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기타 하나로 세상과 소통하라

'이공공콘서트 23번째 이야기 "사파동 골목길 통기타 소리가 맛있다" 6월 5일 금요일 늦은 8시 사파동 126-9번지'라는 안내문이 적혀있는 사진 한 장. 그리고 '오늘은 창원 통기타동호회 분들 모임에 이공공콘서트 하러 갑니다. 불금에 비도 촉촉이 오고 노래할 맛 나겠는걸요^^~~~'

세상 어느 곳이라도 20명만 모이면 무료로 독창회를 열어주는 2집 가수 이경민 씨가 2015년 6월 5일 자신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올려놓은 글이다. 맛있는 통기타 소리를 탐하려 그를 만나러 나섰다.

무료콘서트, 음반판매로 돌아오다

"입장료라뇨? 제 노래를 들어주시려고 모여주신 것도 고마운데요. 저는 기타 하나만 있으면 공연 준비 끝입니다. 화려한 조명이나 멋진 무대, 값비싼 음향시설이 없어도 전혀 문제없어요. 오직 목소리와 손가락으로 소통하는 가수잖아요. 여러분의 박수와 흥얼거림이 제겐 출연료입니다."

타고난 노래쟁이 이경민의 무료콘서트는 꾸밈없는 무대였다. 그는 삼삼오오 모여 앉은 관객들을 불과 1m 남짓 앞에 두고 마이크도 없이 생목소리 하나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눈을 지그시 감고 또 다른 이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쳐가며 그의 노래와 하나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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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앨범 <사랑에 빚지다> 이후 3년 만에 2집 정규앨범 <카르페디엠>을 지난 4월에 발표했죠. 앨범을 내면서 제가 아이돌 가수도 아니고 대중성 있는 음악도 아닌 포크 가수로서 저를 알리는 방법은 공연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재능기부와 공연을 철저히 구분했죠. 관객에게 최선을 다하고 노래하는 가수로 정당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 유료공연 원칙을 고수했죠. 그러나 2집을 발표하면서 그 원칙을 수정했습니다. 이십 명만 모여서 불러준다면 어디든 찾아가 공짜로 공연한다는 이공공콘서트를 기획한 거죠. 처음 시작하면서 소공연 50회를 목표로 했죠. 그런데 쇼케이스를 시작하자 관객들 반응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공연 목표를 100회로 수정했죠."

돈 주고 볼 수 없는 23번째 이공공콘서트는 1시간 30여 분 지나서야 끝났다. 이심전심인가, 이 씨 노래에 흠뻑 빠진 관객들은 현장에서 구매한 그의 음반 CD에 사인을 부탁하고 있었다. 가수도 웃고 관객도 즐거워하는 이공공콘서트는 그렇게 막이 내렸다.

"출연료는 없지만, 공연을 보신 관객들께서 자발적으로 앨범을 구매해 주십니다. 공연 감동후불제 개념이죠. 지금까지 공연하면서 700여 장 정도가 판매됐죠. 그 덕에 힘도 내고 또 다음 공연도 준비하죠. 가끔은 의사소통이 잘못돼서 공연장 대관료를 제가 지급한 경우도 있지만, 이제는 이공공콘서트가 알려지면서 음반 판매도 늘고 있죠. 이 추세라면 500회 공연만 하면 1만 장 파는 것은 문제도 없는데 1억이라 너무 욕심이 과하죠. 후후(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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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1 30 일요일 그린비 6번쩨 정기공연.

고추장으로 배고픔을 달랜 신문 배달 소년

이 씨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40년을 사는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일절 없다. 1977년 그의 부모님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아가야 경민이 두 살 되던 해였다. 그는 10살이 될 때까지 친할머니와 단둘이 부산진구 범전동에 살았다. 부전시장에서 좌판으로 생계를 꾸린 할머니는 어린 경민이의 보호자가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단 한 명의 형제자매도 없이 그는 혼자였다. 유년시절 외로움은 배고플 때 더욱 사뭇 쳤다.

"제가 고추장에 대한 안타까운 기억이 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요. 할머니는 시장에 가시고 학교 갔다 오면 배가 고파서 장독대에 있는 고추장을 엄청나게 퍼먹은 적이 있어요. 보리쌀로 만든 고추장이 얼마나 맛있던지 며칠 동안 항아리 반동이를 퍼먹었는데 할머니는 제가 먹은 줄도 모르고 고추장 도둑이 들었다고 이웃집과 소동을 피우신 적이 있죠. 또 그때 동네 구멍가게에서 빵도 훔쳐먹곤 했는데 절도죄 공소시효는 지났겠죠.(웃음)"

그가 10살 되던 해, 돌아가신 아버지 동생 집으로 거처를 옮기며 어린 경민이는 철이 들기 시작했다. 학업과 신문 배달을 병행하며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박 기자님도 신문사에서 일하시지만, 신문업계 발은 제가 먼저 디뎠을 거예요.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산 부산진구 초읍에 있는 삼촌집으로 이사를 하자마자 부산일보 배달을 시작했죠. 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군 제대를 하고 라이브 가수 시작 전까지 신문 배달을 했으니 15년을 했네요. 첫 월급 3만으로 시작해서 50만 원까지 받았으니 제가 신문업계 선임이죠. 후후(웃음)."

이 씨는 외로웠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모진 세파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자라난 잡초의 경쟁력이 몸에 배어 있었다. 세상 물정은 일찍 깨우쳤지만, 남들 다 겪는 청소년기의 방황은 그를 비켜 가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첫 가출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배웠다. 부산상고 재학 시절 어깨에 힘주고 다녔던 이야기는 어느 영화감독에 의해 <바람(Wish)>이란 영화로 재탄생 되기도 했다.

가수가 되기 위한 선택 대학가요제

1995년 그는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부상상고 재학시절 책보다 몸 만들기를 좋아했던 그는 큰 물이 흐르는 서울로 가서 대학도 진학하고 반듯한 사회인이 되어 부산으로 돌아오리라 결심한 것이었다. 세상은 학생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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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기타 가수로 만들어 준 한 권의 책 <이정선의 기타교실>

"어린 시절 배운 신문 배달을 밑천으로 신촌에 있는 한겨레 신문보급소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대학입시학원에 다녔죠. 딱 10개월 공부하고 대학입시를 쳤는데 기가 센 데서 공부를 했지만 결과는 꽝이었어요. 그때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이 입시공부를 가르쳐준다고 내려올 것을 권했지요. 여긴 아니다. 작은 물에서도 가능하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부산으로 돌아왔죠."

1996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반겨주는 것은 입대 통지서였다. 그는 평발 때문에 신체검사 4급을 받았지만, 상근예비역이 아닌 논산훈련소행을 택했다. 군대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려는 그에게 꿈을 선물했다. 이 씨는 제대 후 가수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외로움을 달래려고 독학으로 배웠던 기타 실력이 그의 꿈을 응원했다.

"병장 진급하고 틈만 나면 노래 만들고 흥얼거렸죠. 뭐 정통으로 배운 것도 없고 오직 종이에 가사만 쓰고 악보도 없이 노래를 만들었죠. 지금 생각하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그때 만들었던 '너의 무덤 앞에서'란 노래를 아직도 가지고 있죠. 가수가 되려면 대학가요제에 나가야 한다고만 생각했죠. 그래서 제대 후에 대학에 가려고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의 대학입시를 도와줄 친구는 경남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1999년 그는 대학에 진학해 대학가요제 무대에 서겠다는 마음으로 마산 땅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예비역 4수생의 대학 입시 공부도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런 그에게 교회는 안식처였다. 또한 교회에서 마련한 성탄절 뮤지컬에서 '루시퍼'란 배역을 맡은 그는 일약 노래 잘하는 예비 가수로 변신했다. 교회 명가수란 유명세 하나만 믿고 대학가요제가 아닌 강변가요제에 출사표를 던졌다. 결과는 예선 탈락, 하지만 이 경험이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라이브 카페 통기타 가수로 입문하다

그는 가수가 되기 위해서 대학을 선택했다. 그리고 진학을 위해 서울서 주경야독을 했지만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학업을 지도해 줄 친구를 따라 마산에 왔다. 오직 대학가요제만 바라보고 달려온 것. 하지만 꿈을 이루는 새로운 출구를 찾은 것이다.

"2001년 마지막 열린 강변가요제에 군에서 만들었던 노래를 가지고 출전했죠. 악보가 맞지 않아 연주도 못 해보고 탈락했어요. 그때 심사위원이 뭐 이런 악보가 있느냐고 그러더라고요. 후후(웃음). 그때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도 가수가 될 수 있다는 자신을 얻었죠. 그 길로 돌아와 마산 진동에 있는 라이브 카페에서 첫 오디션을 봤죠. 그곳에서는 떨어졌는데 지켜보던 감화식 대선배가 저를 경남대학교 앞 카페에 추천을 해주셨어요. 제가 모창한 '김광석 노래'가 대학생들에게 어울린다고 하셨죠. 감 선배님의 예측은 적중했죠."

그의 노래는 마산 라이브 무대를 강타했다. 2006년까지 해운동 너른마당, 합성동 송하, 산복도로변 그린힐·거북선 레스토랑 등에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 통기타 가수 생활은 계속됐다. 그의 존재는 라이브 카페 업계에서 상한가를 달리고 있었다. 돈도 유명세도 얻은 그였지만 허전했다. 술 취한 청중 앞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해서 남의 노래를 부르는 자신이 미워졌다.

"라이브 업계에서 소문나서 제 고향 부산까지 원정 무대를 다녔어요. 당시 부산 쪽 어깨들이 운영하는 해운대 포장마차에서도 노래를 불렀죠. 자의 반 타의 반이지만 자기 노래가 아닌 남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죠. 음악적 회의가 밀려왔어요. 술 취한 고객들은 가수 이경민이 아닌 이경민식 노래 스타일을 좋아했던 거죠. 여기서 머물렀던가는 진정한 가수의 꿈은 사라진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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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자기 결정과 홀로서기에 강했던 그는 결단을 내렸다.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풍족한 현실 대신 가수가 되려고 신문을 배달했던 옛 기억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의 나이 31살 되던 해였다.

40대를 노래하고 싶은 2집 가수

과감한 포기와 현실 자각은 그를 노래 만들고 부르는 가수로 거듭나는 계기를 제공했다. 모창 가수가 아닌 이경민 표 노래를 선보이기 위해 그가 먼저 시작한 것은 참여와 소통 그리고 음악공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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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가수들과 함께. 왼쪽부터 김산, 하동임, 이경민

그는 마산에서 창원으로 본거지를 옮기며 2006년 창원 지역 가수들이 모여 만든 '아사노세(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다운 노래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 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 아사노세에서 만난 박영운 씨와 '그린비'로 활동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만들어 나갔다. 또한 2009년 국악과 대중가요의 접목 통한 크로스오버 음악을 위해 '예다인'을 탄생시켰다. 이 씨는 자신만의 폭넓은 음악 세계를 구축하며 본격적으로 곡을 썼다. 컴퓨터 미디(MIDI)와 화성학 등을 독학했고, 작곡하는 곡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사로 붙였다. 가수 경민 씨가 작곡·작사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가자 그에겐 '지역 가수'란 말 대신 '싱어송라이터'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리고 2012년 9월 7일 창원 도파니 아트홀에서 이경민 1집 앨범〈사랑에 빚지다〉발매 기념 콘서트를 열었다. 그가 제2의 가수 인생을 선택한 지 6년, 가수의 꿈을 안고 마산에 온 지 13년 만에 탄생한 첫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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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악과 포크의 만남. 예다인 공연.

"올해 4월에 발매만 2집 <카르페디엠>은 170만 원만 가지고 시작했어요. 편곡자와 녹음실·음반업체에게 양해를 구했죠. 그래도 가진 것 없어도 이경민 이름 석 자에 아낌없이 도와 주는 여러분들이 있어 더욱 열심히 해야 합니다. 미래를 약속한 여자 친구도 있지만 결혼은 잠시 미뤘습니다. 30대에 노래를 배웠다면 이제 40대에는 그 노래를 부르려고요. 40대가 들려주는 40대 이야기가 3집 핵심이에요. 내년 발매를 목표로 열심히 만들고 있습니다. 3집이 성공해야 노총각 신세를 면할 텐데. 후후(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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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장콘서트 후 팬들과 함께

5시간이 걸린 이 씨와의 인터뷰는 장소를 이동해 창원시 의창구 사림동 '즐거운 마음'이라는 연습실에서 마무리했다. 이곳은 그의 주거 공간이자 '하우스 콘서트'를 여는 장소다.

"저의 콘서트장까지 찾아와주셨는데 그냥 보내 드릴 수는 없죠. 박 기자님과 피플파워 독자님께 노래 한 곡 불러 드릴게요. 2집 중에 '농부'라는 곡이 있는데요. 무상급식이 중단되고 나서 이 노래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자~그럼, 밥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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