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 경남]마창노동운동

이연실(50) 씨는 1980년대에 마산수출자유지역 내 한국TC전자에서 일했다. 이때 노동조합 활동을 했고, 투쟁 과정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TC전자 입사 전까지 노동조합이 뭔지도 모르던 그였다.

마산이 고향인 그는 중학교 졸업 후 한일합섬에 들어갔다.

"한일합섬은 돈 버는 건 둘째 치고 고등학교(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니까요. 작업할 때 모자도 아닌 투구 같은 걸 썼는데, 위생을 위한 게 아니었어요. 연차에 따라 줄 개수와 색깔을 달리 표기했는데요, 관리자들이 구분하기 위한 용도였던 것 같아요. 여자들은 화장실에서 졸고 그러는데, 남자들은 오전에 얼굴 보이고서는 온종일 사라졌다가 퇴근 전에 나타나고…. 섬유를 다루는 곳이니 작업환경은 말도 못하죠. 다들 학교 졸업하는 날만 기다리며 다니는 거죠."

이연실 씨는 투쟁 기록을 남기는 일에도 동참하고 있다.

그는 그렇게 5년간 일한 후 한동안 쉬었다. 그리고 1986년 가을 한국TC전자에 들어갔다. 한일합섬과 비교해 월등한 월급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작업환경만큼은 훨씬 나았다고 한다. 하지만 멸시와 비인간적 대우는 여전했다. 졸다 걸리면 질질 끌려가고, 벌로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서 있고, 남자 손이 가슴에 와 닿고…. 그런 건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마산수출자유지역 내 노조 결성 바람이 일었다.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측에서 그냥 있을 리 없었다. 부서 이동·정신 교육은 당연했고, 집으로 찾아가 부모에게 '당신 딸은 빨갱이'라며 겁을 줬다. 그래도 안 되자 폭행이 난무했다. 조합 결성을 주도한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여자가 울면 집안이 망한다'와 같은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여성노동자들은 1988년 5월 31일 노조를 결성했다. 이 씨는 발기인 23명 중 한 명이었고, 부위원장까지 맡았다.

이연실 씨를 비롯한 'TC노동조합 후속모임 여성전사'는 1980년대 노조 활동 때 겪었던 일들을 그림에 담았다. /남석형 기자

"이전에 어디서 교육을 받았다거나, 학습 모임을 했다거나, 그런 게 어딨겠어요. 집단으로 모이고 뭉치면서 제 안의 것들이 표현된 거죠."

노조가 만들어진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휴식시간이 보장되고, 월차·생리휴가도 쓸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이전보다는 사람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야' '이년아' '이놈이요'와 같은 호칭이 '~씨'로 바뀌더군요. 그리고 '님'자는 사장님·선생님한테만 붙이는 건 줄 알았던 저에게 노조 부위원장님이라고 하니 깜짝 놀랄 일이죠. 이전에는 싫어도 내색을 못 했는데, 이제는 째려보면서 의사 표현도 하게 된 거죠. 그때는 정말 노조활동을 신이 나서 했죠."

이 시대 노동운동이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닌 '인간성 회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 노조를 지키는 과정에서, 또 1988년 폐업한 회사를 되살리려는 싸움에서 많은 것을 감내해야 했다. 1년간 안동교도소에서 지냈고, 이후 '블랙리스트'에 이름 올라 취직도 못 했다.

1991년 발간된 .

"감방에 있을 때 26살이었어요. 그 나이는 제 인생에 없다는 생각을 많이도 했죠. 그 당시 후회 또한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그때 노조를 만들고 활동하면서 제 가치관은 새롭게 태어났어요. 그토록 싫던 공순이, 공장, 작업복 같은 것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거죠. 지금 생각해도 잘못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시 노조활동을 하던 이들은 'TC전자 후속 모임 여성전사'라는 걸 만들었다. 이 모임은 20년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또 다른 인생의 길에서도 여전히 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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