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 경남]경남 주요 성씨의 시조

우리나라 성씨의 시조는 대부분 신라 말에서 고려 초, 조선 시대 인물이다. 여기에다 중국에서 건너온 시조도 꽤 많다. 일본이나 베트남에서 온 이들이 시조인 성씨도 있다. 경남 지역을 본관으로 둔 성씨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대표적으로 인구가 많은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진주 강씨 시조에 대해 알아본다.

김해 김씨의 시조, 가락국 김수로왕

우리나라 성씨 중 가장 사람 수가 많은 김해 김씨는 고대 왕국 가야의 대표 국가인 가락국 김수로왕을 시조로 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가락국 건국 신화를 이렇게 전한다.

"얼마 되지 않아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붉은 줄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땅에 닿았다. 줄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 속에 금상자가 있었고, 상자를 열어 보니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면서 그 알을 향해 수없이 절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보자기에 싸서 안고 아도가의 집으로 가서 탁자 위에 두고는 모두 흩어졌다. 12일이 지난 그 이튿날 아침,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상자를 열어보니 여섯 개의 알이 어린 아이로 변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뛰어났다. 곧 평상에 앉히고 사람들이 절을 하며 축하하고 극진히 공경하였다. 아이들은 나날이 커졌는데, 십여 일이 지나자 키가 9척이나 되어 은나라의 탕왕 같았고 얼굴은 용처럼 생겨서 한나라의 고조 같았다. 여덟 가지 색깔의 눈썹은 당나라의 요임금 같았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나라의 순임금 같았다. 그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다. 처음으로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에 이름을 수로(首路)라고 하였다."

김수로왕의 무덤 수로왕릉.

당시 아홉 부장 수장들이 김수로왕을 맞으면서 부른 노래가 구지가이며 여섯 알을 맞이한 장소가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구지봉 꼭대기다. 인도에서 건너와 김수로왕의 아내가 된 허 황후(허황옥)는 김해 허씨의 시조다.

인구 수 7번째로 많은 진주 강씨 시조, 고구려 명장 강이식 장군

우리나라에서 인구수 7번째인 진주 강씨는 고구려 명장 강이식 장군을 시조로 한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강이식 장군이 군사를 이끌어 수나라를 격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 영양왕 8년(597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신하국으로 삼으려 무례한 국서를 보내오자 강이식은 '이러한 오만무례한 국서는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대답해야 한다'며 주전론을 제창했다. 이후 고구려 조정 여론이 주전론 쪽으로 가닥을 잡자 수 문제가 고구려를 본격적으로 침공했다. 이때 강이식은 고구려의 최고 사령관인 병마원수를 맡아 정병 5만을 이끌고 참전했다. 이듬해(598년) 대병력을 이끌고 요서로 나아갔다가 임유관(현 산해관의 남서 지역)으로 거짓 후퇴했다. 이에 수 문제가 30만 대군을 임유관으로 보내고, 수군도 보내 평양으로 출전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바닷길로 수나라 대군에게 군량을 공급해주려는 속임수였다. 강이식은 이를 간파하고 수군으로 바다에 나가 군량선을 격파했다. 그리고는 일부러 출병하지 않고 기다리니 수나라 군사들은 양식이 점차 떨어지고, 마침 6월 장마철이라 기아·질병으로 사기가 극도로 떨어졌다. 이를 기회로 강이식은 총 공세를 가해 수나라 군사들을 거의 섬멸했다. 강이식이 진두지휘한 임유관 전투 승리로 수 문제 정권은 몰락했고, 고구려는 요동 지방을 안전하게 확보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요약)

강이식 장군의 묘는 중국 만주 봉길현 원림역 앞에 있다. 후손들은 위패를 진주시 상봉동에 있는 봉산사에 모시고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강이식 장군 사적비와 봉산사.

밀양 박씨 시조, 신라 세운 박혁거세

사람 수가 두 번째로 많은 성씨인 밀양 박씨는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를 시조로 한다. 박혁거세의 신라 건국 신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제왕운기>에 전하는데 간략하게 다음과 같다.

"진한 땅의 여섯 마을 우두머리들이 알천 상류에 모여 군왕을 정하여 받들고자 하여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양산 기슭에 있는 나정이라는 우물가에 번개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드리워진 흰말이 엎드려 절하고 있었다. 찾아가서 그곳을 살폈더니 자줏빛 알이 있었고 말은 사람들을 보자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깨뜨리자 사내아이가 나오매, 경이롭게 여기면서 동천 샘에 목욕시키니 온몸에서 빛살을 뿜는 것이었다. 이때 새와 짐승이 더불어 춤추고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해와 달이 청명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혁거세왕이라 이름을 짓고 위호(벼슬 등급)는 거슬한이라고 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혁거세는 사실 우리나라 모든 박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박씨는 우리나라 토착 성씨로 학자들은 밝다는 뜻 우리말 '밝'을 음차해 '朴'으로 표기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 박씨 중 밀양 박씨가 70% 이상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박혁거세를 포함해 신라 초기 4대 박씨 왕과 박혁거세의 왕후 알영왕비의 무덤이 모셔진 경주 오름.

밀양 박씨의 관조(貫祖)는 박언침이다.

그는 박혁거세의 29세손으로 신라 경명왕 박승영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후에 밀성대군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밀양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현재 밀양시 내일동 아북산 기슭에 그의 위패를 모신 '밀성재'라는 사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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