자유의 여신상이, 파리면 에펠탑이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하루이틀 다녀가는 관광객이 아니라 1년 365일을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그 정도의 이야기 단서만으로는 부족하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공유하기 위해 다양한 이야기 마디들이 필요했듯이 도시 또한 시민이 함께하는 나이테 같은 이야기 마디들이 잘 구성돼 있어야 한다.

물론 쉬운 과제는 아니다. 도시는 규모가 워낙 크기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모여든 곳이기 때문에 통일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더구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내는 소규모 집단 정체성들은 종종 도시 전체의 통합적인 스토리텔링에 역행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우리나라 도시들은 주거형태가 대부분 대단지 아파트 위주로 바뀌면서 이야기 기반 자체가 빠르게 허약해지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구별 짓기'다. 어떤 기준을 세운 뒤 그보다 못한 사람 혹은 집단에 꼬리표를 붙이는 방식이다. 아파트라는 주거형태는 이 같은 구별 짓기를 순식간에 도시 전체로 확산시켰다. 단지 규모에 따라 교육과 문화, 쇼핑 등의 서비스 인프라가 달라진다. 같은 단지 안에서도 주택 면적에 따라 여러 가지 격차가 생긴다. 전망, 학교와의 인접성, 교통 접근성에 따라 프리미엄이 붙는다. 심지어 아파트 평수는 정치 성향에도 영향을 미친다.

1990년대 중반 브랜드 아파트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그 정도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최근 조성되는 아파트 단지의 버스 정류장은 동네 이름 대신 아파트 브랜드를 그대로 사용할 정도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인식도 마찬가지로 바뀌고 있다. 아무개 시 아무개 동보다는 아무개 아파트 몇 동(평수를 드러낸다)에 산다고 표현하는 것이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더 잘 표현해준다고 믿는다.

아파트 브랜드를 둘러싼 갈등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자기네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아파트가 같은 브랜드를 쓰게 되면 소송도 불사하는 게 요즘의 도시 인심이다. 건설사 소관인 브랜드 이름과 디자인이 촌스럽다 싶으면 주민들이 나서서 뜯어 고치려 든다. 어느새 아파트 브랜드는 계층이 되고 신분증이 되고 있다.

시민들의 가슴 속에는 이미 도시 이름이 아파트 브랜드에 빠른 속도로 밀려나고 있는 것 같다. 시민들은 아파트 단지에 따라 조각난 모자이크처럼 저마다 다른 색깔과 이름을 갖고 싶어 한다. 수평적 다양성이 무너지면서 수직적인 계층화가 가속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과연 바람직할까? 도시 내 소지역 정체성이 다른 소지역과 갈등을 일으키고, 또 도시 전체의 정체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 하고 오히려 잠식해 들어가는 모습이 계속된다면 과연 도시 공동체에 미래가 있을까?

국제화되는 도시에 등장하는 게토

이야기 관점에서 현대 한국 도시들이 당면한 또 다른 도전 과제는 바로 급증하는 외국인 주민들이다. 행정자치부 '2015년 외국인 주민현황 조사' 결과, 전국 외국인 주민수(올해 1월 1일 기준)는 174만 1919명으로 집계됐다. 경남에는 10만 8375명이 사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전국 시·도 가운데 경기도(55만 4160명), 서울시(45만 7806명)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창원과 김해가 2만 명이 넘고, 거제가 1만 명을 넘겼다. 외국인 숫자만으로도 행정구역상 단독 시(市)가 만들어질 수 있는 규모다.

경상남도 내 외국인은 전체 주민등록 인구(335만 257명)의 3.2%를 차지하고 있다. 증가 속도도 빨라서 2014년 1월에 대비해 11.6%가 증가했다. 최근 5년 동안 평균 10% 이상 증가세라고 한다(경남도민일보 7월 9일 기사 참조). 여전히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지만 최근에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우즈베키스탄 같은 이슬람 국가 출신들도 늘어나고 있다.

외국인은 기존 주민들과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외모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다. 외국인들 숫자가 많지 않을 땐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기존 문화에 동화되겠지만, 그 증가 속도가 빨라지면 도시 내 게토(ghetto, 도시 내 소수 민족이나 인종, 종교집단이 모여 사는 지역)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서울 대림동과 구로동 일대에는 한국에 들어와 일하는 중국 동포들의 거대한 게토가 이미 형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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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동포와 중국인 중심으로 게토화가 빠르게 진행 중인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골목 풍경(네이버 지도, 2014년 11월 촬영)

도시 내 게토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도시 문제의 진원지가 될 수도 있고,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는 활력소도 될 수 있다. 게토가 문제시될 때는 주로 불안감과 관련돼 있다. 누군지 모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시민들에게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도시 경제가 어려워질 때 게토는 자주 입길에 오르며 혐오지역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 게토는 침체된 도시 경제에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거점이기도 하다. 특히 중소기업 분야는 외국인 노동자 없이는 굴러가지 않을 정도로 의존성이 높아지고 있다. 도시경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구성원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그들과 함께 들어온 낯선 정체성이 기존 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들의 관습과 음식문화는 새로운 도시 풍경을 만들어 낸다. 요즘의 서울 이태원은 다문화가 만들어내는 활력을 체험하기 좋은 공간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지역 도시들이 이태원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태원은 오래전부터 외국인 문화가 축적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반면 대부분의 지역 도시들은 다른 나라의 낯선 정체성을 일찍이 경험해보지 않은 도시들이다. 3.2%의 인구 점유율이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닐 텐데, 낯선 기존의 도시 정체성과 낯선 정체성 사이에 조화를 이끌어낼 전략을 도시 당국은 과연 가지고 있을까?

공동체를 묶을 이야기 용광로

이처럼 우리가 속한 도시 공동체는 안팎으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시민 전체가 공유할만한 공통의 도시 이야기는 희박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공통의 이야기를 새로 만들어 도시 공동체를 다시 묶을 수 있을까?

여기서 한 가지 전제는 밝혀야 할 것 같다.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도시 스토리텔링은 일단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자.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스토리텔링이란, 예를 들면 도시 정부가 국민의례 같은 특정한 의식은 강제하는 대신 나머지 비주류 집단의 의식이나 스토리텔링 활동은 금지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겉보기엔 일사불란할지 몰라도 수많은 부작용을 동반한다. 다양한 주체들이 만들어내는 창조적 역동성이 도시 경쟁력의 원천이 되는 요즘 시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델이다.

그렇다고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일 수도 없다. 작은 욕망과 미숙한 경험에 도시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파트형 주거문화를 당장 바꿀 수 없다면 그 가운데서도 다함께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역사회를 찾아오는 다양한 외국인들을 편견 없이 만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야 한다. 가장 좋기로는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만나고 섞여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마치 다양한 쇳조각들이 용광로에 들어가 하나의 철로 태어나듯이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묶어 하나로 탄생시키는 '이야기 용광로'들이 필요하다.

도시 안에 이야기 용광로가 물론 하나일 필요는 없다.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이들 용광로는 서로 연결될 필요가 있다. 시민들은 각자 특성과 취향에 따라 저마다의 이야기 용광로에 연결되고, 또 용광로는 용광로끼리 연결되는 유기적인 네트워크가 만들어질 수 있다면 도시 정체성은 새로운 모습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특정인이나 특정 계층이 도시 스토리텔링을 독점해서 공급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민 전체가 참여해서 함께 만들어가는 스토리텔링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첫 번째 이야기 용광로, 축제

시민들의 이야기를 묶어주는 도시 이야기 용광로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오래된 용광로는 바로 '축제'다. 축제는 인류가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존재해온 것이다. 공동체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를 일깨우고, 구성원 모두가 하나의 이야기에 연결돼 있음을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축제는 철저하게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외부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상당수의 도시 축제는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명제 아래 '남'을 위한 축제로 전락했다. 축제의 성공 기준도 관광객 숫자와 상인들의 매상으로 표현되는 경제적 효과들이다. 축제 스토리텔링도 온통 관광객을 유혹하기 위한 잔기술로 가득 찬다. 시민은 축제의 주인이 되기는커녕 관광객을 위한 광대가 되기도 하고 서비스 종업원이 되기도 한다. 경제적인 이익과 무관한 시민은 자기 도시에서 벌어지는 축제인데도 구경꾼이 되고 만다. 이런 축제를 통해 시민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가슴에 담을 수 있을까? 돈벌이에 나선 상인들은 매상이 곧 이야기거리일까? 구경꾼에 불과했던 시민은 어떤 소속감과 자긍심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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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과 함께하는 다문화축제 2014 맘프(MAMF)가 10·11·12일 3일간 창원용지문화공원에서 열렸다. 시민들이 사자탈 공연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경남도민일보DB

물론 모든 축제가 이렇지는 않다. 매년 가을 창원에서 열리는 다문화축제 맘프(MAMF)는 요즘 보기 드물게 도시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축제형 이야기 용광로다. 이 축제는 이주민 관련 행사로는 국내 최대 규모로 2005년부터 '마이그런츠 아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2008년까지 서울에서 개최되다가 정부 지원이 끊기면서 2009년에는 쉬고 2010년부터 경남 창원에서 다시 개최되어 경남의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축제는 관광객을 유치해서 경제적인 효과를 높이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다양한 이유로 한국을 찾아 생활하고 있는 이주민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축제 기간 동안 전통 복장을 입고 전통 음식을 장만해 한국인 시민들과 만난다. 이때만큼은 국제결혼으로 한국을 찾은 어린 신부가 아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러 일자리를 찾아온 노동자가 아니다. 자기 나라와 문화, 종교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일종의 국가대표가 된다. 창원 시민들도 이 축제를 통해 저마다 색깔로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을 만나고 문화를 만난다. 만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한 자리에서 섞이고 화학작용을 일으켜 새로운 도시 이야기로 발전해 나가는 현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다문화축제 맘프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여러 도시에 누가 살고 있는지를 묻는다. 한국인들과 더불어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과연 누구인지를 묻는다. 이제 대한민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더 이상 한국인만을 위한 곳이 아니다. 외국인들과 함께 어울려 서로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 도시다. 그들의 옷과 음식은 한국의 그것과 다르지만 똑같이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웃이다. 도시 한복판 축제라는 용광로 속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음식을 나누며 만났을 때 '새로운 우리'의 탄생 신화를 예감하게 되는 것이다.

도시의 모든 축제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다시 정비될 필요가 있다. 관광객 유치와 경제적 효과를 목표로 삼는 축제에 그칠 게 아니라 급변하는 도시의 이야기를 새롭게 녹여내는 용광로가 되어야 한다. 새롭게 유입되고, 저마다 분열되는 도시 구성원들을 새로운 이야기로 초대할 수 있는 축제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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