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방황의 끝은 결국 무대였다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부부생활을 그만두고 다시 연인이 되고 싶습니까, 결혼서약서를 읽었던 바로 그 날의 전날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혹시 내 남편이 내 얼굴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까 … … 이 중에서 혹시 하나라도 해당이 된다면 당신은 물!뜯!싸! 관람요망 인물입니다!!'

8년 차 부부의 권태기 탈출을 다룬 연극 <물고 뜯고 싸우고 사랑하기> 홍보포스터 내용이다. 이 연극은 가배소극장(창원시 창동)에서 지난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12회 무대에 올랐다. 극 중 아내 역할을 맡은 연극배우 김정희(41) 씨의 진짜 삶을 들여다봤다.

정희 씨를 만나러 갈 때 가랑비가 조금씩 내렸다. 한 여인이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 느낌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약속 장소인 창동 가배소극장으로 들어갔다. 정희 씨였다. '여배우' 포스가 물씬 느껴졌다. 하지만 도도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듯 호탕한 웃음부터 내던졌다.

대학 졸업 무렵 연극의 길 결심

정희 씨 고향은 포항 구룡포다. 털털한 지금 성격에서 어릴 적 모습이 어느 정도 연상된다.

"얌전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밖에서 노는 아이도 아니었어요. 어릴 때부터 '연극놀이' 하는 걸 엄청나게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때 연말이면 반 아이들이 함께 공연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제가 대본을 썼죠. '흥부 놀부' 이야기를 변형하는 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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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인 김정희 씨./김정희 제공

고등학교 때는 전문 선생님에게 지도까지 받으며 연극을 했다. 무대 전 떨림보다는 무대 후 후련함이 오래 남았다. 하지만 이쪽 일을 제대로 해 보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대학 들어가면 연극동아리 활동만 생각하는 정도였다. 대학 학과는 이미 오래전 자연스레 선택했다.

"국어를 좋아했어요. 백일장이 열리면 나를 위한 대회라는 생각을 했죠. 스스로 소질있다고 생각한 거죠. 하하하. 그래서 당연히 국어국문학과에 가는 것으로 받아들였어요."

창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합격하면서 이 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막상 대학에 들어가서는 전공은 뒷전이었다. 학생회 활동과 연극에 열정을 쏟았다. 입학 전 스스로 창원대 극예술연구회를 찾아갔다. 1년에 한 편씩 연기 혹은 대본작업으로 참여했다. 1997년 IMF가 터졌을 무렵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진로 선택 귀로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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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인 김정희 씨./김구연 기자

"국어국문과 친구들은 대부분 임용고시 혹은 공무원시험을 준비했죠. 의미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저는 좀 더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이윤택 선생님 작품인 <청바지를 입은 파우스트>를 연출하면서 이 길로 마음 굳혔죠."

졸업 후 창원예술극단에 들어갔다. 1년 반가량 활동했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오히려 그래서 연극 공부를 좀 더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서울로 가서 문예진흥원 공연예술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이병훈 연극연출가 등의 지도를 받았는데, 이때 배움은 지금까지 큰 자산으로 남아있다. 2년 과정을 끝내고 이제 현장에서 자신을 드러낼 차례였다. 하지만 극단 소속 없이 객원배우로 활동했다.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카드 돌려막기가 반복됐고, 결국 한계점에 다다랐다. 몸과 마음이 지치면서 결국 연극에 대한 뜻을 접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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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인 김정희 씨./김정희 제공

고향서 입시학원 국어강사로

정희 씨는 고향 포항으로 돌아왔다. 20대 후반 정희 씨는 입시학원 국어 강사로 변신했다. 학원 강사 또한 쇼맨십이 필요했다. 무대 경험이 학생들과 소통에 큰 도움이 됐다. 꽤 열정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사춘기 소녀처럼 다시 문학에 빠져들기도 했다. 수업시간 <소나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같은 작품이 나오면 사용된 의미, 낱말 하나하나 곱씹게 되었다. 시에 대해서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이때는 몰랐다. 훗날 연극 대본 쓸 때 이 경험이 큰 도움될 줄은 말이다.

입시학원 강사 일을 하는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결혼하고, 딸 아이 낳고, 그리고 이혼을 했습니다. 아이와 함께 동생이 있는 울산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공부방을 시작했습니다. 국어뿐만 아니라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고요. 잘해야겠다는 욕심이 드니까 학생들을 달달 볶게 되더군요."

마음이 지쳐가던 어느 날이었다. 마당놀이패 '어처구니' 대표와 안부 전화를 했다. 이것이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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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인 김정희 씨./김정희 제공

"통화를 하다가 만나러 불쑥 창원까지 오게 됐어요. 잊고 있던 무대가 마음속에서 다시 꿈틀거리더군요. 그때부터 6개월 정도 주말마다 창원에 왔어요. '그래,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자'는 마음에 아예 울산 생활을 정리하고 창원에 오게 됐죠. 이제는 정말로 연극을 하면서 살겠다는 마음으로 말이죠."

부모님은 딸이 연극을 하는 것에 대해 완강히 반대하는 쪽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 접었던 일, 그것도 아이까지 있는 상황에서는 지지할 리가 없었다. 정희 씨는 그냥 '극단 사무실 일 봐주러 간다'는 정도로 둘러 얘기했다. 물론 결국에는 부모님도 알게 됐지만 말이다.

2012년이 다시 창원에 온 정희 씨는 그 자체만으로 마음이 편했다. 친구 하나 없던 울산생활과 달리, 학교 선·후배들이 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0년 만에 무대로 돌아와 <배비장전> 같은 마당극에 참여했다. 다시 1년 지나서는 지금의 가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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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인 김정희 씨./김정희 제공

이제는 진짜 연극인 김정희로

정희 씨는 대학 시절 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다. 결혼한 이들 이야기를 다룬 <두 여자 두 남자>다.

"연기는 상상에 많이 의존하는데요, 이 연극은 부부 이야기이기에 실생활 경험이 더 중요했죠. 이제 막 스무 살 넘은 대학생이 부부 심리나 깊이에 대해 얼마나 알았겠어요. 그냥 입만 뻐끔뻐끔했던 거죠."

그로부터 15년이 흘렀다. <물고 뜯고 싸우고 사랑하기> 또한 부부의 이야기다. 이제는 그 느낌이 달랐다. 연기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 또한 좀 더 돌아보게 했다.

"저는 실제 부부생활에서 '아니다' 싶어 이혼이라는 선택을 한 거잖아요. 이 공연을 하면서 부부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다르더라도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도 알게 됐고요."

정희 씨는 공연에서 직접 연출한 구채민(48) 씨와 부부 호흡을 맞췄다. 출연한 이가 이들 단둘이다. 실제 연습할 때도 엇나가는 부부 모습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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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인 김정희 씨./김구연 기자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티격태격하세요. 궁합 안 좋다는 원숭이띠와 토끼띠거든요. 그런데 채민 오빠와 저도 띠가 그렇거든요. 너무 안 맞아서 싸우기도 엄청나게 싸웠죠. 하하하. 그래도 관객들이 '완전 우리 얘기'라며 열렬한 반응을 보였어요. 공연 후 미리 신청한 부부 관객들에게 '리마인드 프러포즈' 기회를 드리기도 했고요."

정희 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의 휴대전화가 여러 차례 울렸다. 학교 마치고 집에 혼자 있는 10살 된 딸이었다. 전화로 엄마를 보채는 눈치였다. 특별한 일 없으면 늘 붙어 다니는 둘이기에, 떨어져 있는 시간이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딸이 창원 올 때 7살이었는데 제도권 교육이 싫어서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어요. 사실 학교도 안 보내고 재택교육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건은 못돼 탁아 개념으로 보내고 있어요. 저 나이 때 학원도 여러 개 다니는데 검도 하나만 보내요. 그러다 보니 연극 연습할 때도 데리고 올 때가 많죠. 사람들과 뒤풀이할 때도 가끔 그러고요. 그래도 문화예술계는 회사와 달리 그런 걸 이해해 주는 분위기가 있어 감사한 노릇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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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인 김정희 씨와 딸./김정희 제공

정희 씨는 여전히 연극 외 일을 병행한다. 다문화센터, 학교, 복지관 같은 곳에서 연극 관련 강의를 한다. 사실 생활적인 측면에서 예전보다 그리 나아진 것은 없다. 그런데 이제는 불안하지 않다.

"그동안 자질구레한 고민 속에서 방황을 많이 했어요. 아마 제 길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연극을 다시 하게 됐을 때는 그것만으로도 가슴 벅찼어요. 사실 지금은 아이까지 있으니 예전보다 더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도 마음은 편합니다. 뭘 해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고요. 연기에 대한 오기도 많아졌고, 또 자신감도 커졌어요. 마음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가 속해 있는 가배는 예비사회적기업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구성원들은 지원금 없이 자구책을 찾아야 하는 지금 머리를 맞대고 있다. 긍정적인 정희 씨는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연기와 대본 작업을 함께한다. 개인적으로 객원으로 참여하는 작품이 거창연극제 등에 출품될 예정이다. '가곡전수관과 함께하는 국악아동극'에서는 안데르센 동화를 각색해 준비 중이다.

정희 씨는 이제 이러한 계획을 품고 있다.

"연극 역시 서울에서 온 것과 이 지역에서 만든 것은 구조적·기술적으로 차이 날 수밖에 없죠. 제가 여기서 아무리 셰익스피어 연극을 만들어도 비교될 수밖에 없죠. 그래서 내가 발 딛고 있는 지역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산 오동동에 오동추야 설명 입간판을 봤는데요, 예를 들면 그런 오동동 이야기 같은 거죠. 이제는 그러한 것에 욕심이 나고, 또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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