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 경남]1987년 12월 마창노련 첫걸음 공돌이 공순이…천대받던 이들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돌이켜보면 그때 노동운동은 경제 투쟁도, 정치 투쟁도 아닌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노동자가 사장을 앉혀 놓고 노사교섭을 한다는 거는 당시에는 생각도 못하는 거였다. 사용자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찍소리 한마디 했다간 그냥 잘리는데. 하지만 민주노조가 있어 교섭을 강제해 내고 일당을 2000~3000원씩 올리고 하면서 노동자들이 공돌이, 공순이에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일, 그게 당시 노동운동의 핵심이었다."(경남도민일보 김훤주 기자·마창노련 당시 활동가)

◇당당한 작업복

1987년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마산과 창원지역 노동자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무엇보다 어용이라 불리던 한국노총이 아닌 민주적 절차를 통해 대표를 꾸린 민주노조가 대폭 늘었다. 이들 노조는 사용자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임금 인상을 이끌어냈다. 어쩌면 사용자를 교섭 장소로 이끌어 낸 그 자체만으로도 이전과 비교해 큰 성과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성과는 공돌이, 공순이로 천대받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공장 작업복을 당당하게 입고 다니게 된 것이었다.

1989년 4월 24일 마산수출자유지역 후문에서 투석전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와 전경.

"사실 그전에야 어디 작업복 입고 다닐 수 있습니꺼. 근데 이젠 아예 작업복 입고 출퇴근하는 게 예사가 됐어예. 아가씨 만나러 다방에 갈 때도 일부러 작업복 딱 입고 갑니더. 가서 어깨 힘 딱 주고 앉으믄 사람들이 다 쳐다보거든예. 겁나는 게 없다 아입니꺼. 경찰하고도 싸우고 파업해서 임금 빵빵하게 따내는 노동자 아닙니꺼."(김하경, 1999)

하지만, 개별 노동조합 활동으로는 한계가 뚜렷했다. 사용자와 정부는 끊임없이 해고와 구속으로 민주노조를 탄압했다. 민주노조들은 더욱 새로운 방식의 노동운동이 필요했다. 마산, 창원 지역 민주노조들이 전국 최초 지역노동조합 조직인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을 만든 이유다.

◇결성

"1987년 숨 가빴던 한 해가 저물어가던 12월 14일이었다. 연말의 어수선하고 들뜬 분위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기인들이 조심스럽게 마산의 어느 중국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 굳은 악수를 하는 발기인들의 눈빛엔 감격과 흥분, 불안과 초조감이 교차하면서 흔들리고 있었다. 마산수출자유지역과 창원공단 노동자가 만나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순간이었다. (…) 떨리는 목소리로 창립 선언문이 낭독되었다. 참석자들은 이흥석 타코마노조 위원장을 마창노련 초대의장으로 선출하고 4국 11부로 구성된 조직기구를 완성하였다. 이로써 마창지역 노동자들은 해방 이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노동자 지역연대조직,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의 깃발을 이 땅에 당당하게 휘날리게 되었다." (김하경, 1999)

마창노련 결성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투쟁은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그리고 지난 1988년 6월 '노동법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조합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마창노련 이흥석 의장이 전국특위장이 되면서 마창노련은 본격적으로 전국에서 주목을 받는다. 전국특위는 같은 해 11월,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해방 후 처음으로 전국노동자대회를 연다.

1989년 5월 1일 마창지역 노동자들이 창원공단에서 '세계 노동절 100주년 기념대회'를 열려고 하자, 원천봉쇄에 나선 경찰이 거리에서 검문검색을 하고 있다.

사용자와 정권의 탄압에 맞선 마창노련의 최대 무기는 '연대'였다. 예를 들어 마산수출자유지역 마창노련 소속 여공들이 파업을 벌이면 창원공단 마창노련 남성 노동자들이 달려와 이들을 보호했다.

"1988년 7월 마산수출자유지역 내 한국TC와 한국소와에서 '구사대'와의 충돌이 있었을 때 마창노련이 지역연대투쟁을 전개하자 노동당국과 사업주들이 바짝 긴장하게 됐고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새로운 양상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정학구, 1990)

◇탄압과 발전적 해체

마창노련이 벌인 선진적인 투쟁 방식과 열성적인 노조 활동은 사용자와 정부의 대표적인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복수노조 금지조항 삭제, 제3자 개입금지 철폐' 등은 마창노련 탄압의 대표적인 무기였다. 그때까지 정부는 한국노총 이외에 어떤 노조 상급단체도 인정하지 않았다.

마창노련 관련 기록들은 특히 지난 1989년을 가장 탄압이 극심한 해로 기억하고 있다.

"경찰 집계에 따르면 현재(1990년 6월) 마창노련 의장 부의장 국장급 등 핵심간부 10여 명이 제3자 개입, 국가보안법 위반, 업무 방해 등으로 구속돼 실형을 받거나 재판 계류 중이다. 이 외에도 마창노련 소속 근로자 283명이 연행돼 17명이 구속되고 14명이 불구속 입건, 68명이 즉심, 180명이 훈방, 4명이 이첩된 것으로 집계됐다. 마창노련 측은 모두 29명이 구속돼 있고 21명이 수배 중인 것으로 자체 집계하고 있다."(정학구, 1990)

1990년 5월 1일 마창지역 노동자들이 '5·1절 전국 총파업 투쟁'에 나서기로 하자, 전경이 마산수출자유지역 후문을 봉쇄하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지도부 공백에 따른 구심력 부족도 문제였지만, 사용자 쪽과 정권은 끊임없이 개별 노조를 상대로 마창노련 탈퇴를 부추겼다. 노동자들은 노조 지도부 맡기를 꺼리고, 마창노련을 탈퇴하는 노조가 늘었다. 게다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두고 심각한 내분까지 겪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창노련은 1990년 전노협 결성과 1995년 민주노총 결성 과정에 가장 선도적인 노조로 활동했다. 그리고 결성 8주년 기념식 이틀 후인 1995년 12월 16일 마창노련은 민주노총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해산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노동운동사는 여전히 마창노련을 민주노총의 효시 또는 뿌리로 기록하고 있다.

※참고문헌

마창노련 어떻게 돼가나 1~4편(정학구 기자·1990·경남매일 기사), 내 사랑 마창노련(마창노련사 발간위원회 글쓴이 김하경, 갈무리, 1999), 마산시사 제4권 노동편 (마산시사편찬위원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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