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인생의 바람'을 맞아온 시인은 '먼 섬'을 꿈꾸고 있다

긴장완화에 좋다는 향긋한 차를 두고 마주앉았지만 기자와 시인은 좀처럼 간격을 좁히지 못했다. 완전히 다른 성질의 무언가를 각각 쥐고 마주앉은 탓인 것 같았다. 아니 시인이 아무것도 품지 않아서 일수도 있다. 난감한 질문과 난감한 답변이 오갔지만 결국은 웃었다. 2시간 반이 지나고 나니 조금 가까워진 것 같기도 했다.

김유철(56) 시인은 시와 글을 짓고 사회단체에 속해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사랑을 신앙이라 믿는 동시에 예수를 좇는 가톨릭 신자이기도 하다. 김 시인은 지역에서 꽤 알려진 사람이지만 어쩌면 알려진 것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시인의 과거부터 끄집어내서 보기 좋게 연표를 그리고 싶었지만 그 시도는 애초에 막혔다.

"과거가 현재 나를 규정시켜주지는 않아요. 오히려 걸림돌이 되죠. 노동운동했다고 하면 노동운동가처럼 보이고 학생운동했다고 하면 학생운동가처럼 보이죠."

25세 이전의 이야기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 그 시간에 대해 할 이야기는 많지만 채현국(80) 이사장 나이 정도는 되어야 말을 꺼낼 의향이 있다고 했다.

하느님이 잘못 연출했다

시인이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서울에 대한 기억은 없다고 했다. 6살부터는 가족과 부산에 터를 두고 자랐다. 시인은 군 복무를 마치고 일자리를 찾기 위해 창원으로 왔다. 삶 터가 바뀌고 혼자가 된 청년 김유철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25세, 제 발로 걸어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몇 번이나 신자가 되려 했어요. 성소(聖召). 성스러운 부르심. 저로서는 자각이었죠. 어떤 천주교회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제 나이하고 불과 몇 살 차이가 안 났던 인간 '청년 예수'에 대한 호기심이었죠."

내어주는 삶, 지향점이 분명한 삶, 사람들한테 이해받기보다는 오해로 점철된 삶. 예수가 갔던 길을 가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것만이 시대에서 벗어날 길 같기도 했다. 시인은 박정희 정권 말에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청년'으로 살아가기 힘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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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철 시인./박일호 기자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겪을 수밖에 없는, '청년'으로서 살아가기 힘들었죠. 86년도에 입회를 했고 87년도에 수도원에 들어갔죠. 죽음보다 짙은 독재를 벗어날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인은 몇 년 되지 않아 수도원 밖으로 나오게 된다. 첫사랑과 함께 끝난 그 시간을 시인은 '하느님 주연의 코미디'였다고 말했다.

"제가 수도원에 들어간 시기에 결혼을 전제로 교제했던 여자친구가 있었어요. 잘 사귀다가 제가 폭탄선언을 했죠.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수도원에 가야겠다고요. 그랬더니 그분이 자기는 수녀를 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개념은 다르지만, 천주교 안에 그런 사례가 많다고 했다. 굳이 빗대자면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처럼.

"사랑하지만 각자의 길로 가는 일들이 있어요. 저는 수도원, 그분은 수녀원에 들어갔죠. 잘 지냈고 편지는 몇 번 주고받았어요. 우리 관계는 수도원 안에서 유명했어요. 저도 당당하게 그분에 대해 얘기했고요."

안정적으로 길을 이어가던 어느 날 시인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 오랜만에 그녀와 통화를 하고 싶었다.

"몇 년 만에 통화를 했는데 그분이 '오빠 나 못 살겠다. 몸도 마음도 아프다. 나 나가야겠다'고 하는 거예요. 저는 딜레마에 빠져서 며칠을 고민하다가 원장 신부님한테 나가야겠다고 얘기했죠. 저는 지금도 제가 의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웃음) 이 길로 데려온 것은 나니까 저 사람 저렇게 두면 안 될 거 같다고 했죠. 신부님이 한 달 동안 기도를 해보고 나서 얘기하자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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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철 시인./박일호 기자

기도를 해봐도 나오는 결론은 같았다.

"제가 도의상 나가는 게 맞다고 판단했고 결국 나왔어요. 그분이 있는 수녀원이 굉장히 멀었는데 그 길로 기차를 타고 갔죠. 근데 수녀원에서 그 사람을 못 만나게 하면서 그 수녀 안 나간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총 원장 수녀를 만났더니 그럼 자기 앞에서 얘기하라고 했어요. 근데 그분이 안 나간다고 하는 거예요. 자기는 이제 괜찮다고요. 이런 젠장! 수녀원 밖으로 나와서 하늘을 보고 그랬어요. '이러시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원래 가려고 한 건 나고 쟤는 덤으로 들어갔는데 이렇게 연출을 하시면 어떡하느냐'고. 결국, 저는 여기 있고 그분은 지금 어느 수녀원의 원장 수녀예요."

그렇게 수도자의 길을 이어가지 못하게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고 했다.

"이 '바람'의 이유는, 저의 몫은, 저 아니면 수녀원 안 갔을 저 사람을 데려다 주는 거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어요. 그렇게 되려고 저에게 어떤 '바람'이 불어온 거죠."

'청년'과 <깨물지 못한 혀>

시인은 '청년'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 지금도 자신을 버티게 하는 것은 '청년 정신'이라고….

"제가 예수 앞에 꼭 붙이는 단어가 '청년'이에요. 미안한 말이지만 예수가 만약 활동을 '꼰대'처럼 했다면 저는 그 사람 안 따라갔을 거예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청년들에게 관심을 가졌고 청년운동에 모든 것을 건 시기가 있었어요."

다시 노동자가 되었고 생각했던 바를 신자로서 실천하기 시작했다. 시인 30세부터 43세까지 13년 동안의 주말에 한 번도 다른 곳에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시간은 온전히 청소년에게 쓰였다.

"제가 들어간 수도 단체가 살레시오회라고 하는 곳이에요. 유명한 이태석 신부가 제 후배죠. 그 단체의 신조가 청소년교육이에요. 살레시오회의 아이들에 대한 접근법은 세 가지예요. 기술, 그리고 운동과 교육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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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철 시인./박일호 기자

그는 잘 자라는 청소년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껄렁껄렁한 애들이 성당에 오면 어른들이 대개 싫어해요. 그 사람들은 교회를 잘못 다니고 있는 거예요. 교황의 관심사가 뭐예요? '누가 울고 있느냐'가 그분의 화두예요. 비뚤어지고 비행하고 반항하는 건 바로 울고 있는 모습이에요."

13년 동안 청소년만 보며 살던 시인은 시민운동으로 활동 방향을 돌린다. 마흔에서 초반을 넘어가던 시기였으니 '데뷔'가 늦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에서는 경남 민언련 이사로서 시민운동을 하기 전에 서울 쪽 일을 했어요. 우리 신학연구소라는 평신도에 의한 신학연구회가 있는데 교회 쇄신을 주제로 하는 연구소예요. 천주교 안에서 교회 쇄신을 외치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성직자 위주의 견고한 성이 있으므로. 거기에서 나오는 주간지에 교회 비판적인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내게 된 책이 한국 천주교회에 큰 충격타를 날린 <깨물지 못한 혀>다.

"제 첫 책인 <깨물지 못한 혀>는 한국 천주교회의 원죄라고 할 수 있는 친일문제에 관한 책이에요. 교회 친일에 관해 얘기하는 학자들이 있었지만 그걸 학문의 개념으로 얘기했고 교회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얘기를 못 했어요. 학자들은 그런 한계가 있었고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안면 받쳐서 못 했죠. 결국, 제가 펜대를 잡은 거예요. 주간지에 쓰다가 우리 신학연구소가 책으로 만들자고 해서 만든 게 <깨물지 못한 혀>예요. 한겨레 신문이 기사화할 정도로 아주 큰 충격타였어요. 그 와중에 친일인명사전이 나왔거든요. 한국 천주교회는 지금도 잘못을 시인하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친일문제는 진행 중이라고 했다. 옛날과 다를 바 없는 오늘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70년 80년 전, 아니 한일병합되던 100년 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지금 교회가 어떤지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20년 전에 박정희 앞에서 어땠는지 전두환 앞에서 교회가 어땠는지 그걸 고발하려고 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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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철 시인./박일호 기자

'사람' '사랑'이 없기에 우리는 함몰되고 있다

시인은 늘 시를 동경했다.

"시는 오래전부터 나를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였어요. 단순함, 절박함, 마치 칼에서 나오는 바람 같은. 그런 것이 나를 계속 시로 부르는 것 같아요. 열 번의 웃음소리 보다 한 번의 통곡 소리. 그게 오히려 막다른 골목에서 절실하게 나올 수 있는 표현이라는 거죠."

시인이 되기에 앞서 그는 2008년 경남 가톨릭문인협회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시 부문이 아닌 수필 부문이었다.

"머릿속에서 '난리 났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시인이고 싶었으니까요. 급하게 한국작가회의 문을 두들겼어요. 저를 시인으로서 추천해달라고요. 심사를 받았고 지인 몇 분이 제 시들을 추천해주셨고 2009년도에 경남작가회의와 한국작가회의에 시인으로 등록됐죠."

시인은 올해 1월 세 번째 시집인 <천개의 바람>을 냈다. 첫 시집인 <그림자 숨소리>에서는 일상을, 두 번째 시집 <그대였나요>에서는 사랑을, 세 번째인 <천개의 바람>에서는 신앙을 얘기했다. 그리고 시인은 '시들이 이제 스스로 집을 지을 것'이라고 했다.

"시들이 스스로 집을 지을 것이라는 게 그냥 듣기에는 막연한 이야기겠지요. 저는 시집을 매번 또 다른 창작물의 개념으로 만들었어요. 생각보다 저는 의도적인 사람이에요. 첫 시집 <그림자숨소리>의 맨 처음 시가「열다」 예요. 창원 길상사 대웅전에 앉아서 지은 건데 이번 <천개의 바람> 마지막 시가「소풍 그 다음 날」 이거든요. 그게 절간 이야기예요. 지리산 실상사에서 새벽 예불을 위해 촛불 켜놓을 걸 봤는데 눈물이 나는 거예요. '아, 내가 죽은 다음 날에도 이 촛불이 켜지겠구나'. 얼마나 거룩해요. 내가 죽었는데도 세상이 잘 돌아가는 게 슬픈 게 아니라 나 없이도 여전히 일상이 반복된다는 것은 거룩한 거예요. 첫 시집의 시작을 절간의 문을 열면서 시작했고 내가 생각하는 끝 시집의 마지막은 절간을 나서는 거예요."

시집이 나오지 않을 뿐 시인에게서 나올 시는 아직 남아있다.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이 담긴 책인 <금요일엔 돌아오렴> 북콘서트에서 시를 낭송했듯이 시로 할 말을 대신할 것이고 몸담은 단체나 매체를 통해서도 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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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철 시인./박일호 기자

<천개의 바람>에는 문학평론가가 아닌 문화평론가가 쓴 서평이 들어가 있다.

"나는 시학(詩學)을 한 번도 배우지 않은 사람이에요. 서정주 선생님은 당신의 8할이 바람이라고 했는데 저는 저를 둘러싼 문화가 키웠어요. 그런 의미에서 제 시가 문화로 읽혔으면 해요."

시인은 사람과 사랑을 구분할 수 없는 문화를 바란다.

사랑은 六何 너머에 있다

사람도 분명 六何 너머에 있다

-「육하六何 너머」중 

"저는 '사람'과 '사랑'을 구분 못 하는 사람이에요. 제가 세 시집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랑'이에요. 이 둘은 같은 거예요. '사람'과 '사랑'을 구분할 수 없는 게 우리의 문화여야 해요. '사람'과 '사랑'이 마음에 있다면 어떻게 친일을 하고 어떻게 독재를 하고 매판을 하겠어요. 이게 없어서 우리가 이렇게 함몰되고 있는 거예요. 언제까지? 어쩌면 영원히. 그걸 잡아주는 게 시인이고 예술가, 종교인, 기업인, 정치인, 언론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의 소임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시집 3권을 다 썼다고 하는 거는 3권 안에서 '사람'과 '사랑'을 다 얘기했다는 거예요. 건방지지만."

아, 세월호

얼마 전 시인의 페이스북에는 시인이 서울에서 겪은 일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제가 노란 배지가 달고 있는 걸 보고 지하철 안에서 아저씨 둘이 저한테 말을 걸었어요. 세월호 유가족이냐고요. 위자료 얼마 받았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세월호 유가족은 아니지만 '위자료 한 푼도 받지 않았고요. 위자료 받을 마음 없습니다. 아저씨 같으면 따님이 죽었는데 위자료가 얼마면 되겠습니까. 8700만 원이면 되겠습니까. 8억 7000만 원이면 되겠습니까. 80억 7000만 원이면 되겠습니까.'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시비조로 '100억이 모였다는데 그 돈이 어디 갔을까?'라고 하길래 거기서 그냥 경상도 말로 '내릴라요? 함 뜰까?'라고 했죠."

결국 돈이라는 것이 시인은 한탄스럽다.

"'인양한다' '인양하지 않는다'의 접근법이 돈이 얼마 드는지잖아요. 물론 그렇게 언론플레이를 하는 못된 언론과 정치인이 있어요. 하지만 이건 4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백 번 양보해서 이 일이 그 사람들이 말하는 교통사고라고 하면 이건 교통사고임과 동시에 살인사건이에요. 한 사람이 죽어도 사고임과 동시에 사건이 되는 거예요. 우린 왜 빠졌는지, 왜 아무도 못 건졌는지 알려고 하는 거예요. 내 자식이 죽었다는데. 배 건지는 돈이 4대 강 보다 더 들어가나요? 사드(THAAD)에 들어가는 돈 티끌만 가지고도 그 배 벌써 건졌을 거예요. 사드 배치에 대해서는 얘기하지만 돈이 얼마나 드는지는 얘기 안 하잖아요. 얘기해도 분명 줄인 거겠죠. 이 얘기하면 '종북'되는데.(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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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철 시인./박일호 기자

사회적 소임과 가장의 소임 사이

시인은 소임이 많이 따르는 사람이다. 8년 전부터 하고 있는 경남민예총 활동과 더불어 천주교 민족화해위원회에서 적지 않은 일을 맡고 있고, 그 외에도 생명평화 활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민예총 활동 중 가장 추웠던 날에 한 것이 기억에 남아요. 2012년 1월에 한 <언 강에 절하다>라는 건데 함안보에 가서 3시간 33분 동안 절 333배를 올리고 공연을 했죠. 언 강에 속죄하고 싶었어요. 지금도 정부에서는 궤변을 늘어놓죠. 강에게 무슨 짓을 했나요. 표현이 좀 그렇지만 여자를 겁탈해놓고 더 아름다워졌다고 내 덕분에 애를 가졌다고 하는 뭐 이런 말이 안 되는 거랑 같은 거예요. 흐르는 강을 불심검문하듯 보를 세우고 높이를 조절하고 대운하 하려고 강 깊이를 맞추려고 끊임없이 공사하고…."

사실 시인의 시민단체 활동만큼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시인의 알려지지 않는 저녁 이전의 삶. 한마디로 시인의 '경제활동'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시인이 밥벌이로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도 궁금증을 키운 이유였다.

"(웃음)황대권 선생님께 <천개의 바람> 뒤표지에 표사를 청했더니. '세상에 시인은 많지만 김유철처럼 자신의 이념이나 취향과 동떨어진 밥벌이를 하면서 온갖 사회운동과 자기수행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은 흔치 않다.…보라, 이 경이로운 '시인'을!' 이렇게 써주셨죠. 저는 오래도록 해오는 내 밥벌이가 있어요. 한 회사를 20년 넘도록 다녔는데 어떻게 보면 식구들 굶길 거 같아서 회사를 나올 용기가 없었어요. 또 일상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내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요. 사람들한텐 군자금 벌러 나간다고 말하고요.(웃음) 아마 내 밥벌이 터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일 텐데…. 아무튼 회사에 다니니까 민예총 활동도 하고 20개 넘는 단체를 후원하고 집에 월급도 갖다 주고 두 딸 학자금도 쓰고 술값으로도 쓰죠. 회사 사람들도 제가 뭐 하는 사람인지 몰라요. 어렴풋이 사회단체 일을 한다는 정도로 알고요. 20년 동안 퇴근 후에 회사에 관련된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6시까지는 회사 일을 하고 6시 이후에는 맡겨진 사회적 소임을 하죠. 가끔 사람들이 제가 한량처럼 보이는지 제가 회사에 다닌다고 하면 두 번 놀라요. 첫째는 '회사에 다녀요?'라고 놀라고 두 번째로는 사장이 아니라 직원이라고 말하면 '그럼 그 성격을 누가 견뎌요?'라고 놀라요. 아니 내 성격이 어때서.(웃음)"

그것 또한 달게 맞아야 할 바람

시인은 유서를 남긴 적이 있다. 늘 자신 곁을 담담히 지킨 아내와 남겨진 사람들에게. 뇌동맥류 때문이었다. 수술에 한 번 실패하고 서울로 올라가 다시 수술을 받았었다.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질환에다가 뇌동맥류 모양이 특이한 경우였다.

"수술대에 누웠는데 마취과 의사가 '마취 들어갑니다'라고 했던 대목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이 감겼어요.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 '죽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팠던 시간은 시인을 바꾼 여러 순간 중 하나였다. 그런 '바람'이었다고 했다. '바람'은 시인을 종종 찾아왔다. 시인은 작년 겨울부터 호를 '나무'로 쓰기 시작했다. '나무처럼 서 있기, 나무처럼 기다리기, 그냥 나무처럼'의 줄임말이라고 했다.

"호를 바꿀 때 제가 굉장히 외로웠고 우울증과 불면증에 힘들기도 했어요. 아마 <천개의 바람>에서 얘기하는 어떤 '바람'이었을 거예요. 그런 때에 지리산에 가서 나무의 모습을 보는데 나무처럼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무는 한자로 '남무'라고 써요. 남녘 '남(南)'자에 없을 '무(無)'자. 불가에서 '나무아미타불' 할 때의 그 나무가 한문으로는 '남무'예요.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불에게 의지합니다'라는 뜻이에요. 복합적인 뜻이죠. 나무는 홀로 서 있지만 하늘이라는 공간 하늘에서 내리는 비, 햇빛, 달빛, 흙 때문에 서 있어요. 결국에는 의지하고 있는 거잖아요."

좋은 의사를 만났고 그 시기를 잘 넘겼다고 했다.

"아픈 시기가 <천개의 바람>를 낳아줬는지 몰라요. 그 시간을 통해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을 조금 더 절감할 수 있었고요. 저는 세월호 사람들의 아픔을 '망연자실'이라고 표현해요. 잃어버릴 '실(失)'. 있던 존재가 없어지는 위치이동을 해버리는, 조금 전에 전화했던 아이가 별이 됐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망연자실'. 그런 아픔들을 공감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바람'이 불어오면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지만 그 바람이 자신을 바꾸더라는 것이 50년이 넘도록 살고 나니 느껴진다고 했다.

"그게 어떤 '바람'인지 나는 몰라요. 나쁘게 바뀔지 좋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바뀌어요. 그게 '바람'이 하는 일이에요. 그게 제가 말하려고 했던 '천개의 바람'이에요."

감자, 취나물 비빔밥, 보드카 파는 카페지기를 꿈꾼다

해뜰녘에는 감자를 심고

상추와 치커리

열무와 애호박

참깨와 고구마

오이와 시금치

고추와 완두콩

해질녘이 오면 참취와 머위를 밭 서쪽 어깨에 심고

-「조계산에 깃들여 사는 스님은 봄부터 가을까지 수굿이 밭을 일군다」중

시인은 언젠가는 떠나고 싶어 했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 먼 섬에 가서 술집 같은 카페를 하고 싶어요. 카페 이름은 'Knocking On Heaven's Door'라고 할 거예요. 제주도에 구체적으로 준비했었는데 제주도가 너무 복잡해졌어요. 그래서 준비를 하다가 놨어요. 더 조용한 데로 갈 거예요. 가능하면 전라도 쪽으로요. 아직도 전라도 욕을 하는 경상도 친구들을 위해 나는 '적진 깊숙한 곳으로 간다. 나 전라도 사람이다'라고 얘기하려고요.(웃음) 내 마음대로 혼자 오는 사람들 위주로 받을 거예요. 둘이 와도 따로 앉아야 해요. 여행은 혼자 해야 하는 거니까요. 감자와 취나물 비빔밥과 보드카만 팔 거예요."

모두 놓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가능할지는 해봐야 알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요. 사람에게서는 결국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게 나와요. 어떤 일이 있으면 마음속에 먼저 염원할 것, 믿어볼 것, 기도해 볼 것. 지금이 아무리 소중해도 떠날 때는 그냥 떠나는 거죠. 떠나는 게 우리의 생인데.(웃음)"

먼 섬을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맞춘 시인은 그 전에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말했다.

"올해부터 '김유철의 토크콘서트'를 하고 싶어요. 문화적인 이슈든 정치적인 이슈든 피하지 않고 지역의 이슈를 가지고 토크쇼를 할 거예요. 그리고 그걸 문화상품화 할 거예요. 입장료를 받으면서요. 10월 둘째 주나 셋째 주로 생각하고 있는데 게스트나 구성을 어떻게 할지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시인의 감정으로, 게스트들은 그 사람들의 감정으로. 우리가 할 얘기 여기가 아니면 못 한다는 생각으로 당당하게요."

김유철 시인은 한참 시간이 더 지난 뒤에 25세 이전의 시간에 관해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 기사를 다 적고 나니 굳이 듣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지나간 '바람'은 묻고 훗날 먼 섬 어딘가에 있을 그의 카페에 가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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