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 경남-경남예술인]고향에 뿌리내린 거장들

여기 다룬 예술가들은 경남에서 태어나 경남에서 활동한 거장들이다. 물론 이들은 일본이나 프랑스로 유학을 가기도 하고, 한동안 서울에서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경남으로 돌아와 지역 문화계에 자극을 주고, 고향에서 눈을 감았다.

누구를 우선해서 다뤄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컸다. 예컨대 마산 출신 시조시인으로 서울에서 활동한 이은상, 평양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주로 활동한 작곡가 조두남 같은 이들은 예술가로서는 훌륭하다. 하지만 혼란한 근현대사 속에서 보인 '기회주의적 삶의 궤적' (여전히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탓에 이들을 대표 예술인으로 다루기는 어려웠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여기 소개한 이들 외에, 어디 내놔도 모자라지 않은 분들이 경남에 참 많다는 것이다.

▶ 참고문헌 : <우리 춤의 선각자, 춤꾼 김해랑>(마산국제춤축제위원회 엮음, 불휘미디어, 2011), <그리움의 바다 위에 영혼을 조각하다 '문신의 삶, 그리고 마산'>(이경미 노성미 김은정, 경남도민일보, 2009), 경남도민일보 지난 기사.

◇무용가 김해랑(1915~1969)

김해랑은 1915년 10월 마산시(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에서 태어났다. 1932년 춤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현대무용을 배웠다.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던 최승희에게서 우리 전통춤도 익혔다. 1939년 귀국해 고향 마산에 김해랑무용연구소를 세우고 많은 제자를 키웠다. 그리고 한국전쟁 후에는 서울에서 지내며 한국무용예술인협회를 창설하는 등 한국 무용계 대들보 노릇을 했다. 1956년 11월 다시 고향 마산으로 돌아와 남은 평생을 지역 문화·예술인과 함께 보냈다.

김해랑의 춤은 우리 고전무용에 현대적인 색을 입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아리랑'을 꼽는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무용으로 만든 이 춤은 해방 전부터 1960년대까지 가장 자주 추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에 공연 무대로 자주 쓰이던 마산 '강남극장'에서 올린 김해랑의 아리랑 공연을 묘사한 글을 보자.

1945년 김해랑의 항가리안 댄스. /<우리춤 선구자 김해랑>(김해랑 춤 보존회, 2010)

"낫을 휘두르는 춤사위, 남루하고 더럽혀진 적삼을 입은 한 농부가 울분에 찬 듯 낫을 휘두르고 있다. 그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호흡은 거칠다. 그는 마치 일제에 대항해서 싸우는 듯 혼자뿐인 무대 위에서 가상의 적을 향해 계속 낫질을 했다."(마산국제춤축제위원회, 2011)

김해랑은 1969년 7월 마산합포구 자택에서 영원히 눈을 감았다. 오랜 암 투병 생활의 끝이었다.

"야들아, 너네는 겁도 없이 무대에 잘도 선다. 나는 와 이리 무대가 겁나는지 모르겠다."

그의 제자가 전한 이 말은, 한평생 그의 춤이 얼마나 진지했는지 보여준다.

◇화가 전혁림(1916~2010)

전혁림은 1915년 1월 충무시(현 통영시) 무전동에서 태어났다. 한국의 피카소, 색채의 마술사, 한국 색면추상의 선구자 등 한국 미술사에 드러나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그는 주로 고향 통영과 부산 등 지역에서 활동했다. '코발트블루(cobalt blue)', 전혁림 작품의 상징인 이 색깔은 바다를 낀 통영·부산의 지역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지난 2006년 경남도립미술관에서 '전혁림의 삶과 예술'을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당시 황원철 경남도립미술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전혁림은 수도권 미술문화에 대한 사대의식을 깨뜨려낸 순수한 지역 예술가입니다. 지역성을 낙후성과 연계해서 생각해 미술 문화의 본적은 지역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무조건 수도권 문화의 종속적인 개념으로 보아 넘기려는 사고가 팽배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전혁림의 작가적인 소양과 활동을 통해서 '지역 미술을 보는 눈'을 교정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전혁림은 해방 후인 1947년 통영 출신 음악가 윤이상·정윤주, 시인 유치환·김춘수·김상옥 등과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겠다는 목표로 통영문화협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시인 김춘수는 후에 전혁림을 두고 이렇게 읊었다.

1995년 작업실에서 작업 중이던 전혁림 화백. /전혁림 미술관

전화백(全畵伯)

당신 얼굴에는

웃니만 하나 남고

당신 부인(夫人)께서는

위벽(胃壁)이 하루하루 헐리고 있었지만

Cobalt blue,

이승의 더없이 살찐

여름 하늘이

당신네 지붕 위에 있었네

- 김춘수 '전혁림 화백에게'

아흔 살이 넘도록 왕성하게 작품활동을 하던 전혁림은 2010년 5월 노환으로 눈을 감았다. 현재 고향 통영에 전혁림미술관이 있어 그의 흔적을 전하고 있다.

◇조각가 문신(1923~1995)

조각가 문신은 1923년 1월 일본에 광부로 끌려간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5세 때 귀국해 마산시(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추산동에서 살았다. 16살 되던 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화를 배웠다. 해방 후 서울과 부산·마산 등에서 인물, 풍경 등을 그리는 서양화가로 활동했다. 1961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문신은 추상화를 그리면서 조각 작업도 하기 시작했다. 1965년 잠시 귀국했다가 1967년 다시 파리로 돌아가서는 본격적으로 조각 작업에 열중했다. 1969년 프랑스 남부도시 발카레스 해안에 작품 '태양의 인간'을 설치하면서 세계적인 추상조각의 거장으로 성장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문신은 1980년 고향 마산으로 돌아와 추산동 언덕에 작업장을 마련하고 열정적으로 창작에 몰두했다. 좌우대칭이 뚜렷하고 마치 외계 생물체를 닮은 듯한 그의 조각은 현재 서울 올림픽 조각공원 등 서울과 마산을 포함한 전국 곳곳에 설치돼 있다.

"내 작품을 보려거든 마산 문신미술관으로 오시오. 유럽 전시회를 마치고 문신의 작품을 구입하겠다는 세계 굴지 회사를 향해 문신은 이렇게 말했다. 당당했던 작가 문신의 자기 예술에 대한 자부와 문신미술관에 대한 포부를 읽을 수 있는 한 마디다."(이경미 노성미 김은정, 2009)

작업에 몰두한 문신. /경남도민일보 DB

마산에 온 후 문신은 작업장이 있는 추산동 언덕에 자신만의 미술관을 14년에 걸려 완성했다. 문신미술관이다. 이는 자기 작품에 대한 사랑이면서 고향 마산에 대한 사랑이기도 했다.

문신은 1995년 5월 추산동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이보다 앞서 프랑스 정부는 문신에게 '예술문학기사' 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지역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문신의 유언에 따라 2003년 문신미술관은 옛 마산시에 기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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