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 경남-경남에서 만나는 이순신]

고개를 숙인 순신은 한동안 움직임이 없다. 그가 곰곰이 바라보는 건, 조그만 시비다.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검은 대리석에 고요하게 새겨져 있는 이 시에는 '사마천'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문득 왁자한 소리에 순신이 고개를 든다. 단체 관람객들이 박경리 선생 묘소를 향해 우르르 몰려가고 있다.

순신이 박경리기념관을 찾은 건 조금은 충동적인 일이다. 얼마 전 마산지방해양항만청 소속 통영해양수산사무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한동안은 업무 파악을 하느라 바깥 구경을 못했다. 오늘 출근길에 우연히 도롯가에서 박경리기념관 안내판을 보고 문득 한 번 가봐야지 싶었다. 점심을 먹고 조용히 나선 길이다. 평일이지만 단체 관람객이 와 있었다. 그들을 피해 기념관 뒤뜰로 나섰다가 사마천 시비를 만난 거였다.

순신은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가만히 박경리 선생 묘소로 향한다. 겨울이지만 얼굴에 닿은 햇볕이 제법 따뜻하다.

순신은 계단을 오르며 방안에 우뚝하니 앉아 있는 사마천을 생각한다. 그가 마주했을 그 고독을 상상해 본다. 외로운 사람, 이라고 가만히 속삭여 본다. 사마천의 얼굴은 먼 추억처럼 흐릿하다. 그래서 순신은 사마천처럼 우뚝하고 외롭게 앉아 있는 자신을 그려본다. 어딘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묘소가 있는 공원에 이르니 햇살이 더욱 풍성하다. 박경리 공원이라고 적혀 있다. 묘소로 가는 길은 지그재그로 오르막이다. 입구 근처 급수대에 또 다른 시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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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박경리 선생이 쓴 '산다는 것'이란 시다. 급수대 옆에 서서 스마트폰으로 전문을 검색해 읽는다.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나는/ 혈압약을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쪽은/ 치유가 안 된다는 황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아서/ 곧잘 비틀거린다/ 하지만 억울한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니 당연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팔십이 가까워지고'란 부분에서 순신은 어머니를 떠올린다.

"무슨 일을 하든, 바른 정신으로만 하면 된다, 순신아, 바른 정신으로 살아!"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한 대학, 어깨를 다쳐 운동을 그만두고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을 때, 공무원 시험을 권한 건 어머니였다. 어릴 적 '머리도 좋은 녀석이 만날 운동만 하고 다닌다'고 나무라던 어머니였다. 때늦은 공부는 쉽지 않았다. 이십대 후반에 시작해 서른을 넘겨서야 겨우 합격할 수 있었다. 해양수산부로 발령이 났다. 당시는 해양수산부가 발족한 초기라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순신의 일 처리는 항상 야무지고 잘 정돈됐다. 복잡한 일도 순신의 손을 거치면 말끔해졌다. 승진에 눈먼 상사들은 그의 이런 성과를 아무렇지 않게 가로챘다. 순신은 상부에 이런 사실을 보고했다. 순진한 판단이었다. 상사와 상부는 돈독하게 연결돼 있었다. 상부는 순신을 지방해양항만청으로 발령냈다. 동해로, 울산으로, 여수로, 목포로, 마산으로 순신이 본청으로 돌아올 때마다 상부는 그를 다시 지역으로 돌려보냈다. 궁형 같은 세월이었다. 지방항만청 직원들도 상부에서 버림받은 그를 은근히 피하는 눈치였다. 말없이 품어주는 바다만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바른 정신으로 살아!" 바다를 보며 그는 어머니의 당부를 되새기곤 했다. 그리고 묵묵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순신의 일 처리는 여전히 야무지고 잘 정돈됐다.

어머니의 부음을 접한 것은 세월호 참사가 터진 직후였다. 목포지방해양항만청에 근무하던 순신은 바로 진도 팽목항으로 투입됐다. 팽목항에서 공무원이란 이름은 죄인이란 말과 동의어였다. 슬픔과 분노가 짙은 안개처럼 팽목항을 감싼 날이면 세월호 유가족들은 유달리 공무원들에게 욕설을 해댔다. 그것이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지만, 순신은 유달리 그 말들이 아팠다. 업무 처리 중 불합리를 보고도, 그것이 상부와 연결됐다 싶으면 무시하고 넘긴 일, 무엇보다 점차 그런 일에 익숙해져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쳤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순신이 팽목항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순신이 세월호에 탔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오해했다. 놀란 어머니는 팔십 노구를 이끌고 정신없이 팽목항으로 향했다. 사고 초기였고 그래서 팽목항으로 오는 길은 쉽지가 않았다. 어머니의 몸은 충격과 피로를 견디지 못했고, 길 위에서 눈을 감으셨다.

박경리 선생의 묘소는 생각보다 아담한 모양새다. 순신은 묘소 앞에 서서 가만히 묵념한다. 그러면서 설 전에 부모님 묘소를 한 번 찾아봬야겠다고 생각한다. 묵념을 끝내고 뒤를 돌아서니 경치가 탁 트였다. 저 멀리 바다 건너서 보이는 섬이 한산도일 것이다. 순신 자신과 이름이 같은 한 사내를 생각한다. 그 옛날 한산도에서 우뚝 솟아 외로웠던 장수다. 육지에서 진도 팽목항으로 가려면 쌍둥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 다리 아래 물길을 울돌목이라 부른다. 다른 이름은 명량이다. 외로운 장수의 이름을 빛낸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한산도를 바라보며 '무릇 장수 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장수의 말을 떠올린다. "바른 정신으로 살아!"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하지만 어머니, 이 혼란의 시대에 바른 정신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백성을 향하는 그 충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요? 대답처럼 한 줄기 바람이 그의 뺨을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사마천처럼 우뚝하고 외롭게, 순신은 한참을 한산도를 향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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