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안 드와넬에 대한 변명

지금부터 한 아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름은 앙투안 드와넬. 이 10대 소년은 흔히 말하는 '문제아'다. 수업시간에 장난치다 선생에게 걸려 벌을 서는 건 다반사. 그래서 이미 선생에게도 부모에게도 '찍힌' 지 오래다. 앙투안은 친어머니 그리고 양부와 함께 산다. 부모가 퇴근하기 전 앙투안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어머니의 화장품을 살펴본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속눈썹 집게로 속눈썹을 올려 보기도 한다. 그리고 자주 해본 일인 듯 능숙하게 식기를 꺼내고 저녁 먹을 준비를 한다.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연신 짜증이다. 앙투안에게 살가운 말 하나 건네지 않는다.

선생에게 크게 혼난 다음 날 앙투안은 부모 몰래 학교에 가지 않는다. 친구와 영화관에 가고 놀이기구도 탄다. 그리고 길을 배회하던 앙투안은 낯선 남자와 키스를 하는 어머니를 보게 된다. 앙투안도 어머니도 이내 서로를 알아보지만 둘은 아는 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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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등굣길, 선생이 앙투안을 불러 세운다. 어제 무단결석에 대해 오늘은 어떤 핑계를 댈 거냐는 선생의 질책에 앙투안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한다. 물론 거짓말은 오래가지 않는다. 부모가 학교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늦은 밤 앙투안은 자는 척 침대에 누워 부모의 대화를 엿듣는다. "그 앤 항상 거짓말을 해" "쟤를 어떻게 못하면 기술학교에 보내요. 그래야 나도 마음 편하게 살 것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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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Roland Truffaut)의 <400번의 구타>(The 400 Blows, 1959)는 누벨바그(Nouvelle Vague, 1950년대 후반 시작돼 1962년 절정에 이른 프랑스의 영화운동. 감독 개인적인 영감과 비전을 투여하는 방식과 스타일이 특징이다) 사조의 기념비적 영화다. 영화에는 불우했던 유년시절 학교생활에 통 적응하지 못했던 트뤼포 개인의 경험담이 투영돼 있다.

자, 다시 앙투안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앙투안의 반항은 더 심해진다. 가출을 하기도 한다. 앙투안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부모는 아이를 제대로 혼내지도 않는다. 그저 아이를 귀찮아할 뿐. 그러던 어느 날 앙투안은 양부의 회사에서 타자기를 훔치다 걸려 경찰서로 가게 된다. 어머니는 친권을 양도하고 앙투안을 교화원에 보낸다.

교화원 상담사가 말한다. "부모님은 네가 항상 거짓말을 한다고 하던데." 앙투안이 답한다. "글쎄요. 가끔은 거짓말을 하죠. 어쩌다 사실을 말해도 믿지 않아요. 그러니까 거짓말을 하는 게 낫죠."

교화원에 들어간 앙투안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장면이다. 이때 앙투안은 어머니가 자신을 낙태를 하려다가 낳았다는 사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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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고 나면 앙투안을 말썽만 일으키는 문제아로 단정할 수 없다. 나의 유년시절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앙투안 나이 정도 됐을 때 난 엄마가 언니만 사랑하는 것 같아 종종 말도 않고 집 밖에 나와 숨어 있었다. 엄마와 길을 걷다 골목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다 엄마가 나를 혼비백산 찾으면 태연하게 나타나곤 했다. 엄마의 사랑이 전부였고 그래서 그것만을 원했던 그때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 역시 앙투안처럼 슬펐고 기뻤고 무엇보다 외로웠다.

앙투안은 처음부터 환영받지 못한 자신이 계속 어머니의 앞날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는 것 같아 더욱 외로웠을 것이고 그래서 더욱 반항했을 것이다. 왜냐면 자신이 사랑받지 못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자신을 사랑받지 못 하는 게 당연한 존재로 만드는 게 더 견딜 만하기에. 이 아이의 반항은 어쩌면 자신을 봐달라는, 그리고 진심을 들어달라는,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서툰 표현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아이를 정말 때린 건 가닿지 못하고 되돌아온 이 서툰 표현들의 파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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