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선 고춧가루 정신'으로 서울서 버티고 살았다

정치적 지형을 논할 때, 서울 구로구는 전통적인 야권 강세 지역구 중 하나로 꼽힌다. 선거 정국에서 떠오른 이슈와 '바람'의 향방에 따라 다소 변화가 나타나긴 했지만, '구로구'는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으로 대변되는 민주계와 진보·노동계의 성지로 인식돼 왔다. 지금은 새정치민주연합 내에서 지도부급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이인영 의원과 박영선 의원이 각각 구로갑과 구로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 곳에서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박평길(52) 의원은 새누리당 간판을 달고 구로구의원에 당선됐다. 지역구 국회의원, 구청장, 서울시의원 모두가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인 지역구에서 박 의원은 외롭게(?) 새누리당 소속 구의원이 된 것이다.

남해 창선에서 태어나 서울 구로구에서 구의원으로 활동하게 되기까지의 인생역정을 듣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박 의원은 "참 파란만장했던 것 같아요"라며 깊고도 긴 탄성을 자아냈다.

"그때는 기능올림픽 금메달 따는 게 다들 꿈이었죠"

남해군 하고도 창선면 사포리에서 태어난 박 의원은 지금은 이미 폐교된 광천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동기생이 60여 명 남짓했던 그곳에서 전교 학생회장을 맡기도 했다고 한다.

"돈이 없었으니까. 우리 또래 여자애들은 식모살이도 많이 하던 때였어요. 마산 수출자유지역이나 한일합섬 야간 학교, 그리고 사상공단에도 많이들 갔죠. 참 그럴 때가 있었죠. 아마 제가 군대 다녀오고 나서 한참 후에 꼬막이나 새조개 팔면서 사정들이 조금씩 나아진 것 같아요. 그 전에는 참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다들 어려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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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평길 구로구의원./박평길 의원 제공

중학교 재학 시절 성적은 좋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외지로 나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꿈을 키울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농사밖에 더 짓겠어요. 할 게 없잖아요. 그때는 기능올림픽 나가서 금메달만 따면 모든 게 다 잘 될 줄 알고 있었죠. 금오공고, 포철공고, 부산기공 등으로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많이 갔습니다. 저도 부산기공에 입학했는데, 그만두고 다시 창선고등학교로 전학 왔어요. 적성에 안 맞더라고요."

10리가 넘는 산길을 오가기도 했으며 면 소재지에서 자취를 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배고픈 때였다고 한다.

"집에서 학비를 대줄 형편이 안됐죠. 그래서 대학도 기숙사 있는 국립을 찾게 되는 거죠. 일반 사립학교를 가서 하숙을 하면 당연히 논밭을 팔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목포해양대학교에 입학했어요. 당시는 목포해양전문대였어요. 꽤 입학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내심 '전문대'라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같아요. '전문대 오려고 그렇게 공부를 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요. 학교 기숙사 담을 뛰어넘어 친구랑 도망쳤죠. 그리고 군대에 갔습니다."

공무원에서 정치권으로, 다시 공직자로

군대 제대 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를 하게 된다. 다녔던 학교에 복학할 형편이 아니었다. 친구들도 다들 어려운 시기를 보내던 때였다.

"한참 데모를 많이 할 때잖아요. 지금까지 졸업을 못한 친구들이 많아요. 잘리고, 돈 없고, 복학도 못 하고…. 그래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죠. 지금 와서 보니 그때 공무원 준비하고 경찰이 된 친구들이 그나마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아요. 그때 시험은 총무처에서 시험을 보고 통일부, 그러니까 당시는 통일원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빽'이 없고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참 힘들더라고요. 경상대 출신 딱 한 명 만났습니다."

공직 생활을 하면서 못다 한 대학 공부를 마쳤고, 경희대학교에서 도시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다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박 의원은 통일정책실장이었던 구본태 (현)남북 화해·협력 자문위원의 비서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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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평길 구로구의원.

"YS 때였어요. 제가 모시던 실장이 통일문제 전문가로 국회의원 출마자로 차출이 된 거예요. 제가 비서관이었으니까 같이 나가자는 제안을 받은 거죠. 총선에서 떨어져도 다시 부처 차관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듣고 해서 같이 나가게 된 겁니다. 함께 안 나가면 의리 없는 놈이 되는 거고, 또 그분이 다시 차관으로 돌아오면 얼굴 뵙기도 무안하고 그렇잖아요. 반쯤 끌려서 나간 거죠.

그런데 그분은 낙선하고 다시 통일부로 가지 못 하고 국회의장 비서실장을 맡게 됩니다. 그러다가 DJ로 정권이 바뀌고 나니까 통일부 복귀가 안 되더라고요."

박 의원은 이후 당직자로 일하게 된다. 이런저런 고민이 많은 때였다. 다행히 양천구청장 비서실장으로 임명되면서 다시 공직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4년 후에는 역시 남해 출신인 양대웅 구청장이 재직하던 구로구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구청장 비서실장을 12년간 맡게 된 것이다.

"아마 제가 최장수 구청장 비서실장이 아닌가 싶어요. 그때 각 구청에서 비서실장을 함께 하던 이들 중에는 국회의원이나 단체장이 된 친구들이 있죠. 권영진 대구시장도 있고…."

'동네북'이 되어 구의원이 되다

"비서실장이니까, 아무래도 술자리가 많죠. 그래서인가, 제가 8년 전에 위암수술을 받았어요. 사실 저는 단체장이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다 포기해야 했죠. 4년 전에 출마를 준비할 때는 '곧 죽을 놈이 선거에 나온다'는 말도 나돌았으니까요. 요양을 하고 완치가 되고 나서 구의원으로 출마하게 된 겁니다. 경선을 통해서 공천을 받고, 열심히 선거운동 했습니다."

-야권 강세 지역에서 새누리당 공천을 받고 당선되셨습니다.

"그렇죠. 야권이 주도하는 곳이죠. 서울에서 야권 강세 지역 '빅5'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서 제가 모시던 양대웅 청장이 재선을 한 건 대단한 일입니다. 남해 출신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성실하고 부지런했죠. 우리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뛰잖아요. 제가 당선되는 데도 양 청장님의 영향이 컸다고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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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평길 구로구의원./박평길 의원 제공

-선거 당시 '동네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더군요.

"지방선거라는 게 시장, 구청장, 시의원, 구의원, 교육감 후보가 다 나오잖아요. 제가 누구인지 알릴 길이 없어요. 동네북이라는 콘셉트가 구의원하고 맞다고 판단했죠. 누구나 와서 두드리고, 동네 종이자 머슴이라는 겁니다. 언제든 전화도 하고 만날 수 있는 편한 사람이라는 거죠."

-비서실장을 맡으셨기에, 구의원 역할을 수행할 때 장단점이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당선된 후 1년 동안 700분 정도를 만난 것 같아요. 월 50건 정도 되는 민원을 접한 거죠. 하나도 빠짐없이 메모를 다 합니다. 비서실장이라는 자리도 어떻게 보면 민원 해결 하는 자리였죠. 다만 차이가 있다면 비서실장은 일선 공무 현장에서 해결이 안 된 것들이 넘어온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 베푸는 것보다 막아내야 하는 게 더 많죠.

지금은 오로지 주민 입장에서 접근합니다. 실무 단계에서 일이 풀리도록 하니까 보람이 크죠. 집행부 입장에서야 제가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자질구레하고 사소한 것 가지고 꼬투리 잡기보다는 구청장과 정책적인 사안으로 맞설 때는 있습니다. 지금은 서울에서 새누리당이 완전 바닥이잖아요. 하지만 또 부활 기회가 생길 수 있으니 제가 어떤 식으로든 여기서 대비를 한다는 마음가짐도 있습니다."

"'창선 고춧가루' 정신으로 버틴 거죠"

-투병 당시 여러 가지로 힘드셨을 텐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모든 걸 포기해야 되잖아요. 그래도 또 만약 그때 제가 아프지 않았다면 지금 어떻게 돼 있을지 모르죠. 인생을 길게 봐야죠. 마라톤처럼. 아직 진행형이니까, 끝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죠."

-구청장 비서실장 12년의 세월은 어땠는지.

"12년 동안 휴가가 없었습니다. 새벽에 나와서 밤늦게 들어가다 보니 친구도 다 잃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빽이 없잖아요. 몸이 무기였어요. 딸아이 데리고 어린이대공원을 한 번 밖에 못 간 거 같아요.

그래도 아무런 사고 없이, 이권에 연루되는 일 없이 제가 모신 분이 임기를 잘 마쳤던 게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빽 없고 기댈 데 없으니까 역설적으로 더 부지런했던 것 같아요. 더더욱 원칙에 입각해서 일하기도 했고요. 가진 사람보다는 좀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베풀려고 노력을 했고, 이런 것들이 하나씩 쌓여왔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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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평길 구로구의원./박평길 의원 제공

정치적으로 박평길 의원은 구로 지역에서 '태풍의 눈'으로 부상하고 있다. 새누리당 불모지대나 다름없는 곳에서 구의원으로 당선 된데다 구청장 비서실장 경력을 발판 삼아 바닥 민심의 성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지방선거는 세월호 영향이 있었죠. 일반적인 서울 지역 흐름을 보면 제가 당선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이 지역에 있는 언론들도 저의 당선에 갸우뚱해 하는 분위기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많은 주목을 받으면서 구의원 생활을 시작한 셈이죠."

-그렇죠. 아무리 현장 밀착 정치를 한다 해도, '바람'을 이기긴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저를 좋은 상품으로 봐 준 거겠죠. 앞으로 품위있는 의정활동을 해야죠. 그렇지 않으면 또 역풍이 불겠죠."

박평길 의원은 인터뷰 도중 "새삼 이렇게 제가 살아왔던 과정을 되돌아 보니 감회가 새롭다"는 말을 자주 했다. 박 의원은 어느덧 옛 친구들 이름을 하나씩 부르고 있었다.

"우리 (국민학교)동기들 중 벌써 세상 떠난 친구들이 여섯, 일곱 명 정도 되네요. 참…. 한이 많은 친구들이에요. 저도 그렇고. 그 어려운 시절 함께 보내면서 컸죠. 머리는 좋은데 형편이 안돼서 좌절한 친구들이 한둘 아니에요. 폐인이 된 사람들도 많고…. 참 한이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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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평길 구로구의원./박평길 의원 제공

그러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된 배경과 앞으로의 포부도 다시 되뇌었다. 어려웠던 시절을 이겨낸 사람들이 훤히 보이는 독기서린 '한풀이'로는 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승화시키는 해학으로 받아들여졌다.

"정말 옛날 생각이 다 나네요. 정치에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20년 공직생활 마치고 봉사하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정치판이 엉망진창인 것 같고 새로운 정치를 해보자는 생각도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죠. 그러다 여기까지 온 거죠. (새누리당이) 여기서 어렵습니다. 그래도 '창선 고춧가루(주변 환경이 척박했던 곳에서 살아온 이 지역 사람들의 성향을 일컫는 말로 예부터 '창선 사람들은 고춧가루 서 말 먹고 물밑 30리를 기어서 간다'는 말이 있다)' 정도 되니까 버티는 거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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