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길은 내 스스로 만들어 간다"

그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지난해 '페이스북 경남도민일보 독자모임'을 통해서다. 처음에는 '창원시 마산회원구 합성동 재개발' 관련 내용을 집중적으로 올렸다. 좀 지나서는 도내 각종 사안, 그리고 경남도민일보 관련 기사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들을 쏟아냈다. 그를 실제로 처음 본 건 지난해 말 '경남도민일보 독자와 기자의 만남'을 통해서다. 페이스북에서 'Joseph(세례명 요셉) Lee'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그의 이름은 이인환(43·함안군 법수면)이다.

직접 마주하게 된 재개발 문제

'창원 합성동 재개발'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온 그였기에, 현 거주지도 그곳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인환 씨가 지내는 곳은 함안군 법수면 둑방길 바로 옆이었다.

그는 지난 2013년 서울 생활을 접고 창원 합성동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년 전부터는 자신이 태어난 지금의 함안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부모님과 함께다. 창원 합성동 집에는 여동생이 여전히 살고 있다.

"서울에 있을 때 재개발 관련 다큐 일을 좀 했습니다. 공교롭게 창원 합성동 집으로 돌아와서 직접 마주하게 된 것이죠.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재개발 반대 주민들 방향 자체가 불순한 쪽으로 흘러간다는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보금자리 지킨다는 명분 아래 돈을 챙기려는 그런 분위기 말이죠. 결과적으로 상황에 떠밀려 나서게 된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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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환 씨./남석형 기자

그는 여동생과 함께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주민들과 이야기 나누며 할 수 있는 방법을 전했다. 그리고 이 지역 문제로만 접근하지 않았다. 재개발은 사회적 틀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에 전국 연대도 계획했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함안군에서 오랫동안 공무원 생활을 하다 퇴직했다. 그러한 아버지는 아들이 창원 합성동 집에 오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함안 집에서 생활하게 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인데, 그는 '유배'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그도 좀 지쳐있는 듯했다.

"가족에 대한 서운함을 떠나 이제는 저 스스로 마음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실상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지도 않고요. 이제는 그냥 가족들 마음 다독이면서 흘러가는 대로 가려고 합니다."

고3 때 선생님과 '맞짱'

이인환 씨는 고향 함안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다. 공부를 곧잘 했기에 집에서도 기대가 컸다. 그림을 좋아했지만 어머니가 못하게 극구 말리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에는 마산으로 전학을 갔다. 그는 건강한 편이 아니었다. 위가 좋지 않고 천식도 있었다. 전학 후 얼마 되지 않아 교실에 구토를 했다. 그런데 함안 아이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빨리 일어나서 치워라'는 매정한 말만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때 큰 충격을 받았고, 공부에도 흥미를 잃었다. 그래도 학교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친구들과의 관계는 원만했다. 중3 때는 담임 선생님 관심에 마음을 추슬러 공부에 전념했다. 그러면서 마산중앙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만의 세계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고 말한다.

"고교 첫 시험에서 반 10등 안에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기대가 컸죠. 반대로 저는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내가 어떤 것에 흥미 있는 지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목판·판화를 좋아해 미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어른들에게 내색하지는 못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책을 좋아했고, 제2 외국어로 배운 불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 때문에 번역문학을 많이 읽었죠.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는 늘 글을 썼고요."

고등학교 2학년 들어 진로 고민은 더 깊어졌다. 그는 느닷없이 헌법학·민법학 책을 사서 법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서는 '법 공부를 하면 사법시험이든 공무원시험이든 도움되니까 나는 수업 시간에 따로 법 공부를 하게 해달라'고 했다.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평범하지 않았던 그는 학내 불합리한 문제에 대해서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큰 사달이 났다.

"담임 선생님이 시험 감독관으로 들어와서는 답 힌트를 주는 겁니다. 이건 아니다 싶어 선생님께 편지를 썼죠. 그때부터 매일 매타작이 시작되더군요. 맞는 것도 한계가 있잖아요. 다시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우리 학교에 있다는 것은 수치'라는 내용과 함께 자퇴서를 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데도 주먹질을 하려고 하더군요.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도 제 뜻을 말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저 스스로 신경정신과를 찾았습니다. 의사가 스트레스 때문에 쉬는 게 낫겠다고 하더군요."

이후 학교에 안 나갔지만 3학년 2학기 때 자퇴서를 냈기에 졸업은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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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이클도 좋아한다. 건강이 좋을 때는 자전거를 타고 곳곳을 누비기도 했다./이인환 씨 제공

좌절된 유학, 가족에 대한 상처

스무 살. 그는 여전히 자신의 앞길을 놓고 방황해야만 했다. 이제 그는 해외 유학에 눈 돌렸다.

"프랑스 유학을 준비했습니다. 실제로 파리 4대학 철학신학부에서 연락까지 왔습니다. 2~3주간 현지에 체류했는데, 한번 부딪혀 보자고 결심했죠. 그런데 병역 미필이라 연대보증이 필요했습니다. 비행깃값도 없었고요. 아버지께 말씀드리니 코웃음을 치시며 과대망상으로 받아들이시더군요. 절대 안된다며 공무원시험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관련 서류를 모두 불태워야 했다. 한동안 허무한 시간을 보내고 군대에 갔다. 군 방위생활을 하면서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서 치열히 살아가는 주변 사람을 보게 됐다. 좀 철이 든 것이다. 제대 후 아버지 뜻대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서울 신림동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병이 찾아왔다.

"그때는 몰랐는데 공황장애였어요. 세상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나만 불안하고 견딜 수가 없는 거죠. 공부를 접고 다시 마산으로 와서는 병원을 찾았습니다. 그쪽에서는 약물치료를 하자고 했는데, 저 스스로 무서워서 입원해 달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외삼촌이 하는 신문보급소 일을 도우러 서울로 갔다. 20대 중반인 그때부터 15년 넘게 서울생활을 했다. 도서관 DB정보화 작업, 컴퓨터교실 방문교사, 문화공연 스태프, 활동보조인 등 다양한 일을 했다. 그런데 떨어져 있는 시간 속에서 가족에 대한 마음의 벽은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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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생활하던 30대 시절 모습./이인환 씨 제공

"사회가 흔히 말하는 반듯한 직장 개념에서 저는 신통치 않은 사람이었죠. 그 때문에 부모님은 저를 신뢰하지 않았고요. 저 역시 명절 때에도 집에 잘 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지금도 함께 살고는 있지만 그렇습니다. 서운함도 애틋함도 믿음도 없는 마음입니다. 다만, 연로하신 부모님께 내가 할 수 있는 도리는 해야 하지 않겠냐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래도 집이 아닌 곳에서는 마음 나눌 사람을 많이 만났다. 서울생활 때 성당에서 알게 된 이들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성당 신부님의 죽음 소식에 그는 다시 휘청했다.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신부님이 2013년 12월 갑작스레 돌아가셨습니다. 유리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어지럼증이 몰려왔습니다. 어느 날은 쓰러졌습니다. 의식은 있는데 위아래 구분이 안 되더군요. 이후로 하루가 너무 길고 괴로웠습니다. 그렇게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 병원을 찾았습니다. 상실감으로 인한 일종의 불안장애라고 하더군요. 사실상 병이 재발한 거지요."

힘든 시간이었다. 몸까지 피폐해졌다. 한동안 숟가락 들 힘조차 없었다. 지금은 한창 건강할 때까지는 아니더라도, 몸이 많이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올해 에세이집 출간 목표

가족에 대한 상처, 그리고 마음의 병…. 사실 털어놓기 쉽지 않은 이야기다. 그럼에도 이인환 씨는 아주 편한 표정으로 들려주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주변에 굳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나를 숨기지 말고 오픈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이 아주 편해졌습니다. 요즘은 페이스북 친구들이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면 '강박장애'라고 말합니다. 합리적·논리적이지 않으면 혼란에 빠지는 사람이라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그는 페이스북에서 도내 여러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쏟아낸다. 때로는 표현이 거칠다 싶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고개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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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환 씨는 1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집 창고를 개조해 사무실로 이용한다./남석형 기자

"제가 쓴 글 중에 천박하거나 지독한 표현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른 분들은 다르게 생각들 하시겠지요. 그러나 사람은 다 다르고, 자신의 지적 능력에 맞는 글로 표현하면 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자신이 원하는 조절된 표현을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사상을 노예화하는 것 아닐까요?"

그는 결혼은 하지 않았다. 안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굳이 할 마음까지는 없다고 한다. 책 읽고, 글 쓰는 지금 생활이 나쁘지 않다.

"어릴 때부터 그냥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썼습니다. 사람이 생각하다 보면 그것이 체계화되어 이념화되고, 또 사상화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구나 예술가이고 시인이고 문학가인 거죠. 단지 직업적이냐 아니냐 차이일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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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환 씨는 1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집 창고를 개조해 사무실로 이용한다./남석형 기자

이러한 시간 속에서 '언젠가는 내 책을 스스로 출판하는 그 날'이 올 것이라 믿었고, 지금 그것을 현실화하고 있다. 지난 3월 '도서출판 자유새'라는 1인 출판사를 만들었다. 사무실은 함안 집 창고를 고쳐 쓰고 있다. 글쓰기부터 판매까지 모든 출판과정을 혼자 할 계획이다. 올해 에세이집을 출간하는 것이 우선 목표다. 소설·시집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1000부를 인쇄해 우선은 절반을 판매하는 것이 목표다.

그는 앞으로 시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지역에서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하려는 일에 대해 도움 주시려는 분도 많아 큰 위로가 됐고요. 저는 사람이 재산이라 생각합니다. 통하는 분들 만나서 이야기 나누며 마음의 부자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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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환 씨./남석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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