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이상하게도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얼마 전 엄마와 말다툼을 했다. 선 때문이었다. 몇 년째 내가 연애를 않고 있으니, 게다가 내 주변에 남자라곤 보이지 않으니 엄마로선 걱정이 컸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덜컥 결혼정보업체에 등록했을 줄이야!

"주말에 노느니 뭐 하겠니"라는 엄마의 말에 떠밀려 거의 매주 선을 봤다.

근데 이게 보통 스트레스가 아닌 거다. 시간, 돈 이런 건 둘째고 처음 만난 사람과 밥 먹고 차 마시고 이야기 나누는 게 낯가림이 심한 나로선 가장 힘들었다.

선이라는 게 이미 상대방의 가족관계, 학력, 직업 같은 대부분 정보를 알고 나가기 때문에 대화거리는 쥐어짜내야 했다.

내가 물었다. "주말엔 뭐하세요?" 상대가 답한다. "그냥 자요. 친구들 만나서 술 마시고…." "취미는 뭐예요?" "취미요? 그냥 일이 많으니까…. 휴일엔 쉬고 싶고…."

두어 시간 남짓을 때우고 상대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애프터 신청은 없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 나의 미지근한 태도가 계속되자 엄마가 그랬다. "남잔 밥벌이만 실하면 돼." 그 말에 발끈했다. "엄만 내가 굶어 죽을까봐 걱정하는 거야? 내가 내 앞가림 하나 못 할까봐? 비웃어도 상관없는데 난 지금 평생 사랑할 사람을 찾고 있는 거라고. 재테크 수단이 아니라." 그랬더니 엄마가 진짜 비웃으며 말했다. "사랑? 태평한 소리하네. 살아봐라. 사랑 그게 밥 먹여주는지. 나중에 그때 엄마 말 들었어야 하는데 할 거다."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Laurence Anyways)>는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자비에 돌란(Xavier Dolan)의 2012년 작품이다.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 27살이 된 돌란은 요즘 전 세계 영화계가 가장 주목하는 신예감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그는 연출뿐 아니라 각본, 의상, 편집까지 직접 맡으며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펼쳤다. (1초 정도 되는 장면이긴 하지만 직접 출연도 했다!) 가끔 재능을 펼치는 정도가 지나치다 싶은 장면이 있는데 이는 젊음의 패기가 조금 비끗했다고 이해해주시길. (그런 의미에서 회화적인 미장센을 좋아하는 이가 있다면 이 영화는 무조건 추천하고 싶다.)

자, 이제 영화 내용을 보도록 하자. 소설을 쓰는 청년 로렌스와 그의 연인인 프레드는 미래를 약속한 사이다. 35번째 생일을 맞아 로렌스는 프레드에게 고백한다, 자신이 남자의 몸에 갇힌 여자임을. 그리고 앞으로 그 여자로 살겠다고 말한다.

당혹스러움에 프레드는 잠시 머뭇하지만 이내 그럼에도 그를 사랑하는 자신을 깨닫고 그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니, 받아들이도록 노력한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로렌스는 강의를 나가던 대학에서 잘리고, 여장을 했다고 시비를 거는 행인과 다투기도 한다. 한편 프레드는 자신이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로렌스에게 알리지 않고 중절수술을 한다.

이후 프레드의 신경쇠약은 점점 심해진다. 무엇보다 이들을 힘들게 하는 건 사람들의 시선이다. 식당에서 웨이트리스가 여장을 한 로렌스에게 묻는다. "아무리 봐도 정말 특이하세요, 재미로 그러는 거예요?"

로렌스를 아슬아슬하게 감당하고 있던 프레드는 그 순간 참지 못한다. "남편을 위해 가발을 사본 적 있어? 남편이 길을 걷다가 얻어터질까, 그래서 만신창이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해본 적 있어? 내 입장 생각해봤어? 나처럼 살아봤어? 그러니 쓸데없이 참견하지마. 그럴 자격 없으니까. 우리한테 질문하지 마."

이후 프레드는 자신이 더는 로렌스를 감당할 자신이 없음을 깨닫고 이별을 결심한다. 이 영화에서 로렌스와 프레드는 두 번 이별하는데 여기까지가 이들의 첫 이별의 과정이다.

영화를 볼 때 등장인물 누군가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데 나는 특히 프레드에게 그랬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로렌스처럼 그 자신으로 살겠다고 하면 나는 어떡하나. 나도 한동안은 나를 만류하는 이에게 사람의 삶의 방식이 얼마나 다양한데 그렇게 보수적으로 생각하느냐고, 나를 말리지 말라고 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여장을 한 그에게 예쁘다고 말해주고, 세상에 나설 것을 격려할 것이다. 점점 나를 파고드는 상처는 숨긴 채. 그가 그로 사는 만큼 나는 내가 아닌 게 되니까.

이 영화는 나에게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사랑 지상주의자인 척 구는 나에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걸 감당할 수 있느냐는 질문. 너를, 너의 인생을 포기할 만큼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질문. 그 질문에 솔직히 대답하자면 난 자신 없다. 있는 그대로 나는 사랑해주길 바라면서 있는 그대로 상대를 사랑할 자신은 없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사랑 어쩌고저쩌고, 쉽게 말하고 다닌 내 코를 묵사발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주 이상하게도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나를 거세게 흔드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 인생을 포기할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를 바뀌게 해줬으면 좋겠다.

수년이 지나 다시 프레드를 만난 로렌스가 그녀에게 하는 말로 끝을 맺으려 한다.

"나처럼 살아. 네 인생을 즐기고, 사랑도 실컷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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