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나라 창건 후 주요지역을 순방하던 중 절강성(浙江省) 주장(周莊)에 들렀다. 이곳에서 거부 심만삼(沈万三)을 만나 함께 식사를 했다. 서슬퍼런 새 황제를 대접하게 된 심만삼은 궁리 끝에 맛있는 돼지족발 요리를 올렸다. 황제가 흡족해 하며 음식이름을 묻자 기지를 발휘해 만삼이네 발요리, 즉 만삼제(万三蹄)라고 한다. 원래 돼지족발은 이름 그대로하면 저제(猪蹄)다. 하지만 황제 성인 주(朱)와 돼지 저(猪)는 동음으로 읽힌다. 곧이 곧대로 말했다간 불경을 저지를 판이니, 자신의 이름을 붙여 만삼제라고 한 것이다. 어쨌든 이때부터 중국 족발요리는 만삼제로 불린다.

재미있는 이 일화로 유명한 심만삼(1330~1379)은 중국 민간인들이 지금도 떠받드는 재신(財神)이다. 전설과 허구가 너무 많이 스며들어 정확한 족적을 파악하긴 어렵지만 그 집안이 원말 명초 시절 절강지방에서 큰 부를 소유, 부자들의 대명사로 불렸다는 건 확실시된다.

전설에 따르면 심만삼은 청개구리를 방생했다가 취보분(聚寶盆)이란 그릇을 얻었다고 한다. 아내가 우연히 이 그릇에 동전 한 닢을 넣었더니 갑자기 그릇 전체에 동전이 가득차는 바람에 부자가 됐다는 이야기다. 후대에 이르러 심만삼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가 개간으로 농사규모를 늘려 부자가 됐다거나, 큰 부자집 재산관리인으로 시작했다거나, 강남에서 무역을 통해 돈을 벌었다는 설(說)들을 내놓고 있으나, 정확하게 어떤 경로로 부를 쌓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정사인 명사(明史)에는 남경성을 축조할 때 그가 자기 돈을 들여 일부구간 공사를 맡은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심만삼은 분수에 넘치는(?) 발언을 하고 만다. 황제에게 공사를 맡은 병사와 백성들을 자신이 위무하도록 허락해달라고 한 것이다.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발끈했다. "장사치인 제깐 놈이 감히 황제를 대신해 위로잔치를 하겠다니, 그냥 둘 수 없다"며 죽이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황후 마씨가 극구 만류해 목숨만은 건졌지만, 심만삼은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운남으로 유배당해 거기서 죽고 만다. 정사 기록이긴 하지만 학자들은 이 기록 자체가 심만삼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시 강절(江浙 강소성과 절강성) 지방에 거주하던 갑부 전체를 통틀어 일컫는 이야기라고 한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새 왕조를 창건한 주원장이 볼 때 당시 강절지방 부자들은 좋은 먹이감이었다. 왕조초기에 필요한 각종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새 재원이 필요한데, 전란이 마감된지 얼마되지 않아 현실적으로 백성들에게 세금을 매기기란 어려웠다. 황제는 그래서 부자들을 정조준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황제는 자신이 외적(원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힘들게 중화국가를 완성하는 동안 부자들은 앉아서 돈만 벌었다며 종종 혐오감을 드러내곤 했다. 게다가 황제는 어렵게 자란 탓에 태생적으로 부자들을 싫어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기록에 따르면 '홍무제(주원장) 중후반기에 이르러 삼오(三吳 강남지방)의 대호거성(大戶巨姓 부자와 유력자) 중에 혹은 죽고 혹은 이주당하여 남은 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전설도 전해진다. 명나라 초기 강남에 심만이와 심만삼이란 이가 살았는데, 서울(南京)에 갔다 온 사람으로부터 황제가 썼다는 시(詩)를 전해 듣는다. 그 내용은 이렇다.

"백관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건만 / 짐이 먼저 일어나고 / 백관은 이미 잠들었건만 / 짐은 아직 자지 못하네 / 아 짐은 저 강남의 부가옹(富家翁 부자집 주인)보다 못해 /해가 중천에 솟도록 이불 뒤집어쓰고 있네!"

심만이는 이 글에서 피냄새를 읽고 재산을 팔아 도주하지만, 심만삼은 남아 있다가 변을 당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절강성 주장에 가면 심만삼 이야기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돈이 권력을 포획한 지금과 달리 그때 그 시절, 부는 권력이란 바람앞에 선 등불이었다. <川邊小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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