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겉으로는 화려해지겠지만 마음은 사라질 것"

기자에게 지난 겨울 유난히 부고가 많았다. 장례식장에서 양복을 입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이들을 봤을 때 저들은 어떻게 살까 궁금해졌다. 수소문 끝에 20대 젊은 여성 장례지도사와 40대 중반의 장례지도사가 한 조를 꾸려 굉장히 일을 잘 한다는 말을 들었다.

20대 아가씨와 부장님 '의리'로 뭉치다

송준표(47) 장례지도사와 하형정(26) 장례지도사는 2009년 만났다. 당시 송 씨는 동남상조에서 부장을 맡고 있었고, 하 씨는 갓 대학을 졸업한 21살! 아가씨였다.

-아니, 하형정 씨는 정말 장례지도사를 하고 싶었습니까?

하형정: "그럼요. 우연히 텔레비전 보면서 장례지도사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런 이색적인 직업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아버지도 몸이 안 좋으시고 동생도 있으니 여자로서 빨리 성공하려면 '희소성의 가치'가 높은 곳에 가야 하는데 장례지도사가 해볼 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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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형정 장례지도사./임종금 기자

-그래도 사람 시신을 만지는 건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 것 같은데.

하형정: "맨 처음 겁이 나는 게 안치실 냉장고가 겁이 나는 겁니다. 냉장고를 열고 막상 시신을 딱 보니까. 사람이 자는 것과 똑같다고 느껴졌습니다. 그 뒤로는 겁이 안 났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합니다. 이건 '체질'이다."

-송 선생님은 장례지도사 전에 다른 일을 하셨습니까?

송준표: "저는 어릴 때부터 제복 입고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경찰이 되려 했는데 잘 안 됐고. 어쩌다 환자 이송팀에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나 사고로 돌아가신 분, 태풍 매미 같은 일이 생기면 부상자나 돌아가신 분을 이송하죠. 그래서 이런 것에 면역이 돼서 그런지 시신을 봐도 크게 겁이 안 나고 그러다 이송팀에서 저를 지도해 주신 분이 동남상조 실장으로 가시게 되면서 저도 같이 갔습니다. 그때가 200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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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표 장례지도사./임종금 기자

-그럼 두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되신 겁니까?

송준표: "장례학과 학생들이 오면 실제 학교에서는 이론만 배웁니다. 의외로 장례학과엔 여학생이 더 많습니다. 물론 실전에 오면 다 도망가 버리죠. 또 여성 장례지도사가 있으면 요즘 여자 상주가 많은데 괜찮을 것 같아서 고른 끝에 하 팀장(하형정 씨)을 뽑게 된 겁니다."

-두 분이 이렇게 호흡을 맞춘 건 몇 년이 됐습니까?

송준표: "2009년 입사하자마자 계속 저와 같이 있었습니다. 하 팀장이 회식도 계속 따라다니고 의리도 있습니다. 제가 힘들 때 많이 도와주고. 그게 쉽지 않거든요."

하형정: "송 부장님이 어느 날 저에게 그러더라고요. '내 있는 모든 기술을 다 가르쳐서 니를 업계에서 확실히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해 줄게' 딱 장담을 하시는 겁니다. 저도 '좋습니다. 따르겠습니다'하고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키워준다', '믿는다' 이 단어를 2글자로 하면 '의리'라고 할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의리가 21년 나이 차, 성별의 차이를 넘어 전국에서도 보기 힘든 찰떡궁합 장례지도사로 만들었다.

기자 같은 장례지도사의 삶

-솔직히 얘기해 주십시오. 수입은 좀 됩니까?

송준표: "굴곡이 많죠. 상조회사 이런 곳은 좀 적지만 월급이라서 안정된 수입입니다. 저희는 평균 월 400~500만 원은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편차가 큽니다. 하지만 업계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으면 순수입 월 600만 원 선은 됩니다. 장례지도사가 괜찮다면 괜찮은 게, 불황이 없고 정년이 없습니다. 또 현금으로 바로 지급받습니다."

-수입은 보통 직장인보다 나은 것 같은데. 대신 어려운 점도 있겠죠?

하형정: "24시간 대기 상태죠. 언제 어디서 누가 부를지 모르니까요. 그리고 장례에 들어가면 2박 3일 동안 온 정신을 쏟아야 하니 제대로 쉬지도 못하죠. 요즘 입관실에 보면 소파가 있는데 거기가 그나마 편한 곳입니다. 예전 선배들이 집에서 장례를 치를 때는 병풍 뒤에 시신 옆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송준표: "제가 집에 처도 있고, 자녀도 있는데. 집에 못 들어갈 때가 많습니다. 먼 데서 연속으로 장례가 있어 20일 동안 집에 못 들어간 적도 있습니다. 솔직히 가정에 좀 미안하죠."

하형정: "집에 있어도 여가 생활 같은 것은 어렵습니다. 언제 호출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몸을 쉬고 체력을 회복해 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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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금 기자

-자, 그럼 지금 호출이 들어왔다고 칩시다. 두 분은 어떻게 움직이십니까?

송준표: "제가 먼저 호출을 받았다면 상담을 해야 하겠죠. 그러니까 딱 전화기 음성이 들릴 때 순간적으로 매뉴얼에 맞춰 상담을 해야 합니다. 상주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젊은 사람인지 나이 드신 분인지, 종교나 학력 같은 것도 느낌으로 가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고인이 어디 계신지 파악하고, 장례식장을 어디로 하실 건가 여쭤봅니다. 잘 모르면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곳부터 알려드립니다. 그다음 3일 장이냐 5일 장이냐, 매장이냐 화장이냐, 입관은 언제 할 거냐 정리를 합니다. 그런 다음 입관 한 시간 전까지 하 팀장에게 오라고 합니다. 만약 반대로 하 팀장이 호출을 받았다면 하 팀장이 상담을 다 하고 입관 한 시간 전까지 제가 장례식장으로 갑니다."

하형정: "손발이 잘 맞으니 마음이 편합니다. 시신에 매듭 묶는 것도 겉보기에는 그냥 묶는 것 같지만 손발이 안 맞으면 엉성하고 2~3번 손이 갑니다. 손발이 맞고 서로 문제가 생기면 커버가 가능하니까 좋습니다."

송준표: "업무보고도 중요합니다. 서로 장례가 겹칠 때가 있기 때문에 뭘 했다, 무엇이 필요하다 시시때때로 계속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고 상황을 공유하니까 안 봐도 훤하게 상황을 아는 겁니다. 주변에서 저희를 보고 부러워하는 게 바로 이런 점입니다."

24시간 대기, 언제 어디서 일이 터질지 모르고, 끊임없이 보고하고 소통하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다. 흡사 언론사 취재기자를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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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금 기자

장례문화, 진정성은 사라지고 거품만 낄 것

-두 분이 속하신 곳이 '한국장례서비스협동조합'이라는 곳인데, 여기가 뭐 하는 곳입니까?

송준표: "말 그대로 장례 관련된 분들끼리 모여서 하는 협동조합입니다. 저희같이 의전을 하시는 분, 장의용품 하시는 분, 상례복을 제작하시는 분, 꽃 재단을 만드시는 분, 장의 버스를 하시는 분 등이 있습니다. 상조회사에서 벗어나 서로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해 협동하는 것입니다."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그럼 상조회사와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송준표: "장례가 생기면 상조회사는 30~40%를 떼고 위에 언급한 분들에게 나쁘게 말하면 하청을 주는 셈입니다. 그래서 장례비용이 비쌀 수밖에 없고 한 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서로 빠르게 손발을 맞추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협동조합을 한 이후로는 위에서 떼먹는 이도 없고, 서로 수평적인 관계에서 소통하기 때문에 훨씬 의사소통도 빠르고 일 처리도 빠르죠. 또 상주들도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습니다. 상조회사가 없기 때문에 총 장례비용이 적어도 저희에게 떨어지는 건 더 많은 셈입니다."

-장례문화가 요즘 많이 바뀌었죠? 예를 들면 화장이 대세인 것 같은데 실제 그런가요?

하형정: "경남은 70%가 화장이고, 저기 서울이나 수도권은 거의 90% 이상 화장입니다."

-화장이 이렇게 급성장한 이유가 뭔가요?

하형정: "일단 국토는 좁은데 매장을 하려면 땅이 많이 듭니다. 매장을 하면 이미 불법입니다. 문중 선산에 하는 것도 불법입니다. 다 눈 감고 넘어가서 그렇지 누군가 민원을 걸면 걸리게 돼 있습니다. 2003년인가 그때부터 법이 그렇게 됐습니다. 이게 가장 큰 원인인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시신이 썩으면 병균이 나와서 빗물을 타고 내려가는 문제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송준표: "아까 불법 잠시 얘기했는데 화장해서 바다에 그냥 뿌리는 것도 불법입니다. 배를 타고 몇 킬로미터 이상 나가서 뿌려야 (법에) 저촉이 안 됩니다. 한데 누가 그걸 따르겠습니까? 탁상공론에서 나온 법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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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은 세월호 참사 경상남도 공식분향소를 경남도에서 위탁 받아 운영하기도 했다. 가운데 사람은 한국장례서비스협동조합 조효재 이사장./한국장례서비스협동조합

-예전엔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게 많았는데, 요즘 그런 게 있나요?

송준표: "거의 없죠. 2004~5년만 해도 집에서 하는 게 많았는데. 2007~8년부터 상조회사가 성장하면서 대부분 상조회사에 가입하게 되고, 상조회사는 장례식장을 권장하니까 장례식장으로 급속히 무게중심이 옮겨간 것 같습니다. 또 유족들 입장에서도 장례식장이 편하고."

하형정: "저도 집에서 치른 건 거의 없는데, 함안에서 한번 치렀습니다. 날이 더워서 드라이아이스를 깔고 시신을 모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몰라도 통영이나 거제 쪽은 집에서 하는 경우가 조금 남아 있다고 합니다."

-전반적인 방향이 아무래도 유가족들에게 편리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은데요.

하형정: "솔직히 곡을 하시는 분도 별로 없습니다. 서울에 보면 아예 밤 12시 지나면 조문객이 못 오게 장례식장 불을 꺼 버립니다. 유족들 쉬라고. 아마 지금 같은 식사 접대하는 문화도 얼마 안 가 사라질 겁니다."

송준표: "대신 이런 게 있습니다. 지금 장례문화가 전부 일본에서 넘어왔습니다. 재단에 꽃을 쌓는 것도, 검은 양복 입고 완장 차는 것도 모두 일본 문화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예상해 보면 겉으로 화려해지는 건 늘어날 겁니다. 재단이 더 화려해지고 리무진이 더 크고 화려해지고 장례지도사들 옷도 이런 양복에 검은 넥타이가 아니라 더 멋들어진 제복으로 바뀔 것이고, 납골당도 더 화려해지고 옵션이 늘어날 것입니다. 이런 형태의 겉치레를 중요시 하는 만큼 장례비용의 거품도 늘어날 겁니다. 음식 비용이나 장례식장 비용 등은 합리화되겠지만, 겉치레 비용은 되레 거품이 심해질 겁니다. 일본에 보면 재단 만드는데 수천만 원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될 겁니다."

-유족들이 고인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습니까? 개인주의가 심해졌다고 하는데.

송준표: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굉장히 고인과 유족 간 유대가 약해졌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편찮으시면 요양병원에 보내니 말년에는 완전히 떨어져 지내는 거죠. 부모가 재산이 없으면 자식이 전화 한 통 안 하기 때문에 어떻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언제 죽었는지 모르는데 이웃이 발견해서 신고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너무 많아서 뉴스거리도 안 됩니다. 그나마 부모가 돈이 있고 힘이 있으면 자식 중에 형편이 어려운 자식은 그거라도 기대려고 부모를 찾습니다."

하형정: "자식이 출세하면 부모를 안 찾는다는 게 대부분입니다. 장례문화가 일본에서 왔다고 했는데, 앞으로는 이렇게 될 겁니다. '셀프 장례'. 어르신이 돌아가시기 전에 직접 장례지도사를 불러서 미리 다 챙겨 놓는 거죠. 관이며 수의며 장지며."

송준표: "이미 전화를 해서 물어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게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닙니다. 어떤 형태건 좋은 방향으로 간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뭔가 잘못됐습니다."

-장례식장에서 가족 간 분란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어떻습니까?

송준표: "아까 문화가 변했다지만, 이건 변하지 않고 여전합니다. 예전에 지역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형제간에 싸우다가 장례식장 안에서 싸우다가 밖에 주차장까지 가서 싸우다가 형이 동생을 때려죽인 일도 있습니다. 재산이나 종교 때문에 갈등이 심합니다. 어떤 곳은 한 빈소에서 염불도 하고 기도도 하고 엉망인 곳도 있습니다. 그런 걸 장례지도사들이 잘 정리해줘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니 손님이 많니, 내 손님이 많니 이런 식으로 갈등이 빚어지면 방법이 없습니다."

씁쓸했다. 극심한 이기주의의 단면을 보는 듯했다. 인터뷰를 할수록 안 좋은 말들이 쏟아졌다. 그 말을 다 적다가는 인터뷰가 끝이 없을 듯했다.

-죄송합니다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시고 있습니까?

하형정: "…글쎄요."

송준표: "내가 죽으면 우리 하 팀장이 잘해주겠지. 나는 장례할 때처럼 이 양복 입은 채로 관에 넣어줘, 그리고 나서 화장해서 뿌리는 게 제일 안 낫겠나?"

마음의 희비가 엇갈렸다. 이 신기한 조합이 손발 척척 맞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즐거웠지만, 이들이 말하는 우리 사회는 예상보다 더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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