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영화 성공하려면, 허브부터 만들어야"

경남에 영화제가 있을까? 있었다. 올해로 9회째인 경남독립영화제가 그것이다. 문화예술 기반이 취약한 경남에서 그것도 독립영화제를 9년 동안 끌고 오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다. 경남독립영화제를 이끌고 있는 박재현 경남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만나봤다.

하룻밤 새 쓴 원고지 100매

사실 박재현(42) 경남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사람들에게는 '박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평소에는 작품을 찍거나 경남영화협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다, 경남독립영화제를 치를 때는 집행위원장으로서 대소사를 맡는 것이다.

박 감독은 대구에서 출생했지만 마산에서 초·중·고를 나와 사실상 '마산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17살 때 운동을 시작해 대구대학교 체육학과에 진학했다.

-아니, 체육학과 다니시다가 어떻게 영화 관련으로 오시게 된 겁니까?

"사실 체육을 하게 된 것은 사부가 이끄는 대로 간 것이고, 저는 글 쓰는 게 좋았습니다. 또 대학시절 연극도 보러 다니면서 '내 꿈이 뭘까? 나는 뭘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친구와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데 텔레비전에서 '베스트극장 극본 공모'를 한다는 자막을 봤습니다. '아, 이거다!' 싶었습니다. 바로 집에 가서 극본을 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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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감독./임종금 기자

그는 그날 밤 원고지 100매가 넘는 극본을 완성했다. 물론 생전 처음 써 보는 극본이라 스스로도 엉성하다고 느꼈지만,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재밌는 것도 없고, 꿈도 없었는데 자신의 길을 찾은 것 같아 스스로 기뻤다.

얼마 후 대학을 중퇴하고 대전에 있는 영화아카데미를 수료한 후 서울로 갔다. 그것이 1999년이었다. 서울에서 5년 동안 영화계에 있으면서 연출 일을 하면서 바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중에서 '대박'을 친 작품은 없다고 했다. 대신 그는 서울에서 느낀 것이 많았다.

"지역에 있으니 문화를 누릴 기회가 적지 않습니까? 서울은 사람이 많고 각종 문화혜택을 보면서 자신의 꿈이나 기회를 빨리 찾아낼 수 있는 게 좋죠. 일거리도 많습니다. 솔직히 저는 서울 있을 때 밥 굶는다는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돈을 많이 받던 적게 받던 늘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유가 없습니다. 저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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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감독./임종금 기자

그래서 2004년 초 마산으로 돌아왔다. 택시기사를 하면서 남는 시간으로 글을 쓰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2005년 <몽환>이라는 9분 짜리 영화를 세상에 내놓게 된다.

"영화를 직접 제작해보니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감독을 도와줘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까지 폐를 끼치면 안 되겠다 싶어 저는 '다큐 영화'를 찍기로 했습니다."

다큐 영화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혼자 찍으면 되는 것이다. 30분짜리 다큐 영화 <물 흐르는 대로>를 찍고 처음으로 BUDi(부산디지털콘텐츠유니버시아드)에 상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다큐영화를 찍다 회의감이 들었다고 한다.

"창원 삼정자동 철거민 얘긴데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분들은 정말 절박해서 매달리는 건데, 나는 돈으로 보고 찍고 있구나.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뭐랄까. 그는 생긴 것부터 기자가 느낀 품성 자체가 너무 선량했다. 심지어 주연배우가 대사를 외우지 않고 촬영장에 나왔을 때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감독이 이렇게 착해서야 촬영장을 어떻게 통제할까?

"그래서 저는 스스로 마음 먹었습니다. 제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영화를 찍거나 일을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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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감독./임종금 기자

어렵게 끌고 온 경남독립영화제

그러다 2007년 그는 중요한 것을 목격하게 된다.

"당시 제가 만든 영화 <외계인>이 2007년 '인디포럼'이라는 곳에서 상영이 됩니다. 그때 인디포럼 관계자와 만나면서 얘길 했는데, 인디포럼은 영화를 하는 사람들끼리 자발적으로 모여서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만든 영화제입니다. 그때 지역에서 엄태영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인디포럼을 보고 나서 저에게 '이거 해 보고 싶다'고 추천했습니다. 저도 말을 들어보니 괜찮은 것 같아서 인디포럼 송승민 사무국장을 만나서 '경남에도 이런 것을 만들고 싶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다른 건 다 떠나서 그럼 영화제를 하려면 비용이 드는데, 어떻게 하셨습니까?

"경남에 있는 작품만으로는 힘드니까 일단 인디포럼에 상영한 작품도 가져와야 하는데 그 배급비가 200만~300만 원 정도 합니다. 그걸 인디포럼 측에서 무료로 해줬고, 극장을 빌리자니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창원대학교에서 제1회 경남독립영화제를 했습니다. 포스터와 팸플릿 비용 외에 나머지 비용은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2007년 11월 둘째 주에 '경남독립영화제'가 막을 올렸다.

-지금은 영화제를 극장에서 하지 않나요?

"네, 처음엔 창원대학교 창신대학교에서 하다가 2010년 4회 때부터 메가박스에서 극장을 빌려서 진행했습니다. 최근엔 CGV에서 하기도 했습니다. 날짜는 11월 둘째 주 목~일요일까지 4일 동안 하다가 목요일엔 사람들이 안 오기 때문에 금~일요일 3일만 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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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경남독립영화제 후 스태프 사진./박재현 제공

-영화제를 준비하는 데는 얼마나 걸립니까?

"10월 초순부터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물론 프로그램 구상하는 사람은 5월부터 영화를 보면서 프로그램을 짭니다. 팜플렛 만들고, 포스터 만들고, 대관하고, 홍보하는 데 한 달이면 됩니다. 사실 한 달 만에 되는 게 영화제가 9회째가 됐기 때문에 이젠 손발이 척척 맞기 때문입니다."

-요즘엔 비용이 얼마나 듭니까? 지원은 받습니까?

"처음엔 제가 받은 상금과 사비를 들여서 했지만, 지금은 영화협회 이사장님이 지원을 해 주시고, 창원시에서도 450만 원 정도 지원이 옵니다. 영화진흥위에서도 300만 원 지원이 옵니다. 그렇게 한 1000만 원 정도 비용을 모으면 영화제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또 계속 영화제를 해왔기 때문에 지원받는 법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관객은 얼마 정도 오나요?

"작년엔 400명 정도 왔습니다. 그중 상당수는 경남 영화계 관련된 사람이거나 아는 지인들이 많겠죠. 그래도 고무적인 게 순수하게 우리 영화제를 기다리는 팬이 있는 것 같습니다. 30~50명 정도 되는데, 그분들은 우리가 아는 지인이 전혀 아닙니다. 매년 영화제에 참석을 하십니다. '11월 둘째주에 경남독립영화제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기다리는 팬이 아니신가 싶습니다."

-이렇게 보면 영화제가 안착한 것 같은데. 영화제가 중단될 뻔한 위기는 없었습니까?

"사실 매년 위기입니다. 초기엔 영화제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 지 모르고 돈이 없어서 위기였습니다. 지금은 행정적인 일 처리를 하고 영화제를 진행하는 건 하겠는데, 더 이상 발전이 없어서 위기입니다. 무언가 한계에 부딪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도 참 하기 싫습니다. 저도 하기 싫은 걸 남에게 어떻게 부탁을 합니까? 그럼에도 '지역에 이런 게 하나는 있어야지' 싶은 마음에 끌고 온 것입니다. 제 목적은 사람들하고 즐겁게 영화제를 즐기고 싶었습니다. 각자 자기 일을 하다가도 때가 되면 뭉쳐서 편하게 자기 맡은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젠 영화제가 몇몇 사람들의 업 비슷하게 돼 버렸습니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위기입니다. 저와 몇몇 사람들이 손을 놔 버리면 바로 영화제는 문 닫는 겁니다."

-어쨌든 힘들었지만 여기까지 끌고 오셨고, 앞으로도 끌고 가셔야 하는데. 영화제의 궁극적인 목표가 뭡니까?

"일단 영화제도 영화도 모두 재미있어야 합니다. 재미있어야 한 번 온 관객이 다시 옵니다. 이렇게 영화제가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발전하면 지역에서 독립영화가 문화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영화 만드는 것도 보여주고, 제작교육도 하면서 영화의 토대가 지역에 뿌리내리는 겁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최소한 20~30년은 걸릴 것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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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경남독립영화제 모습./박재현 제공

-경남독립영화제에 지역 영화는 다 올라옵니까?

"아닙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부산 영화가 걸립니까? 물론 지역 감독들의 영화가 많이 상영되면 좋지만, 재미가 없으면 저는 못 올립니다. 그리고 전국 규모의 영화제에 최소한 출품된 정도는 돼야 상영해 줍니다."

흔히 '독립영화' 하면 막연하거나 어려울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모토는 단순했다. 재밌어야 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도, 영화제를 하는 사람들도 재밌어야 한다. 그래야 문화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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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경남독립영화제 포스터 이미지./박재현 제공

"5~7년 안에 '이슈'되는 지역 영화 나올 것"

그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경남영화협회 사무국장을 오랫동안 겸하고 있다. 지역 영화계의 사정을 물어볼 만한 위치다.

-솔직히 지역에 영화감독님이 몇 분 계십니까?

"저도 모릅니다. 임 기자님은 경남도 내 기자님이 몇 분인지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언론에 등록된 기자도 있을 것이고 명함만 파고 다니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인터넷 기자도 있을 것이고. 어쨌든 애매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연출을 하시는' 영화감독님이 20~30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지역 영화 감독 작품 중에 아직 성공한 사례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이 뭐라고 보십니까?

"지역이기 때문에 한계가 분명한 게 있습니다. 모든 게 서울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서울보다 비용이 더 듭니다. 스태프 한 사람을 구한다고 칩시다. 제가 서울에 가서 비용을 들여서 면접을 봐야 하고, 스태프도 서울에서 왔다갔다 해야 합니다. 똑같은 스태프를 쓰더라도 이 때문에 약 30% 정도 비용이 더 듭니다. 서울보다 재정이 열악한데도 더 돈을 써야 하는 구조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감독은 돈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스태프도 줄이고, 촬영 날짜도 줄이다 보면 결국 영화품질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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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플레이 볼> 감독 스틸 컷./박재현 제공

-그럼 앞으로도 지역에서 소위 '뜨는 영화'는 못 보는 겁니까?

"3년 전부터 조금씩 영화의 수준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제가 자신합니다. 5년에서 늦어도 7년 안에 분명 전국적인 이슈가 되는 영화가 나옵니다. 확신합니다. 물론 '핑계'일 수도 있지만 지원도 있어야 합니다. 사실 장편 영화에 1억 원 정도는 지원을 해 줘야 합니다. '영화의 도시'라는 부산에도 1억 원짜리 지원은 별로 없지만 앞서 말했듯이 지역에서 만들면 똑같은 거라도 30% 비용이 더 들기 때문에 이런 지원이 필요합니다. 지원이 잘 되면 5~7년이 아니라 그전에도 인정받는 영화가 나올 겁니다."

말은 맞지만, '지원해 달라'는 말 만큼 쉬운 말은 없다. 그도 이런 점을 잘 아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영화인들의 '허브'입니다. 자유롭게 드나들고 어울리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생기고 영화 지원사업이 생기면서 저도 몰랐던 영화인들이 많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사업 끝나면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립니다. 뭔가 허브가 될 만한 공간만이라도 있어서 지역에서 영화 하는 사람들이 모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협회에서도 제가 사무국장인데, 정말 전문 행정가가 사무국장을 맡아야 합니다. 기업들 돌면서 후원도 받고, 대신 기업들 영상물을 만들어주면서 수입구조도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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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감독의 영화 <플레이 볼> 스틸 컷./박재현 제공

근 10년 넘게 그는 지역영화계 일선에 있었다. 또 그의 선량한 성격상 과장하거나 꾸미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치에 맞았고 상식적으로 납득이 됐다. 분명 지역에서도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영화가 나올 것이다. 그때를 가늠하고 싶으면 오는 11월 13~15일(금~일요일) 열리는 경남독립영화제에 참석해 보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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