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지만 단단하게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화가, 배우리

배우리, 26세, 화가.

처음 배우리를 봤을 때 가만히 있는 태도가 마치 정물 같았다. 아마도 세상일에 크게 관심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의 작품에 나오는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조그맣고 여린 아이.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지금도 우리와는 별로 친하지 않다.

6월 중순 김해시 내동에 엄마랑 옷가게를 새로 내고 가게 안에 작업실을 새로 마련한 배우리 작가를 찾았다. 배우리는 내 주변에 아는 작가들 중 가장 어리다. 더구나 자신이 인정하듯 무엇을 하든 느리다. 그렇게 자기 스타일이 아니면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여느 나이 많은 작가보다 여물게 배우리만의 세계가 만들어져 있었다.

"고향이 부산이나 저는 김해 사람이에요"

-우리는 고향이 어디야?

"부산이에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살다가 김해로 이사 와서 지금까지 쭉 살고 있어요."

-김해 사람이네 그럼.

"네. 근데 계속 부산에 살 걸 그랬어요. 김해가 살긴 좋은데 문화생활을 할만한 데가 부산보다 없어요. 또래 작가도 거의 없어서 외롭기도 하고."

▲ 화가 배우리./강대중 제공

-그러네, 그런 면에서 창원이 차라리 낫네.

"저는 창원에 그렇게 작가들이 활동을 많이 하는 줄 몰랐어요. 제가 잘 안 움직이는 스타일이라 그동안 알 기회가 없었어요."

-대학을 부산에서 나왔다며 그럼 부산에 계속 있지 그랬어.

"집에서 안 멀어져야 돈이 덜 들고(히히), 제가 독립을 추구하는 스타일도 아니고요. 또 우리 가족이 엄청나게 사이가 좋아서, 꼭 붙어 있어야 해요. 가족은 엄마, 아빠랑, 여동생 이렇게 고요, 여동생은 4살 터올 인 데 걔가 정신 연령이 조금 높고 제가 조금 낮아서 또래처럼 친하게 지내요."

▲ 화가 배우리./강대중 제공

"아기 때부터 쭉 그림 그렸어요"

-대학 졸업은 언제?

"2012년 2월에 했으니 4년 정도 됐네요."

-졸업하고 김해 와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한 거야?

"아뇨, 대학 4년을 집에서 다녔거든요. 졸업 전에 이미 김해에 조그만 작업실이 있었어요. 제가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작업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요, 학교 다닐 때는 학교에서 작업하고 김해 작업실은 짐만 보관했었어요. 지금 이 작업실은 엄마랑 옷 가게 열면서 새로 만들었는데 처음으로 제가 직접 꾸민 공간이라 아주 맘에 들어요."

▲ 화가 배우리 작업실./강대중 제공

-그림은 언제부터 그렸어?

"그게 대답하기 애매한데요, 그냥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어요. 저는 꿈이 바뀐 적이 없어요. 아기 때 사진 보면 색연필 붙들고 있고, 가위로 색종이 자르고 있고 그래요. 미술 학원도 다닌 적 없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화실에 다녔는데, 거기서 입시 준비까지 다 했어요. 거긴 입시 준비를 하는 곳이 아니고 그냥 그림 가르치는 곳이에요. 제가 뭔가 배움이 강제적인 것을 싫어해요. 스스로 해야 자연스럽고 재밌어요. 더군다나 예술은 자연스러운 게 더 중요하잖아요. 입시는 이걸 어떻게 그려야 그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정해져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너무 입시에 관심이 없어서 좋은 대학에 못 가긴 했어요."

▲ 화가 배우리./강대중 제공

"얼굴 말고 다른 소재는 관심 없어요"

-우리는 주로 사람 얼굴을 그리잖아, 이유가 있어?

"대학교 들어가고부터 딴 거는 안 그린 것 같아요. 중·고등학교 때 화실 다닐 때도 선생님이 뭐 그리라 한 거 말고는 계속 얼굴만 그렸어요. 뚜렷한 계기는 없고요, 얼굴 말고는 관심이 안 가서 그래요. 그냥 재밌어요. 동물이나 식물도 좋아하는 데 사람을 탐구하는 게 제일 재밌는 거 같아요. 사람 얼굴을 그리면 외형만 그리는 게 아니고 뭔가 그 안에 있는 영혼까지 담아낼 수 있잖아요.

'왜 다른 걸 안 그리느냐, 이것저것 그려보고, 다시 자기 것으로 돌아왔을 때 대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는데요, 정해진 답은 없는 것 같아요. 느리고 답답할 수는 있어도 제가 하고 싶은 거 할래요. 진심이나 진정성이 없는 건 싫어요.

다른 작품을 봐도 진심이 안 담기면 그림에서 바로 티가 나거든요. 그런 거 생각하면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이런 이야기를 아무 데서나 할 수는 없어요. 편협해 보이잖아요. 저는 누군가가 충고를 할 때 무조건 안 듣겠다는 것도 아니고요. 저한테 뭐하라고 하는 데서는 거부감은 없어요. 만약에 어떤 교수님이 제 그림을 보시고 아무 말 안 하는 게 차라리 괴롭지 뭐라고 하는 게 좋아요. 제가 알아서 걸러 들으면 되니까요."

▲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Ⅰ

-사람 얼굴을 그리려면 실제로 다른 사람 얼굴을 많이 관찰했을 거잖아? 이제는 그 사람의 기분이나 성격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아?

"그림이랑 크게 상관없을 수도 있는데요, 저는 원래 지나는 사람이나 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지금 어떤 기분일까'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한때 아기 얼굴 말고 제 자화상을 소재로 이런저런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데, 그때 주제로 삼은 게 사람이 평소에 사소한 행동들에서 드러나는 감정을 캐치해서 그 부분을 확대해서 그리는 거였거든요. 그거 할 때는 대중교통도 타고 다니고, 길도 막 걸으면서 완전 열심히 사람 얼굴 보러 다녔어요."

▲ 이서후 기자와 화가 배우리./강대중 제공

"이 시대에 완전히 독창적일 수는 없겠죠"

-이건 내 느낌인데, 내가 중국에 있으면서 중국 작가들 작품을 자주 봤어. 근데 우리 작품 보면 중국 작가 같은 느낌이 있거든. 특히 아기 얼굴 작품들이 그래.

"그런 이야기 많이 들어요. 저는 중국 작가라고는 유명한 몇 명 말고는 잘 몰라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중국 작가가 있긴 했는데, 저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잘 모르겠어요. 아기 그림은 분위기가 그래서 그런가 봐요. 뭔가 사람인데 눈이 크고 공허해 보이고 하니까.

저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있어도 그 작가를 탐닉하지는 않거든요. 아무리 좋은 작가라도 제가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고 안 드는 작품도 있는 거로 생각해요. 제가 자료 검색을 많이 하지도 않아요. 자료가 머리에 너무 많이 들어와 있으면 자기 것을 못 찾을 수도 있고요. 아니면 무의식중에 내가 많이 봤던 그 작가를 따라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중국 작가들처럼 색감이 강한 거는 싫어요.

어떻게든 입에 오르내리는 거니까 결과적으로는 좋은 거 같아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시간이 많이 흘러서 어디 갔을 때, '그때 중국 작가 느낌 나던 그 배우리 작가네'라고 알아봐 줄 수 있는 거죠."

▲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Ⅱ

-물론 중국 작가와 작업 자체는 비슷할 수 있지. 그래도 배우리만의 뭔가는 분명히 있는 거 같아.

"솔직히 한때는 고민을 많이 한 적이 있었어요. 저는 엄청나게 개성이 넘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적은 없는데요, 그래도 누군가와 비슷하다는 말을 들으면 그렇잖아요.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안 비슷한 게 있을 수 있나 싶어요. 세상에 그림 그리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아졌고, 옛날 사람들은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 어려웠지만 요즘에는 인터넷 등을 통해 바로 알 수 있잖아요. 이런 속에서 정말, 완전 독창적인 것은 못 할 거 같아요. 그거는 일단 포기해야 하는 부분인 거고, 비슷한 속에서도 서로 미세하게 다른 부분이 있는 거니까요. 만약에 비슷한 그림을 그리는 A, B, C란 세 작가가 있다면, 사람들이 A를 좋아할 수도 있고 B를, C를 좋아할 수도 있는 거죠. 나와 비슷한 그림을 그리는 다른 사람이 있더라도, 언젠가는 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져요."

▲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Ⅲ

"느리더라도 제 스타일 추구하고 파요"

-내 생각도 그래, 완전 새로운 거 보다는 고만한 작품 중에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게 있거든.

"아직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새로운 것은 거부감이 들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 같아요. 지금 엄청나게 유명한 미술가 중에는 옛날에 천대받던 이들도 많잖아요. 그래도 언제나 완전 새로운 것을 하는 작가들은 있는 거 같아요."

-어쨌거나 우리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잖아.

"제 생각에 약간, 한 반쯤은 귀를 닫고 자기 길을 쭉 가는 게 미술가로서의 개성을 찾는 길 같아요. 너무 이 얘기 저 얘기 다 들으니까 자기 것을 못 찾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 화가 배우리 손./강대중 제공

▲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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