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문으로 곧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들 것이다

음악가 출신의 노부부, 조르주와 안느. 외출에서 돌아온 그들은 자신의 집에 도둑이 든 걸 알게 된다. 다음날 아침, 도둑이 망가뜨린 현관문을 고치기 위해 조르주는 수리공에게 전화를 건다. 그 밖엔 별다를 것 없는, 여느 날과 같은 아침 식사 중 안느는 돌연 마비증상을 겪는다. 안느는 수술을 받는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성공률이 95%에 달하는 간단한 수술. 하지만 안느는 불행히도 5%에 속한다. 결국 안느는 오른쪽 신체가 마비돼 반신불수가 된다. 다시 집에 돌아온 안느. 안느는 조르주에게 부탁을 한다. 다시는 자신을 병원에 입원시키지 말아달라고.

영화 <아무르>는 한 노부부의 모습을 통해 늙음과 죽음을 비춘다. 이 영화의 감독인 미카엘 하네케(Michael Haneke)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이 영화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을 키워준 고모가 어느 날 자살 시도를 했고 미카엘은 고모를 살렸다. 하지만 다시 눈을 뜬 고모가 처음 한 말은 "날 왜 살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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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무르'의 한 장면.

조르주가 지극히 보살피지만 안느의 상태는 차츰 나빠진다. 혼자 이동하는 것은 물론 대소변도 스스로 해결하기 힘들어진다. 언어도 조금씩 잃어간다. 그것보다 안느를 힘들게 하는 건 다른 괴로움인 듯 보인다. 이를테면 제자가 찾아와도 예전처럼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다는 괴로움, 자신의 몸을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괴로움, 사랑하는 이를 괴롭히고 있다는 괴로움, 그리고 변함없이 사랑을 받는 괴로움. 안느는 조르주에게 말한다.

"더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그런 안느를 지켜보는 조르주 또한 괴롭긴 마찬가지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사랑하는 이를 지켜봐야만 하는 괴로움. 그리고 마침내 조르주는 '어떤 결단'을 한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울었다. 몇몇 장면에선 참을 수 없는 울음이 터졌다. 거울을 보기 싫어하는 안느의 모습에서 그랬고 안느의 뺨을 때리고 마는 조르주의 모습에서 그랬고 안느가 마지막에 입을 옷을 고르는 조르주의 모습에서 그랬다. 하지만 나는 늙는다는 것, 그리고 죽는다는 것을 모른다. 올해 고작 서른인 내가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는가. 얼마나 절절하게 알아서 울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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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무르'의 한 장면.

나는 늙음이나 죽음을 모른 채 살았다. 그건 피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나의 할아버지는 오래 투병을 했다. 하지만 나는 서울에서 지낸다는 이유로, 곧 나아지실 거라는 태평한 이유로 할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시험기간이라는 이유로 빈소가 차려진 진주에 내려가지 않았다. 그리고 수 년이 지나 의식을 잃기 전 할아버지가 나를 몇 번이나 찾았다는 걸 알게 됐다. 늙음이나 죽음을 마주할 용기조차 없었던 내가 도대체 알면 얼마나 안단 말인가. 예전처럼 변화에 대응할 수 없고, 작은 병이 잘 낫지 않고,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잦은 고통이 찾아오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오고, 의식을 잃고, 죽음의 문턱을 넘는 게 어떤 일인지 내가 알면 얼마나 안단 말인가.

인간은 늙고 반드시 죽는다. 미국의 소설가 코맥 매카시는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당신에게, 내게, 우리 모두에게 그렇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죽음에 관해 쉽게 말할 수 없으니,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쉽게 말하거나 떠올리지 않으니 우리는 종종 우리 또한 늙고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죽는지가 어떻게 살았는지의 다른 얼굴이라는 것 또한 모르고 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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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무르'의 한 장면.

영화의 중반부에 조르주와 안느의 집 창문으로 비둘기 한 마리가 들어온다. 조르주는 황급히 비둘기를 내쫓는다. '어떤 결단' 후 다시 비둘기가 집 안에 들어온다. 이번에 조르주는 비둘기를 잡는다. 그리고 마치 소중한 것인 양 한참 비둘기를 끌어안고 있는다. <아무르>를 본 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창문이 열린 것 같다. 열린 문으로 곧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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