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슬픔과 한을 노래한 제망매가(祭亡妹歌)-부용산

간혹, 음악을 들려주는 입장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아니 들어보지 못한 곡을 신청받고나면 순간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더군다나 그 곡을 찾기가 쉽지 않을 땐 그야말로 등골에 진땀이 흥건해진다. 하지만 어렵사리 찾은 음악을 틀 땐 나 자신 또한 깊은 감상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노랫말과 음률이 제대로 와 닿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진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험으로 <부용산>은 나의 가슴에 다가왔다.

이 곡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과 시절의 한을 품고 끊임없는 구전으로 명맥을 이어오다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노래다. 구구절절 애절한 가사를 지은이는 박기동(1917~2004) 시인이다. 박기동 선생은 전남 여수 출신으로 12살 되던 해에 벌교로 이사를 왔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의사인 부친의 지원으로 일본에 유학, 관서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도 모국어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우리의 말과 글을 갈고 닦는 시인이 되고자 일생의 방향을 정했다. 1943년 귀국하여 벌교 남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7년 순천사범학교에 근무할 때 좌파계열의 남조선 교육자협회에 가입하는 바람에 순천경찰서에서 4개월여 구금당하고 6개월간 정직되었다. 이 6개월은 선생에게 비운의 노래 부용산과 함께 평생의 굴레가 된다. 선생에게는 여섯 살 아래 여동생 박영애가 있었는데, 결혼 몇 년 후 폐결핵에 걸려 순천도립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오빠의 보살핌도 덧없이 누이는 자식 하나 남기지 못 하고 1947년 24세의 나이로 생을 다하고 말았다. 선생은 누이의 시신을 벌교 부근 부용산 자락에 묻고 오리 길을 걸어 내려오며 사무치는 슬픔과 애틋함, 허망함을 못 이겨 한 편의 시를 지으니, 이 시가 바로 <부용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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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박기동 선생은 목포의 항도여중(현 목포여고)으로 전근을 갔고, 안성현 음악선생과 조우한다. 두 사람은 예술적 감수성과 제자 교육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여 서로 친한 사이가 된다. 그때 항도여중 3학년으로 문학적 소질이 매우 뛰어난 천재소녀인 김정희라는 학생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김정희가 16세의 나이로 갑자기 요절하자, 안성현 선생은 특별히 아꼈던 어린 제자를 추모하여 평소 눈여겨 보았던 박기동 선생의 시 부용산에 선율을 입혀 노래를 만드니, 박영애, 김정희 두 젊은 죽음을 기린 제망매가이자 제망제자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작곡가 안성현은 일반대중에게는 낯선 음악가다. 그러나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자라면 절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일제치하에서 우리 민족의 슬픔을 애절하게 표현한 노래의 작곡자가 오랜 세월 동안 교과서와 노래집에서 작곡자 미상으로 나와 있었는데, 이는 작곡가의 월북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본다. 이념과 상관없는 부용산 노래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자신들의 처지를 고달파하는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당국에 의해 엄격히 금지된다. 이런 여파로 안성현은 면직을 당하게 되고,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무용가 최승희의 권유로 6.25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해 버렸다. 박기동 선생 또한 당국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부용산 작사가임을 숨겨야만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가택수색, 연금 등을 피해 호주로 이민가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노래는 서서히 잊히다가 1960~1980년대 운동권, 진보지식인들에게 작자 미상의 구전 저항가요로 은밀하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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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산은 1997년 가수 안치환이 노스탤지어 신곡앨범을 내면서 다시 부상하게 되었는데, 그 곡 설명에는 작자 미상의 구전가요라 했으며 상당부분 가사와 박자가 변형되어있고, 1절의 가사만으로 녹음되었다. 나중에 항도여중 출신의 김효자 교수가 안성현 작곡집을 공개하면서 원곡의 악보와 가사가 밝혀지게 되었다. 원래 1절로 작사된 부용산은 연극인 김성옥(연극인 손 숙의 남편) 씨가 호주에 거주하던 박기동 선생을 직접 찾아가 2절 작사를 제의, 선생이 수락하면서 51년 만에 2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후 가수 한영애는 비하인드 타임이라는 앨범을 2003년에 발표한다. 이 앨범은 부용산을 악보에 근거하여 2절까지 정확하게 부른 최초의 음반이라는데 각별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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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 평생 단 두 번 밖에 울어본 적 없다던 박기동 선생이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소절에 이르러 눈물을 한없이 쏟았을 땐 그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비록 그런 감정까지야 느끼지 못하지만, 요즘 변덕스런 날씨마냥 감정이 흔들리면 조용히 부용산 노래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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