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진은 남강에서 가장 큰 나루터였다
 

남강은 장박교에서부터 의령군과 함안군을 가르며 흐른다. 강 한쪽은 의령군 화정면, 의령읍, 용덕면, 정곡면, 지정면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또 다른 한쪽은 진주시 지수면 끄트머리를 시작으로 함안군 군북면, 법수면, 대산면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창녕 남지읍 용산리 앞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이 남강이 먹고 살고로 해준 거제. 강 옆 들이 얼마나 농사짓기에 좋은 땅이여. 충적층으로 된 땅은 작대기만 꽂으면 절로 수확한다고 한 말이 빈말이 아니라예. 이 강이 또 동서남북 뱃길을 열어줬고…."

의령읍 대산리 강변 유역 우엉밭에서 만난 노인은 물이 넘쳐 난리도 숱해 겪었지만 오랫동안 남강이 식수·농수원이었고 교통로였고 주민 놀이터였다고 말했다. 남강은 의령·함안군의 경제·문화적 주요 자원으로 이곳 사람들의 삶을 일궈온 터전이고 역사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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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군 화정면 화양리 장박교 아래 정박한 카타마란은 뗏목 탐사 체험용이다.

의령·함안·진주 곁에 관란정이 있다 

봄기운이 가득한 장박교 아래 강 한쪽에는 작은 배들이 도열하듯이 정박해 있다. 의령군 화정면 화양리 쪽이다. 의령군에서는 이곳 장박교에서 낙동강 방향 남강을 따라 임진왜란 승첩지라 일컫는 정암진까지 뗏목 탐사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탐사 배는 실제 뗏목이 아니라 2개의 선체를 가진 '카타마란'이라는 배다. 배를 타고 남강 하류 물길을 따라가는 것은 상류지역인 함양·산청에서 래프팅을 하는 것과는 다른 재미로 짐작된다. 여유가 있어 제법 운치 있을 듯하다.

장박교에서 진주시 지수면 강 쪽은 하류에서 보기 드문 절벽을 이루고 있다. 동남쪽 절벽을 바라보면 관란정(觀瀾亭)이 있다. 진주시와 함안군의 경계인 진주시 지수면 청담리에 있다. 연둣빛 잎들이 웃자라기 시작하니 숲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 남강을 옆에 둔 정자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특히 관란정은 마산-진주 방면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보면 강변 언덕 위 단아한 기와지붕 선이 보인다.

관란(觀瀾)은 조선 중기 의병장 관란공 허국주(許國柱)를 말한다. 관란공은 무과에 급제해 오위총독부 부장으로 있다 낙향해 이곳 염창나루 근처에 정자를 지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진주강씨, 청송심씨, 인천이씨 등 인근 함안 의령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9개 성씨 대표들과 이곳에서 모여 700여 명의 의병을 모은 장소이다.

그리고 당시 이곳에 모여 의병 결집을 도모했던 성씨 대표들은 전란 이후 기로계를 결성해 봄과 가을이면 이곳 관란정에 모여서 학문을 강론하고 친분을 쌓아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후손들은 음력 4월 5일이면 이곳에서 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인근 지수면 승산리는 허 씨 집성촌이기도 하다. LG그룹 창업 산파역을 했던 만석꾼 허남정 씨가 이곳 출신이고 인근 능성 구(具) 씨 마을과 대대로 겹사돈지간이라 한다.

지금 관란정은 찾아오는 이 없는 정자지만 주변 잡목숲이나 마당 등 비교적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긴 돌계단을 올라가니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단아한 정자이다. 대청을 낀 좌우 누마루에 올라서면 멀리 강물이 보일 듯도 하다. 정자 옆 강가 절벽으로 나가는 숲에는 지난 가을 떨어졌을 굴밤들이 여기저기 잔뜩 뒹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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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와 함안 경계 남강변 관란정. 관란공 허국주가 9개 성씨 대표들을 모아 의병을 모은 장소로 알려져 있다.

관란정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면 금방 함안군 군북면 박곡리이다. 장박교를 건너온 김에 남강 남쪽인 함안군을 따라간다. 강변은 군북면 박곡리, 수곡리로 이어져 정암철교를 두고 의령군과 경계를 이루는 군북면 월촌리에 닿는다.

강변 뻘굼티논에 고소득 작물을 키워  

함안군 군북면 박곡(朴谷)들은 늘 물난리를 겪지만 모래땅으로 된 들이라 또 물이 빨리 빠져 발채라 불리었다. 강을 낀 넓은 들은 항상 땅에 물기가 많았기 때문에 이후 질박할 박(朴) 자를 써서 박실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강변으로 난 방어산로를 타고 가다 보면 가덕마을 박곡마을로 이어진다. 남해고속도로가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번갈아 나타나기도 한다.

마을 앞 버스정류장들이 둥그렇다. 두루두루 살펴보니 수박을 잘라놓은 모양이다. 함안군은 유명한 수박 산지이기도 하다.

함안군 관계자는 "남강 변은 의령쪽 함안쪽을 가리지 않고 모두 땅이 좋고 물이 풍부하다"며 "연중 수박, 호박, 멜론 등이 출하되고 있다. 이 일대는 소득이 매우 높고 대부분 다 부자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수박이나 멜론은 가락동 시장에서 최고로 알아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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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재건한 정암루. 절벽에 있어 정자에 올라서면 남강과 정암철교, 솥바위가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함안 쪽은 강을 따라 동쪽으로 갈수록 충적층이 넓은 들을 이루고 있어 마을마다 비닐하우스 대단지가 조성돼 있다. "생땅을 보기가 힘들구나"라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남강 하류로 갈수록 벼농사 등 자연농은 보기가 힘들어졌다. 군데군데 눈에 띄는 밀밭이나 보리밭이 턱없이 반가운 이유이기도 하다.

관란정 입구에서 시작된 방어산로는 군북면 수곡(藪谷)리까지 이어진다. 강변 유역에 늪(藪)이 하도 많아 늪실이라 불린 수곡(藪谷)들은 정암진 전투 때 홍의장군 곽재우가 왜적을 이끌어 몰살을 시킨 곳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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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는 의령읍 대산마을이다. 뒷산은 나지막한 둥기얍당이고 남쪽만 트여 들 앞이 바로 남강이다. 오랜 세월동안 나루가 있어 함안 쪽 나들이를 하자면 이곳을 거쳐야 했다고 한다. 이어지는 의령읍 만하마을은 상습 침수지역이라 농사가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던 곳이다. 마을 앞 강변에 숲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1040번 지방도가 되었다. 이곳 들을 진이들, 지미니들이라 불렀는데 땅이 질척질척하다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이 일대야 의령이든 함안이든 장마가 들었다 하면 온 들이 물에 잠겨서 뻘굼티논이라 했지예."

정암진(鼎巖津)을 아십니까 

군북면 월촌리가 시작되는 곳에서는 함마대로 국도 79호선을 타고 정암진에 닿는다. 이곳 정암나루는 월촌원(月村院)이라는 역원이 있을 만큼 큰 나루였다. 곽재우의 정암진 전투로 먼저 알려진 곳인데 요즘은 이웃한 이병철 생가와 8㎞ 이내 부자가 난다는 솥바위설로 더 유명해진 듯하다. 1935년 건설됐다는 정암철교는 정암교가 놓이면서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다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새로 단장되고 의령 관문의 새로운 명물이 되고 있다.

군북면 월촌리 정암철교 앞 쉼터 정자에서는 노인들이 낮술을 마시고 있다. 정암철교는 의령과 함안의 경계이다. 1935년 일제강점기에 물자 수송을 위해 일제가 강을 가로질러 철골트러스 형식으로 준공한 철교이다. 의령군 관계자에 따르면 6·25전쟁으로 파괴된 후 1958년 남아있던 2개의 경간(徑間)을 그대로 살려 상부는 철골트러스 형식으로 재건하면서 몇 년 전 완전히 파괴된 부분은 새로운 교각을 세워 재건했다. 지금은 의령읍 정암리 주민들과 월촌리 주민들이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격 없이 드나들고 있다. 여고생 셋이 장난을 치며 달려간다.

강변 절벽에서 뚝 떨어져 잠시 물길에 휩쓸려가다 멈춘 듯이 정암(솥바위)이 있다.

"솥뚜껑, 우리는 소두방때까리라 했는데 바위 모양이 그렇다데. 우리사 맨날 봐도 잘 모리것다아이가."

실제 물 위에 드러난 바위만 보고는 그 형상을 가늠하기란 어렵다. 알려지기로는 이 바위는 반쯤이 물 아래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솥 다리처럼 세 개의 큰 기둥이 받치고 있다 한다. 그래서 솥바구(솥바위)인데 한자로 정암(鼎巖)이다.

이곳 사람들은 남강(南江)을 두고 정강(鼎江)이라 부르기도 했다. 정암(솥바위)에서 유래된 것인가 싶다. 강을 두고 이쪽과 저쪽이 모두 정암이다. 의령 정암이 있고, 함안 정암이 있다. 함안 정암은 아랫정암이라고도 했다. 강 건너 함안 군북제 너머 들녘은 온통 연푸른빛이다. 봄볕에 남실대는 강물도 푸른 비단을 펼쳐놓은 듯하다.

철교 옆 남강 절벽 위에는 정암루가 있다.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용재(容齋) 이행 선생이 귀양살이할 때 이곳에다 취원루(聚遠樓)를 짓고 생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암철교가 생길 때 그 터에 정암루가 들어섰는데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었다가 지금 건물은 전쟁이 끝난 1953년에 재건한 것이다.

정암철교 옆 안내판에는 언제부터 전해 불렸는지 '정암뱃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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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준공한 철골트러스 형식의 정암철교. 함안과 의령을 잇는 옛 다리다.
공' 노랫말이 적혀 있다.

정암에 사공아 뱃머리 돌려라/ 우리님 오시는데 길마중 갈거나/ 너이가 날같이 사랑을 준다면/ 까시밭이 천리라도 맨발로 갈꺼나/간다 못간다 얼매나 울었던지/정기장 마당이 한강수 되노라….

정암나루에 얽힌 애틋한 사연을 담고 있다. 나루터는 수많은 애환을 담은 이별의 정거장이다.

"아주 큰 나루였다제. 남강에 있는 나루 중에서 제일로 컸을 겁니더. 왕래가 많아 사람이 버글버글했고 아래 웃나루터에는 민물 횟집과 주막이 좌악 줄을 이었제."

정암진은 남강 뱃길로 동서남북 사통팔달로 통하기도 했지만 임진왜란 때 왜군이 호남으로 쳐들어가는 길이기도 했다. 낙동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오다 창녕 남지에서 서쪽으로 난 남강을 타고 거슬러오면 정암진, 진주성으로 곧장 이어진다. 이곳은 영호남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지리적 요충지였다.

정암진 전투, 임진년 왜적이 쳐들어올 때 최초로 의병이 승리한 곳 그 격전지가 이곳이다. 붉은 옷을 입고 흰말을 탄 망우당 곽재우(郭再祐)는 무기라고는 들어본 적도 없던 의병들과 어떻게 왜적을 몰살시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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