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7만 원 역도코치 자리 맡은 이유요?"

청소년 대표, 국가대표 지내며 화려한 선수생활

지금은 역도 하면 으레 '역도 여제' 장미란이 떠오르지만 199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여자역도의 간판 타이틀은 언제나 김순희(현 경남도청 코치)의 몫이었다.

김 코치는 1999년 경남대 4학년 재학시절 출전한 '제12회 세계역도선수권대회' 75㎏급 용상 경기에서 135㎏을 들어 올려 한국여자역도 사상 처음으로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경남대 감독을 지냈던 김철현(55·경남도청 감독) 경남역도연맹 실무 부회장은 "의신여중에서 투포환을 주로 하던 순희를 보고 스카우트했다. 역도 입문 1년 만에 전국을 제패했고 이후 아시아와 세계무대를 호령하며 한국 역도사에 큰 획을 그었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중학생 김순희를 발굴해 세계적인 선수로 키워낸 김 감독은 경남 역도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어릴 적 삼촌들이 운동 삼아 들던 역기 때문에 역도라는 운동을 시작했고, 이후 태극마크를 거쳐 고향인 경남에 정착한 그는 경남체고, 통영시청, 경남대, 경남도청 등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며 '금메달제조기'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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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철현 경남도청 역도부 감독./김구연 기자

'김가이버'라고도 불리는 김 감독.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판단력이 맥가이버 같아서다.

창녕 남지가 고향인 김 감독. 운동에 소질이 있던 그는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 씨름부와 창신공고(현 창신고) 레슬링부의 문을 두드렸지만, 제때 서류를 내지 못해 한 해 유급을 해야 했다.

백수가 된 그는 몸매 가꾸기를 위해 당시 마산에서 잘나가던 대영체육관을 찾았다. 대영체육관은 도내 씨름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황경수(전국씨름연합회 사무처장), 이만기(천하장사 출신 인제대 교수), 배희욱(도체육회 사무처장) 등 씨름인들이 즐겨 찾는 단골 장소였다.

그는 "대영체육관이 당시에 헬스장 이용료가 쌌다. 운동하던 선배들이 역기를 한 번 들어보라고 해 뚝심으로 85㎏을 들었고, 그 길로 역도연맹의 추천으로 경상고등학교에 입학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역도 입문 6개월 만에 춘계신인대회에서 은메달 3개를 획득하며 역도 유망주 탄생을 예고했다. 금메달을 딴 선수와 같은 기록이었지만, 몸무게가 많이 나가 은메달 3관왕이 됐다.

그는 2학년 때부터 출전한 전국체전에서 해마다 메달을 독차지했고, 고교 3학년 때는 당시 한국 학생기록이던 인상 125㎏과 용상 155㎏을 들어 올려 청소년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행운까지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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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철현 경남도청 역도부 감독./김구연 기자

역도 명문 고려대에 입학한 그는 청소년대표를 시작으로 86년 서울아시안게임까지 약 9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에서는 합계 332.5㎏으로 동메달을 따냈고, 이듬해 열린 아시아역도에서는 금 1, 동 1개로 LA 올림픽의 메달 가능성도 높였다. 그는 LA 올림픽 대표선발전에서 아시아신기록과 아시아 타이기록 1개를 각각 수립했다. 하지만 정작 올림픽에서는 대퇴근 인대부상으로 5위에 그쳤다.

그는 "올림픽 메달이 잡힐 듯해 88년 서울 올림픽까지 선수 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기록이 나아지지 않아 결국 태릉선수촌을 눈물을 머금고 나왔다"고 말했다.

서울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경남체고에서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했다. 선수 시절 350만 원을 받던 그가 지도자로서 받은 첫 월급은 7만 원에 불과했다.

"휴일을 빼고 계산해보니 하루 일당이 3500원 정도가 되더라고요. 돈은 선수 시절 모아둔 게 있어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게 당시에는 가장 큰 고민거리였죠."

당시만 하더라도 경남 역도는 전국체전에서 10위 밖에 머물던 시절이었다. 그는 학교 인근에 월급보다 많은 월세 15만 원짜리 방을 얻어놓고 선수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김 감독은 "내가 아니더라도 도체육회나 학교에서 역도를 키웠겠지만 당시에는 '내가 아니면 경남 역도를 살릴 사람이 없다'는 생각뿐이었다"면서 "열심히 해서 그런지 성적이 곧잘 났고, 선수를 키워내는 데 흥미를 느껴 다른 일은 일절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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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철현 경남도청 역도부 감독./김구연 기자

28년간 '금메달 제조기' 명성, 역도전용경기장도 건립

이후 안정적인 직장에서 후배들을 키워내고 싶다고 생각한 그는 임시교사를 거쳐 지난 1995년부터 경남체고 교사로 근무 중이다. 그는 경남체고에서 해마다 학교가 전국체전에서 따는 메달의 50% 이상을 혼자 감당했다. 역도 종목의 특성상 한 선수가 인상, 용상, 합계에서 총 3개의 금메달을 딸 수 있는 유리함이 있었지만, 그는 다른 시·도의 경쟁에도 굴하지 않고 3관왕을 연이어 배출했다.

김 감독은 "경남체고 개교 이후 400개 정도의 금메달을 땄는데 그중 180개가량은 역도에서 나왔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역도계에서 '김가이버'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위기 상황이나 순간적인 판단력이 맥가이버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역도는 선수가 잘 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와 신청 중량을 놓고 치열한 수 싸움도 해야 한다"면서 "상대 선수가 위밍업하는 모습을 보고 작전을 짜는데 거의 90% 이상 성공할 때가 많았고, 그런 부분은 타고난 것 같다"며 웃었다.

그는 선수 육성과 더불어 팀 창단에도 공을 들였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90년대 통영시청에 남자역도팀을 창단했고, 김순희가 대학을 졸업하자 경남도청에 여자팀을 만들어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유망주 육성에 팀 창단까지 성공한 그는 겁 없이 역도경기장 건립에도 나섰다. 도체육회와 도청, 문화체육관광부의 문을 수차례 두드린 끝에 2011년 고성군에 역도전용경기장을 건립했다.

그는 "참 겁도 없었던 것 같다. 지역 국회의원을 찾아다니며 끈질기게 설득했고, 문체부도 문턱이 닳도록 수차례 드나든 끝에 국내 최초로 역도 전용경기장을 만들었다"면서 "축구 등 인기종목은 전용구장이 있지만, 비인기 종목인 역도만 할 수 있는 곳은 고성이 유일하다"며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경남 역도의 대부로 불리는 그가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은 바로 올림픽 메달리스트 배출이다. 그는 "최근 실업팀이 많아지다 보니 선수들이 기록 향상보다는 입상권에 안주하는 모습을 볼 때가 가장 속상하다"면서 "경남도청이나 경남대 소속으로 올림픽에 나가서 메달을 따는 게 지도자로서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소원"이라고 했다.

그는 올림픽 메달에 근접한 도내 선수로 한명목을 지목했다. 비록 인천아시안게임에서는 메달 획득에 실패했지만, 한명목은 한국신기록을 연이어 수립하는 등 한국 역도의 기대주로 손꼽히는 주자다.

"삼진중 시절부터 명목이를 지켜봤는데 성실하고 절대 자만하지 않는 선수예요. 특히 아시안게임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출신의 삼진고 한치호 감독의 사촌이어서 금메달 DNA가 있지 않겠어요. 기필코 올림픽 메달리스트로 키워낼 겁니다."

올림픽메달리스트를 키워내겠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장시간의 인터뷰 중 가장 또렷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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