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은 움켜쥘수록 빠져나가는 것, 나눔이 해답"

그는 변기를 부여잡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무너지면 안 된다. 포기하면 가족들은….'

그는 손등으로 입을 닦아 내고는 갑판으로 나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일을 거든다. 배를 탄 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이놈의 멀미는 나아질 기미가 없다. 속을 뒤집어 놓는 뱃멀미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더는 못하겠다'는 생각과 '그러면 가족은….' 하는 갈등 속으로 그를 몰아넣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을 다독였고, 독기를 품고 그냥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지난해 12월 2일, 41번째 경남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가입한 박택열(70) 통영 다림횟집 대표. 그가 과거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던 대목이다. 어려웠던 30대 시절, 몰락한 집안의 장남으로 가족 생계를 혼자 떠안아야 했던 그가 활어 수출선 선원으로 일했을 때의 기억이다. 그로부터 40년 세월이 흘러 그는 통영시 태평동 통영활어시장 안에서 작은 횟집을 하고 있다.

쟁쟁한 아너소사이어티 회원들 사이에 횟집 사장이 이름을 올린 것은 사실 이례적이다. 물론 선입견이지만…. 베일에 싸인 사연과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지난 7일 그를 만났다.

항일 독립유공자의 자손

박택열 대표는 1944년 통영 태평동 동피랑 아래, 강구안을 앞에 둔 443번지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박종환 선생은 소주 공장, 막걸리 공장, 어장 등을 하던 지역에서 알아주는 사업가이면서 동시에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유공자였다.

"어릴 때에는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는지 몰랐는데 크면서 알게 됐죠. 외할아버지(서상환)와 작은할아버지도 독립운동을 했어요. 그분들 모두 독립운동에 동참하고 특히 독립자금 조성, 전달 등을 하다 투옥된 자료가 확인되면서 94년인가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자랑스럽죠. 그런데 저희 대에 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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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택열 통영 다림횟집 대표./박일호 기자

그렇게 부유한 환경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는 중학생이 되면서 사업을 위해 서울에서 지내던 아버지 곁으로 가게 된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여러가지 사업을 했어요. 그래서 통영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아버지가 계시던 서울로 가서 배재중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당시에 촌놈이 서울에 유학 가는 일이 외국 유학 가는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집안 형편도 나쁘지 않았고 또 할아버지 교육열 덕에 가게 됐지만, 솔직히 자발적으로 간 것이 아니어서 공부는 시원찮았어요."

공부에 딱히 마음이 없었다는 그는 결국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문제아'가 된다.

"아버지가 혼자 사신 게 아니라 딴 집 살림을 살고 있었거든요. 저도 그 집에서 작은어머니하고 같이 살았는데…. 사춘기 시기에 작은어머니와 좀 부딪혔죠. 그러면서 방황을 했던 것 같아요. 학교 가서 공부 안 하고 만날 싸움질이나 하니 아버지가 결국 손을 드시더군요. '이놈 사람 안 된다. 여기 있으면 더 버리겠다'며 통영으로 돌려보냈어요. 3학년 때 통영고등학교로 전학 와서 여기서 졸업을 했습니다."

그나마 운동 쪽에 자질이 있고 적성에 맞았다는 그는 경희대 체육학과로 진학한다. 그리고 우연히 교수님 권유로 ROTC(학사장교)가 된 그는 졸업 후 장교로 군 복무를 하게 된다.

"당시에 ROTC면 모범생인데 나 같은 농땡이가 운이 있어 됐지요. 학교를 졸업하고는 보병 병과로 전방에서 복무하다 동아대학교 학군단 교관으로 제대를 했어요. 당시에는 훈련이 정말 빡셌어요. 부잣집에서 고생 모르고 지내다 학군단 훈련하고 군 생활 과정에서 지옥훈련을 받자니…. 어휴∼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동안 살면서 못 배웠던 것을 많이 배웠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상당히 성숙해졌죠. 보통 소위로 제대하는데 저는 장기복무를 해서 대위로 제대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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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택열 통영 다림횟집 대표./박일호 기자

몰락한 집안 되살리기

그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아버지가 사업에 잇따라 실패하면서 집안은 쇠락했다. 그는 '쫄딱 망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아버지께서 광산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업을 했는데 모두 망했어요. 그러면서 할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한 거죠. 400평가량 되는 대궐 같은 집도 다 경매로 넘어가고…. 끼니를 걱정해야 했어요. 교사 자격증이 있어서 체육선생이 되려고 했는데 할머니, 어머니, 동생 넷을 모두 제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박 대표는 하는 수 없이 일본에 활어를 수출하는 대보무역이라는 회사에 취직을 한다. 그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사무실 일이 주 업무였지만, 그는 배가 출항할 때 승선해 선원일까지 1인 2역을 자청했다. 어떻게든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74년도쯤 될 거예요. 당시 교사월급이 만 원 정도 된 것으로 기억하는 데 저는 선원일까지 하면서 5만 원 정도 받았어요. 한 200t 되는 크지 않은 목선인데 그때는 항해사고가 잦아 죽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러니 위험수당까지 포함된 것으로 보면 되죠. 경험도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취직하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도 했고 아이들도 생겨났고…."

그는 그 시간을 생지옥 같았다고 회상했다. 어느덧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장어를 싣고 36시간을 가는데 뱃멀미가 얼마나 심했으면…. 아이고…. 똥물까지 올라온다고 하잖아요. 나중에는 피까지 올라오더라고요. 얼마나 구역질을 많이 했으면…. 위나 식도에 상처를 입어 피가 나오는 것일 텐데. 그러면서도 배에서 쫓겨날까 봐 변소 갔다 와서는 또 멀쩡한 척 일을 했죠."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 6개월 하니 좀 견딜 만하더라고요. 너무 힘들어 배에서 내리면 다시는 안 탄다고 마음먹었는데 저 하나만 생각해서는 안 되니까 그렇게 한 8년을 일했어요. 친구들은 '택열이 저 자슥 한 달 넘게 일하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했는데…. 그랬더니 돈이 많이 모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서서히 일어섰죠."

그는 8년을 일해 모은 돈으로 팔렸던 본가를 되사고 양식장 사업과 멸치잡이 기선권현망 사업에 투자해 돈을 불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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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택열 통영 다림횟집 대표./박일호 기자

계속되는 시련의 파도

박 대표가 마흔 살쯤 됐을 때 그는 회사를 퇴사하고 자식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를 한다.

"돈이 조금 모이면서 회사를 그만뒀어요. 마흔 살쯤이니 82년 정도 될 거예요. 아이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 갔어요. 자식이 딸, 딸, 아들, 딸 이렇게 3녀 1남인데요. 사실 교육도 문제였지만 지금 이야기하자면 어머니와 아내의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저도 가운데서 무척 힘들었으니까 겸사겸사 서울로 가서 압구정동에 58평 아파트를 사고 거기서 생활했어요. 처음 살 때는 그렇게 엄청나게 비싸지는 않았지만 나중에는 많이 올랐죠. 허허∼. 저는 딱히 서울서는 일이 없었어요. 양식장, 멸치잡이 등 챙겨야 할 일은 통영에 있어서 왔다 갔다 했죠. 보름은 서울에 보름은 통영에 있었다고 보면 돼요. 그러면서 둘째와 셋째는 호주를 거쳐 스위스,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 대학교 공부를 시켰죠. 그런데 참 호사다마라고…."

95년쯤 되던 해. 통영에도 부동산 붐이 일면서 그는 본가 터에 주상복합아파트를 짓는 사업을 벌인다. 지하 1층 지상 6층의 큰 건물이었다.

"지하와 1층은 상가고 나머지는 다 아파튼데 큰 사업이다 보니 분양금을 받으면 회수하려고 대출을 내서 사업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분양이 잘 안 된 상황에서 건축을 담당한 회사가 어렵다고 급하게 돈을 융통해 달라고 해서 줬는데 사기였어요. 완전 거지가 됐습니다. 하는 수 없이 서울에 살던 아파트가 당시 6억 원 정도인데 그것하고 다른 사업들 다 정리해서 빚잔치를 했어요. 파산이죠. 참 욕도 많이 먹고 고발도 당하고 그랬어요. 한 19평 되는 지금의 횟집 건물과 터, 횟집 앞 공터만 조금 남았는데 그나마 다행이었죠."

사업에 실패하면서 아내와의 사이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이혼을 결정하게 된다. 그의 나이 쉰네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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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택열 통영 다림횟집 대표./박일호 기자

환갑 나이에 시작한 제2의 인생

사업에 실패하면서 그는 집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한동안 은둔생활을 이어갔다. 만약 아이들이 없었다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 말했다.

"6∼7년 정도 집 밖을 나가지 않고 완전히 외부와 단절하고 살았죠.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지금 제 머리를 보세요. 머리카락이 다 빠진 것도 그때 스트레스 때문이에요. 본처와 이혼하고 사업도 망하고 무슨 낙이 있었겠어요. 자살하려고 생각도 했는데 차마 아이들이 밟혀서 못하겠더라고요. 밥을 굶다시피 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내가 얼마나 불쌍했으면 지금의 집사람이 죽도 끓여주고, 반찬도 해서 챙겨주고, 목욕비도 주고, 차비도 주면서 좀 나다니고 사람을 만나라고 하더라고요. 지금 집사람은 예전에 우리 집에 세를 살아서 아는 사이였는데…. 그러면서 기운을 조금씩 차렸죠. 참 고마운 사람이지요. 집사람이 없었으면 내가 아직 살아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고마운 사람이에요."

재혼을 한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할 일이 많았다. 아이들 유학비와 생활비는 물론 챙길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참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은 있다고…. 그렇게 고생을 하고 또 재혼을 하고 나니 쥐구멍에도 볕이 들더라고요. 우리 집 앞이 원래 공터였는데 어느 날부터 경기가 살아나면서 하나둘 사람들이 들어와 노점을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청소비를 주기에 받고 그랬는데…. 그때 우리도 횟집을 시작했죠. 사람들은 초장집이라고 부르죠. 7∼8년 전쯤부터 이곳 활어시장이 활성화되면서 활어 노점 자리도 경쟁이 되다 보니 자릿세를 받게 되고, 우리 횟집도 잘되고 서로 윈윈하게 됐죠. 서로 오래 장사를 해야 하기에 우리 집은 10년 전 그대로 초장 값을 3000원밖에 안 받아요. 지금 잘 된다고 장삿속만 차리면 오래 못 가요. 싸게 해야 손님이 꾸준히 찾고 우리도, 활어 노점도 오랫동안 잘 되죠. 당연히 손님들도 신선한 회를 싸게 먹으니 좋고요. 아무튼 그러면서 거의 빚을 다 갚아가고 있어요."

나누면 모든 일이 더 잘 됩니다

2014년 12월 2일, 박 대표는 경남 41번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김동진 시장을 잘 아는 데 지난해 만난 자리에서 하소연을 하더라고요. '통영이 작은 시가 아닌데, 부자도 많은 도시인데 아너소사이어티 한 명이 없다'고 말이에요. 물론 저한테 직접 가입하라는 것은 아니고, 반쯤은 의사를 물어보면서 하소연한 건데…. 그래서 집사람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했더니, 아! 집사람이 곧장 하자고 선뜻 승낙을 하더라고요. 약정하고 남은 돈은 1년 뒤에 찾을 적금으로 하면 된다고 하면서요. 그렇게 하게 된 거죠. 과정은 그렇지만 사실 집사람 만나고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살게 된 데 대한 보답이죠.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지만 그래도 막바지에 와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그동안 많은 사람과 또 사회의 도움 때문이지요. 그리고 저 스스로 떳떳하고 싶은 생각도 있고요. 뭐 이 나이에 제가 정치할 것도 아니고 동장 나갈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그런 마음에서 실천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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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택열 통영 다림횟집 대표./박일호 기자

그는 기부의 또 다른 이유로 나눔문화 확산을 꼽았다.

"형편이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은데 기부를 한 이유는 횟집 하는 내가 기부를 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 문턱을 높게 보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나눔 문화가 확산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였어요. 그러니까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뭐 거창하게 세상이 더 좋아지고 뭐 이런 것보다 단지 조금이나마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에서죠. 그리고 나눔을 실천하다 보니 하는 일이 다 잘되더라고요.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믿고 있고, 또 제게는 그랬어요."

이 밖에도 그는 지난해 10월 사재 8000만 원을 들여 태국 최북부 치앙라이 거주 소수민족을 위해 빠뚱 충무교회를 세웠다. 또 교회 옆 학교에 빠뚱 충무 기숙사를 건립했다. 이 기숙사는 마을 아이 50여 명 전부가 이용할 수 있다. 그는 앞으로 5000여만 원을 더 들여 아이들이 학교로 오는 길을 포장하고, 교실이 없는 5∼6학년 아이들을 위해 내년 1월부터 교실을 지어 줄 계획이다. 또 월 20만 원으로 이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배우게 할 예정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의 아내 손옥선(67) 씨도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해 부부회원이 되는 것을 꿈꾸고 있다.

"올해 약정금을 다 내면 집사람이 또 적금을 들 생각이에요. 한 3년 정도 있으면 가능할 것 같아요."

장학재단 설립하는 것이 여생의 목표

그가 남을 돕기 시작한 것은 교회에 다니면서부터다. 하지만 그 꿈은 더욱 여물어 남은 재산을 모아 장학재단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 10년쯤 전인가? 조금 살만해지는 시기에 후배 한 놈이 시장에 출마한다고 해서 마다지 못하고 도와줬어요. 내가 어려울 때 주변의 도움을 받았고, 지인들에게 빚을 얻어 아이들 공부시켰는데 매몰차게 못 하겠더라고요. 또 이 친구에게는 통영을 맡겨도 된다는 믿음도 있었고요. 수억 원을 빌려줬는데 떨어지니 돈도 못 받고 딱 죽겠더라고요. 다시 추락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위태로운 생각에…. 그 일이 교회에 간 계기가 됐죠. 만약 그 친구가 시장이 됐다면 나는 더 망가졌을 거예요. 시장 측근이라고 권력을 행사하고 또 교만하고 거만하게 지내다 오히려 욕 듣고 망가졌을 거예요. 지금도 그 친구에게 떨어져서 고맙다고 해요. '자네가 떨어지는 바람에 나는 사람이 되고 인생을 다시 보게 됐다'고요. 허허허. 아무튼 담배, 술도 끊고 건강을 챙기는 계기가 됐고, 지나고 보니 행복은 돈이랑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는 여생의 마지막 과업으로 장학재단설립을 계획하고 있다. 대략 30억 원가량을 장학재단을 통해 사회에 환원할 생각이다.

"앞에서 나누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고 했잖아요. 집안 형편이 다시 좋아지면서 제가 친구들에게 돈을 많이 빌려줬어요. 그런데 집사람이 옆에서 보니 좀 불안했던 모양이에요. 저 모르게 모은 돈으로 땅을 좀 샀는데 그게 엄청나게 올랐어요. 베푸니까 돈이 모이고 또 사람이 모이더라고요. 그래서 그 땅하고 나머지를 정리해서 여든 살 전에 장학재단을 만들 생각입니다. 조금 늦을지는 몰라도 최소 30억 원을 생각하고 있어요.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약속도 해놓았고요. 다 주고 횟집 하나만 해도 영감 할매 둘이서 먹고살 수 있을 겁니다. 칠십 평생 살면서 교만하고 욕심내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웠어요. 재산이란 모래 같아서 움켜질수록 빠져나가 버리더라고요. 그러니 베풀어야죠. "

장학재단 설립은 장손으로서 조상에 대한 역할이자 후세를 위한 투자라고 설명했다.

"할아버지가 애국자고 재산이 많았지만 아버지와 제 세대에서 다 까먹어 집안이 망가졌으니,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저승 가서 할아버지 뵐 면목은 있어야죠. 또 동생들은 가세가 기울면서 공부를 못했고 저만 공부를 한 것에 대해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동생들도 공부할 여건이었다면 더 잘 됐을 거예요. 공부의 중요성을 잘 알지요. 그래서 돈이 없어 꿈을 펼치지 못하는 통영지역 학생을 위해 설립하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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