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서 '복기'하듯 씨름 지도자도 자기 반성 자세 필요"

털보 감독을 안 지 꼬박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는 항상 입버릇처럼 '천하장사 한 놈 만들어야 하는데….'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팬들이 내미는 사인지에 '천하장사' 대신 '한라장사'를 적어야 했던 설움도 털어놨다.

지난해 천하장사 정경진을 배출하자 털보 감독은 더는 지도자 생활에 미련이 없다고 했다.

최근에는 그가 조만간 지도자를 은퇴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비운의 씨름꾼에서 천하장사 지도자에 오른 그의 이력은 명장으로 남기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비가 한창이던 4월의 마지막 주 서원곡 씨름장에서 창원시청 씨름부 이승삼(55) 감독을 마주했다.

한라장사만 3회, 천하장사 배출하며 아쉬움 털어내

지난해 11월 김천에서 열린 '2014 천하장사씨름대회'는 이 감독에게 평생 잊지 못할 대회다. 당시 창원시청 소속이던 정경진(28)이 우승을 확정하고 이 감독에게 천하장사 가운을 입혀줬다.

이 감독은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억제하려 애를 쓰다 끝내 굵은 눈물방울을 흘렸다. 눈물의 의미는 남달랐다. 자신이 선수 시절 그토록 열망했던 천하장사 타이틀을 20여 년 세월이 흘러, 아들뻘 되는 제자를 통해 이뤄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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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삼 창원시청 씨름 감독./박일호 기자

이 감독은 "장사가 돼 나를 번쩍 안아주는 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북받쳤던 감정이 되살아나서 많이 울었어요. 감독직을 내려놓아도 여한이 없어요. 천하장사를 배출했는데 지도자 생활에 미련이 있다면 그건 욕심이겠죠"라며 웃었다.

천하장사는 씨름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인생의 목표다. 초등학교 시절 그의 꿈은 '프로 레슬러'였다. 그는 아침에 등교하면 분필로 칠판 한편에 '프로레슬링 세계챔피언 이승삼'이라고 적고 일과를 시작할 정도로 당시 박치기로 유명한 김일에 빠져 살았다.

중학교 3학년 당시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소년 이승삼은 자신보다 작은 체구의 친구에게 매일 씨름만 하면 지는 게 싫어 무턱대고 씨름부를 찾아갔다.

샅바를 매고 일주일 만에 그 친구를 이긴 이승삼 감독은 그 작은 승리에 도취해 40년가량 단 한 번의 외도도 없이 씨름인으로 살고 있다.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 졸업반 때는 이승삼을 붙잡기 위한 대학들의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졌지만 그의 선택은 경남대였다. 70년대 대학 씨름은 거의 경남대의 독무대이다시피 했다. 실제로 1972년 열렸던 전국학생 장사씨름대회 8강에는 김성률, 이채하, 백승만, 황경수, 천평실 등 5명의 경남대 선수가 진출할 만큼 경남대 씨름부의 명성은 자자했다.

그러던 중 1983년 제1회 천하장사 대회가 열렸다. 이승삼 감독은 당시 경남대 4학년 재학 중이었고, 기량도 절정에 올라 있었다.

그는 "당시 마산에서는 내가 우승할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았다"면서 "사실 이만기는 팀의 다크호스 정도로 여겨 다들 경계하는 선수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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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삼 창원시청 씨름 감독./박일호 기자

하지만, 주인공은 바뀌었다. 이승삼은 체급장사 16강전에서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해 정작 천하장사 시합에는 출전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만기는 강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되던 이준희를 꺾고 결승에 진출하더니, 세상을 떠난 최욱진(당시 경상대 선수)마저 3-2로 누르고 초대 천하장사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만기가 마산 시내를 카퍼레이드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이승삼은 깁스에 의지한 채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씨름부 환영행사에서 축 처져 있던 내게 당시 이순복 총장님이 '빨리 끊는 냄비는 빨리 식는다'며 직접 격려까지 해줘 다시 마음을 다잡고 씨름에 집중하게 됐다"고 이 감독은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 감독은 비록 천하장사 타이틀은 획득하지 못했지만, 17대, 21대, 36대 한라장사에 오르며 1991년 3월 17일 모래판을 은퇴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의 이름 앞에는 '천하장사'라는 닉네임 대신 트레이드마크가 된 '털보'만이 남아 있다.

'무명 선수 발굴하는 안목 탁월, 영원한 씨름꾼으로 남을 것'

은퇴 후 울산에서 사업을 준비 중이던 이 감독은 모교인 경남대에 인사차 들렀다가 박재규 총장의 제안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경남대, 마산씨름단 등에서 제자들을 키우기 시작한 이 감독은 "반드시 천하장사 한 놈을 만든다"는 각오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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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삼 창원시청 씨름 감독./박일호 기자

그러던 어느 날 한 선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정경진이었다. 대학 시절 무명이었던 정경진을 영입한 그는 "이제부터 백두급으로 뛰어야 하니 몸무게를 늘려라"고 주문했다. 당시 한라급이었던 정경진은 살이 찌는 걸 극도로 싫어해 거부 의사를 나타냈지만 이 감독의 설득에 끝내 백두급으로 전향했다. 살이 오른(?) 정경진은 2013년 3개 대회 연속 백두장사에 오르는 등 눈부신 한 해를 보내고서 결국 지난해 생애 첫 천하장사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승삼 감독은 "내가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해 줄 놈은 경진이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평생의 한을 풀어줘 죽을 때까지 경진이는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정경진을 비롯해 박성기, 노명식, 이민섭 등 학창시절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선수를 발굴해 대형 스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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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천하장사씨름대축제'에서 천하장사에 오른 정경진(창원시청·오른쪽)이 이승삼 감독에게 가운을 입혀주고 있다. /대한씨름협회

이 감독은 "당장 성적보다는 미래를 보고 선수를 스카우트하기 때문에 주위에서 오해도 많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98년 프로씨름드래프트에서 1차 지명을 받았던 박성기를 고교 졸업 때 스카우트하려고 학교에 명단을 올렸더니 서류를 멀찌감치 제쳐놓았더라고요. 용마고 재학 당시 별다른 성적이 없어 학교에서도 탐탁지 않게 생각했나 봐요. 오기에 생겼죠. 한 달 만에 40㎏을 찌우라고 한 뒤 장사급에 내보냈는데 이듬해 3관왕을 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지도자의 최우선 덕목으로 바둑의 복기와 같은 자기반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결과에 승복하고 다음을 준비해야 하는 스포츠는 바둑의 '복기'와 닮아있다"면서 "이미 치른 대국을 점검하는 복기는 자기반성에서 출발하듯 지도자도 선수를 탓하기 이전에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승삼 감독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영원한 씨름인으로 남고싶다는 계획도 밝혔다.

그는 "최근 모교인 용마고 씨름부 후원회장을 새로 맡았다"면서 "창원시청 감독직도 물론 중요하지만 마산씨름이야 말로 경남 씨름의 밑거름인 만큼 기초를 튼튼히 하는 데 뭔가 보탬이 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 감독은 씨름판에서 이룰 건 다 이뤘으니 다른 분야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싶은 생각도 있다고 살짝 귀띔했다.

어떤 자리에 있든 그는 영원한 씨름인 '털보 이승삼'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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