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 경남] 〈내 사랑 마창노련〉 글쓴이 김하경 선생에게 듣는 마창 노동운동

1989년 12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창립 모금이 진행됐다. 모두 1억 3000만 원이 모였다. 그 가운데 1억 원은 마창노련 조합원들이 낸 돈이었다. 가입 조합원 3만 7950명 가운데 마창노련 조합원이 2만 6000명이었고, 그중 75%가 넘는 2만여 명이 모금에 참여한 것이다.

이렇듯 마창지역 노동자들 가슴이 유독 뜨거웠던 이유는 뭘까. 1999년 발행된 <내 사랑 마창노련>에서 언급된 부분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마산은 개방 이후 상공업 중심지로 발전했고, 이 때문에 민족해방의식·계급의식이 일찍 자리했다. 1927년 이미 노동자 지역조직이 결성됐다. 그리고 마산수출자유지역은 전자 중심, 창원기계공단은 기계금속 중심, 이러한 업종의 단일함이 마음을 엮는데도 한몫했다는 것이다. 특히 마산수출자유지역은 사업장이 워낙 붙어 있어 한 곳에서 투쟁이 시작되면 들불처럼 번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쓴 김하경(70) 선생을 만나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내 사랑 마창노련> 글쓴이 김하경 선생. /이서후 기자

"거슬러 가면 이 지역 사람들의 저항적 기질은 오래전부터 자리하고 있었죠. 한번 끓어 오를 때 격정적인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마창지역 사람들은 텃세가 심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 마산수출과 창원공단이 들어서면서 외부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든 거예요. 이 지역 순혈주의와 외부 젊은이들의 피 끓는 마음이 함께 섞이게 된 거죠. 전태일 열사 분신 이후 들끓던 노동운동이 서울에서는 한동안 소강상태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여전히, 더 활발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1980년대로 이어진 것이지, 하루아침에 터져 나온 것이 아니죠. 1987년 6월 항쟁 때도 서울과 달리 이 지역은 노동자들이 좀 더 중심에 있었죠. 마산 육호광장·코아양과·로터리분수광장 같은 곳으로 나가 돌도 던져보고, '나는 그날 거리에 나갔다' '그럼 나도 나가보자' 그런 분위기가 노동자 사이에 전해지는 거죠. 그것이 곧 노동자 대투쟁으로 연결되었고요."

그럼에도 의문은 여전하다. 노동자 밀집지역이 이곳만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울산 같은 경우는 현대자동차 한 곳에서 주도했다면, 여기는 현대·대우·금성 등 대기업이 다 들어와 있어 균등하게 주도할 수 있었죠. 군수산업기지다 보니 경기를 안 타는 점도 있었다고 볼 수 있고요. 그리고 마산수출자유지역은 여성 노동자가 많다 보니 창원기계공단 남성 노동자들이 규찰대를 대신 서 주는 등 연대활동도 활발했죠."

김 선생은 이러한 마창지역 노동운동이 오늘날 중요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이러한 지난 이야기를 꺼내면 싫어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저는 오히려 너무 안 해서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그때 더 힘든 사람들도 싸우고 이겨냈으니, 지금 비정규직 노동자·청년 실업자들이 힘을 얻어 좀 더 자신 있게 싸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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