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 전문의사에서 공공의료 전도사로 변신하다

해방 1년 뒤에 태어난 아이는 이름보다 '만복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서울 종로에 차린 작은 식당이 서서히 자리를 잡더니 아이가 태어나자 날로 번창한 탓이다. 제법 여유 있었을 듯한 어릴 적 생활에 대한 기억은 없다. 만복이에게 어렴풋이 남은 기억은 한국전쟁 이후 어머니, 누나와 함께 떠난 피난길에서 시작한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 힘겨운 시절을 보낸 아이는 커서 의사가 된다. 그리고 50년 세월을 건너뛰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한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에게 어렸을 적 별명대로 복을 안긴다. 아프고 의지할 곳 없어 서러운 외국인 노동자에게 그는 '만복이'였다. 지난 4월 13일 창원보건소장으로 부임한 최윤근(69) 의학박사를 만났다.

창원시 의창구 신월동에 있는 창원보건소는 새로 짓고 있다. 34년이나 된 건물로 보건의료 수요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창원시가 신축을 결정했다. 새 건물은 2016년 12월 완공 예정이다. 지금은 성산구 상남동에 임시청사를 운영한다. 창원보건소는 의료 민원 업무는 임시청사, 행정 업무는 의창구 팔룡동에 있는 건강증진센터로 옮겼다. 최윤근 창원보건소장을 만난 곳은 건강증진센터다.

"어렸을 때 기억은 거의 없어요. 5살에 전쟁이 났고 6살에 1·4 후퇴가 있었지요. 어머님, 누님과 걸어서 피난을 떠났는데 충청도까지 갔어요. 아버님 고향이 경기도 여주인데 여주에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로 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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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윤근 창원보건소장./박일호 기자

조용한 음성은 높낮이에 기복이 없었다. 최윤근 소장을 만나기 전에 본 증명사진은 굳은 인상이었지만 실제 얼굴은 미소를 놓지 않는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서울 성남고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 의과대학에 진학한다. 하지만, 최윤근 소장은 인문학 쪽 취향이 더 각별한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2~3학년 때 진로 때문에 방황했어요. 문과 쪽에 관심이 더 많았거든요. 철학, 시, 역사 관련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의학 공부에 필요한 생물, 화학은 별로 관심이 없었지요. 의과대학을 들어간 것은 현실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대학 신문사 편집장 의대생

계산하고 기술을 익히고 외우고 실험하는 쪽보다 쓰고 읽고 사색하는 게 좋았던 학생이었다. 전공은 의과였지만 그는 굳이 서울대 신문사에 들어가 편집장까지 맡게 된다. 의과 출신 편집장은 최윤근 소장 전에는 없었고 확인할 수 없지만 이후에도 없었을 듯하다.

"항상 쓰는 것을 좋아했어요. 시, 수필 등을 즐겨 썼고 인문학 쪽 관심이 많았어요. 서울대학 신문에 '마로니에'라는 칼럼이 있는데 매주 썼습니다."

대학신문이 대학 안에서만 보면 끝인 신문이 아니던 시기였다. 부조리한 사회를 향한 서슬 퍼런 목소리는 대학 신문을 통해 터져 나오곤 했다. 최고 지성이 모였다는 대학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사회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대학신문이 2만 부가 넘었어요. 일반 신문과 다름없었지요. 워낙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한일회담 반대, 3선 개헌 반대 목소리가 강했지요. 대학신문에 그런 내용을 열심히 담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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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윤근 창원보건소장./박일호 기자

권력은 젊은이들이 내는 옹골찬 목소리에 관대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 경찰 쪽 사람들이 교내에 상주했다. '남산'은 가늠하기 어려운 공포이면서 언제나 마주칠 수 있는 현실이었다.

"칼럼에 그런 글을 썼어요. 인천에서 서울 가는 버스를 탔는데 승객 한 명이 종점에 닿기 전부터 운전사에게 계속 내려달라는 거에요. 기사는 안 된다고 버티고. 그렇게 실랑이를 하면서 결국 종점까지 갔지요. 그게 원칙이었으니까요. 이 내용을 3선 개헌에 빗대서 썼어요. 정해진 원칙이나 법이 한 사람 편의로 변경돼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지요. 힘든 일을 겪기는 했는데 의대생이라서 그런지 남산까지 끌려가지는 않았어요."

유학 그리고 미국생활

의과대학 6년 과정을 마친 최윤근 소장은 군의관으로 입대한다. 3년 2개월 만에 대위로 제대한 그는 한 달 만에 미국 유학을 가게 된다. 당시에는 의사 양성을 위해 국가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던 때였다. 미국도 원조 차원에서 한국 출신 의사를 받아들여 양성했다. 적지 않은 혜택이었으나 낯선 외국 생활이 만만할 리 없었다.

"상당히 힘들었어요. 언어 문제가 컸고 의학 지식 격차도 많이 났지요. 한국에서는 실제 경험이 부족했어요. 미국 의술이 15~20년 정도 앞섰다고 보면 됩니다. 그 차이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게 힘들었지요."

최윤근 소장이 공부할 때 국내 의과는 6년제였다. 2년 예과에 4년 본과, 졸업하고 군대에 가거나 인턴, 레지던트 생활을 거치는 식이었다. 미국은 8년 과정이었다. 의사시험, 개업 자격시험, 영어시험 모두 합격하고 인턴, 레지던트까지 거쳐 전문의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 내과를 공부하던 그는 전공을 마취·통증으로 바꾼다.

"내과는 환자를 직접 마주해야 하고 언어 소통이 잘 돼야 합니다. 외국인으로서 한계가 있었지요. 반면, 마취·통증 의사는 환자와 직접 대면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또 미국은 마취·통증, 병리, 엑스레이 쪽 의사에 대한 대우도 좋았지요. 저만 열심히 하면 괜찮은 대우를 받으면서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취·통증 개념은 미국에서도 새로운 분야였다. 1970년대 후반 미국 의학계에서 중요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문제의식은 실제 환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병보다 통증이라는 데서 시작했다. 암, 교통사고, 관절염 환자는 병보다 통증에 먼저 지쳤다. 병과 싸울 힘을 통증에 소비하면서 정작 병에 버틸 내구력을 잃는다는 것이다. 통증을 먼저 잡아야 한다는 게 의학계에서 제기된 화두였다.

"중요한 것은 삶의 질입니다. 사실 통증을 다룬다는 것은 아주 원시적인 개념이에요. 환자가 호소하는 통증을 해결하려고 의학이 생긴 것이지요. 그래서 원인을 해결하면 통증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통증을 해결하지 못하면 병과 싸울 수도 없다는 고민을 시작한 것이지요."

마취과, 신경과, 정형외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의가 참여해 통증 차단 방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결국, 마취·통증 의사는 통증 해소를 위해 어떤 시술이 필요한 지 '교통정리'를 하는 역할로 발전하게 된다.

귀국, '통증클리닉'

최윤근 소장은 1994년 귀국하면서 20년 미국 생활을 정리했다.

"아내가 무척 아팠어요.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아니었지요. 미국에 큰 대학병원에서도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병원에 나가면 혼자 남는 아내가 도움을 받을 사람도 없었지요. 한의학이나 대안 의학의 도움을 받으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 귀국을 결정했습니다."

국내에 '통증클리닉'이라는 개념은 최윤근 소장과 함께 들어왔다고 보면 된다. 그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큰 대학병원도 따로 '통증'을 다루는 과가 없었다. 최 소장은 '차병원'으로 들어가 통증클리닉과를 신설한다. 이후 '통증클리닉' 개념이 대중화되기 시작한다.

최윤근 소장은 2012년 오성환 박사와 공저로 출판한 <통증 없이 살 수 있다>라는 책에서 통증을 가볍게 넘겨서도 안 되고 지나치게 두려워해서도 안 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건강한 몸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도록 몸에서 보내는 신호로 보자며 다양한 증상과 해결 방법을 제시해뒀다.

"통증을 오래 앓으면 불면증, 우울증, 식욕감퇴로 이어집니다. 이런 증상은 다시 통증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지요. 악순환이 됩니다. 통증클리닉은 그런 악순환을 끊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통증클리닉 전도사'라는 수식이 의사 경력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수식은 '외국인 노동자의 슈바이처'다. 최윤근 소장은 2002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보건소에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무료 진료소'를 세운다. 최 소장을 비롯해 전문의, 차의과학대 대학원생, 간호학과 학생 등 100여 명이 참여해 시작한 이 일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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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윤근 창원보건소장./박일호 기자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불법체류 중인 한국인 노동자가 많았어요. 주로 미국인이 꺼리는 힘든 일을 했지요. 그런데 아픈 노동자들이 병원에 잘 못 가요. 불법체류 사실을 들켜 추방당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의료비.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미국 의료비가 한국의 10배 정도 된다고 보면 됩니다. 1~2년 힘들게 벌어도 병원 한 번 가면 다 쓸 수밖에 없지요. 그런 모습이 많이 안타까웠는데 귀국하니 한국에도 사정이 같은 외국인 노동자가 많더라고요. 이들에게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출신 노동자가 많았다. 아픈 사람과 의사 사이에 언어는 큰 장벽이 되지 않았다. 몸짓, 손짓을 섞어가며 소통했고 맞는 치료를 했다. 그래도 아쉬운 점이 있어 최윤근 소장은 방송통신대 중국어과에서 공부도 했다. 그렇게 치료한 노동자가 5만여 명이다.

"몽골 출신 환자가 특히 기억납니다. 처음 찾아왔는데 한쪽 눈이 많이 튀어나와 있어 예사로운 병이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눈과 뇌 사이 혈관에 암이 있었어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병이 아니었고 큰 병원에서는 사망, 최소한 실명 위험 때문에 수술을 못 하더라고요."

결국, 찾은 곳은 서울대병원이었다. 방사선, 뇌혈관, 이비인후과, 안과 전문의가 팀을 이뤄 환자를 수술했다. 5개월 동안 치료를 거쳐 결국 암은 완치했다. 문제는 엄청난 비용이었다.

"처음에는 할인을 부탁했어요. 그런데 대학병원은 할인 같은 게 안 되더라고요. 방법을 고민했는데 서울대병원에서 치료가 아니라 드문 병을 임상 실험한 것으로 해서 비용 문제를 해결해줬습니다. 굉장한 선의를 베푼 것이지요."

처음부터 진료만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필요하면 정밀검사, 입원, 수술까지 해야 외국인 노동자에게 실제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 최윤근 소장은 시작부터 후원회를 조직했다. 지인을 중심으로 꾸린 후원회를 통해 꾸준히 모은 돈은 각종 치료와 수술에 고스란히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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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윤근 창원보건소장./박일호 기자

창원을 선택하다

최윤근 소장은 창원에 전혀 연고가 없다. 절친한 친구 한 명이 마산에 살았다는 것을 빼면 삶에서 창원과 묶이는 부분이 없다. 창원시가 개방형 공모제 방식으로 보건소장을 뽑지 않았다면 굳이 이곳을 찾을 이유도 없었다.

"여생을 의사가 없는 섬에서 보내고 싶었어요. 여러 곳에 문의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600명 이상 주민이 있는 섬은 의사가 다 있어요. 200~400명이 사는 섬에는 보건지소가 있고요. 제가 도움될 일이 별로 없겠더라고요. 그러다가 창원시 보건소장 공모를 보고 지원했지요."

공공의료기관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시민에게 그만큼 대접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전염병 방역, 건강 교육, 응급처치 교육 치료까지 시민 건강을 위해 보건소가 하는 일은 광범위합니다. 그만큼 중요하지요. 하지만, 보건소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창원보건소에 오면서 가장 먼저 강조한 게 청결과 친절입니다. 당장 실천할 수 있지요."

최윤근 소장이 오고 창원보건소 직원은 매일 아침 10분씩 친절 교육을 받고 있다. 내년에 새 청사가 완공되면 더 깨끗한 시설과 친절한 직원이 시민을 맞을 듯하다.

"창원보건소를 명품 보건소로 만들고 싶습니다. 청결한 시설에서 친절하고 실력 있는 의사에게 치료받는다는 생각이 들게끔 운영할 것입니다. 우리를 원하는 시민에게 늘 먼저 찾아가는 보건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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