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득호도(難得糊塗)란 말이 있다. 어리석어지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청나라 문인 정섭(鄭燮 1693~1765)이 남긴 이 글귀는 그가 덧붙인 시를 음미해야 본 뜻을 알 수 있다.

'총명난(聰明難) 호도난(糊塗難) / 유총명이전입호도갱난(由聰明而轉入糊塗更難) / 방일착(放一着) 퇴일보(退一步) 당하심안(當下心安) / 비도후래복보야(非圖後來福報也)'

'총명하기도 어렵고, 어수룩하기도 어렵다. 총명한 사람이 어수룩해지기는 더 어렵다. 한 생각 버리고, 한 걸음 물러나면 마음이 편안해지리니. 도모하지 않아도 나중에 복된 응보가 올 것이다.'

하심과 탈속이 엿보이는 이 구절은 지금도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한다고 한다. 판교(板橋)라는 호로 더 친숙한 정섭은 청대(淸代) 시서화(詩書畵) 부문에서 독창적인 일가를 이룬 명인이자, 추사 김정희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판교는 과거에 급제해 산동에서 12년 동안 목민관으로 있을 때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고관대작과 토호로부터 미움을 사 예순한 살에 벼슬살이를 그만둔다. 후인들은 그를 이렇게 묘사한다. "판교가 현(縣)을 떠날 때 모든 백성들이 거리로 나와 울며 그를 전송했다. 판교는 당나귀 세 필을 데리고 떠났는데, 한 필에는 자신이 타고 또 한 필에는 길을 인도하는 시동을 올리고, 나머지 한 필에는 옷과 서화 그리고 거문고 하나를 실었다!"

판교는 서예가로 가장 이름 높다. 전통서체를 혼합하여 격조 높고 특이한 필체를 완성했다. 육분반서(六分半書)로 명명되는 이 서체는 옛 예서와 전서 행서 해서 초서를 모두 아우른데다 사군자를 칠 때 쓰는 획과 기법까지 조화롭게 수용한 글씨다. 그래서 소박하고 기이하며 변화무쌍한데다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문인화가로서는 특히 난초와 대나무, 바위 그림에 뛰어났다. 육분반서와 절묘하게 결합된 문인화 역시 강한 깊이와 개성으로 가득하다. 그가 남긴 대나무 화론(畵論)을 보자. "마음으로 느낀 대나무는 결코 눈으로 본 대나무가 아니다. 먹 갈고 종이 펴고 붓 대는 순간 모양이 변하기 때문이다. 손으로 표현한 대나무 또한 가슴으로 느낀 대나무가 아니다. 요컨대 붓을 대기 전에 무엇을 그릴 것인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정해진 법칙이지만, 그림의 멋이란 법칙 밖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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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섭. <문여가화론묵죽도>, 150x35cm, 김종헌 소장.

난득호도로 대표되는 시(詩) 또한 서(書) 화(畵)와 자유롭게 교통한다. 난득호도가 가장 유명하긴 하나, 그 외에도 격조 높은 시가 부지기수다. 그중에서도 남조(南朝) 흥망을 노래한 장탄가(長歎歌)는 명시로 이름 높다. "일국이 흥하면 일국이 망하는 법이지만 / 육조의 흥망 왜 그리 총망하단 말인가? / 남인들 장강 물길 길다고 자랑하지만 / 이 물길 종래 왕조 길었음을 보지 못한 걸!"

삼국시대 오나라를 비롯해 남조(南朝)로 명명되는 여섯 왕조가 불과 수십 년 단위로 부침을 거듭한 것을 장강 긴 물과 절묘하게 대비시킨 명구다. 봉건시대 왕조 흥망에 주목한 시인치고 이 시에 감동받지 않은 이는 드물다.

판교는 난득호도가 말하듯 외유내강을 실천한 이다. 거기다 애민(愛民)과 청빈(淸貧)을 평생 도반으로 여겼다. 그렇기에 중국인들은 그 정신이 스며든 시서화 기예(技藝)를 고절(高絶)하게 여긴다. 매국노 이완용이 글씨를 잘 썼다고는 하나, 그 글씨에 감동받는 이가 드물듯! <川邊小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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