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 경남-경남에서 만나는 이순신]이순신은 어떻게 묘사됐나

일찍이 이순신은 노량에서 스러졌다. 1598년의 일이다. 실체는 사라졌지만, 그의 명(名)은 길었다. 당대는 물론 임진왜란 후 조선시대 내내 많은 이들이 이순신을 추앙했다. 이순신과 같이 싸운 명나라 장수 진린은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라고 썼다. 한때 이순신을 죽이려고 했던 임금 선조도 "사랑홉다 그대여, 공로는 사직에 있고 빛나는 충성 절개 죽어도 영화롭다, 인생 한 세상에 한번 죽음 못 면하네, 죽을 데서 죽은 이로 그대 같은 이 드물도다"라고 추모했다. 숙종은 충남 아산에 현충사를 지으며 제문에다 "절개를 지키려 죽음을 무릅썼다는 말은 예부터 있었으나, 제 몸 죽여 나라를 살린 것은 이 사람에게서 처음 본다"고 했다. 하지만 봉건시대 이순신은 여전히 신하의 위치에 있을 뿐이었다.

이후 조선 말에서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이순신은 민족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후 군사 정권 시절에는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군인으로 거듭났다. 2000년대 초 김훈의 <칼의 노래>는 그를 고뇌하는 인간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지난해 4월 세월호 참사에 이어 7월 개봉한 영화 <명량>으로 이순신은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로 주목받는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영웅'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의 암흑기였다. 억눌린 민족에게는 영웅이 필요하다. 당대 지식인들이 주목한 건 이순신이다. 임진왜란 때 용맹과 지략으로 일본을 무찌른 조선 민족의 영웅. 단재 신채호는 지난 1908년 5~8월 대한매일신보에 <이순신전>을 연재하며 이렇게 쓴다.

"돌이켜보아, 일본과 대적함에 있어 우리 민족의 명예를 대표할 만한 위인을 꼽는다면 고대에는 두 분, 고구려 광개토왕과 신라 태종왕이 있고, 근세에는 김방경·정지·이순신의 세 분으로 무릇 다섯 분에 그친다. 그러면서도 그 시대가 가깝고 그 유적이 손상되지 않아 후세 사람의 모범되기가 가장 좋은 이는 오직 이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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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는 명량해전을 통해 민족의 영웅으로 이순신을 옹립했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묘사를 보자.

"그러더니 갑자기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크게 일면서 적선 30여 척이 조각조각 깨어지고, '조선 3도 수군통제사'라고 크게 쓴 깃발을 펄럭이며 우리 배들이 날랜 용처럼 도로 나오니, 이것이 하늘인가 귀신인가, 어떻게 믿을손가. 관전하던 일체의 사람들이 손으로 이마를 치면서 '조선 만세!'를 크게 외쳐 불렀다."

일제강점기, 이순신 가문 종가 가세가 기울면서 이순신의 묘소가 포함된 땅이 은행에 저당 잡힌다. 이것이 경매로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위기라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전국 각지에서 성금이 모여들었다. 이를 계기로 '이충무공유적보존회'가 만들어진다. 동아일보 1931년 5월 25일 자 사설을 보자.

"침체된듯한 민족적 의기가 듣기에 괴롭고 죄송스러운 묘소 문제로 말미암아 울연히 한길로 모임을 볼 때, 이만한 발전은 진즉 예기하였던 바이거니와 이제 만장일치로 보존기관이 창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함에 우리는 새삼스러히 우리의 의무의 일단을 펼칠 수 있다는 감개와 아울러 숙원을 성취한듯한 감격마저 느끼게 된다."

같은 해 춘원 이광수는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이순신>과 '충무공유적순례'란 제목으로 답사기를 연재한다. 이순신은 왕에게 충성한 것이 아니라 조국과 민족에게 충성한 것이란 해석이 자리를 굳힌 게 이 즈음이다.

*<이순신전> 번역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 교양총서>(1989년) 참고.

군사정권 당위성 세워줄 '군인'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군인으로서 이순신의 모습이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특히 군사정권은 적극적으로 '군인' 이순신을 이용했다. 박정희(전 대통령)가 대표적이다. 현충사 성역화 작업이 이뤄지고, 4월 28일을 충무공탄신일로 지정한 것도 박정희 정권 때다. 그는 이순신을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일본군을 무찌른 장군'으로 설정하고 이를 자신의 후광으로 삼았다. 지난 1968년 4월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세운 이순신 동상은 박정희가 생각한 이순신의 이미지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동상은 조각가 김세중(1928~1986)의 작품이다. 그는 종교조각으로 이름난 이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 때에 변형된 조선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복원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지만 그 대신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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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김세중기념사업회가 만든 광화문 충무공이순신장군상 홈페이지( www.choongmoogong.org )에 나온 글이다. 실제 여느 동상과 달리 광화문 동상은 웅장하고 위협적인 자세를 하고 있다. 치켜 올라간 눈매도 실재했던 인물이라기보다는 신화나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수호신에 가깝다. '카리스마'에 집중한 탓일까, 광화문 동상은 그동안 끊임없이 역사적인 고증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박정희는 왜 이순신에 그토록 열정을 보인 것일까. CBS 노컷뉴스 변상욱 대기자는 이렇게 적었다.

"이순신 장군은 군사를 이끄는 장수이지만 이미 무능한 왕보다 우월한 능력과 인품을 가진 인물로 공인돼 버렸고, 계급과 신분을 초월해 민족의 지도자가 된 존재였다. 이는 군부의 장성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로 정부를 전복하고 국가 최고실력자가 되어 민족근대화를 이끄는 것과 비슷한 서사구조를 갖는다."(노컷뉴스, 2014년 8월 13일 보도)

이 도식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26일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35주기 추도식', 당시 현장에 있던 한겨레 기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승윤 전 경제부총리는 박 전 대통령을 이순신 장군에, 5·16 군사쿠데타를 '명량대첩'에 비유하기도 했다."

(한겨레, 2014년 10월 26일 보도)

고뇌·갈등하는 '인간'

2000년대 초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가 느닷없이 이순신 열풍을 불러일으킨다. 김훈은 극도로 간결한 문장과 담담한 서술로 독자를 매료시켰다. 하지만 이 소설의 핵심은 이순신을 영웅이 아닌 고뇌하는 '인간'으로 그려낸 데 있다.

문학평론가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현대문학대사전>(2004)에서 이렇게 쓴다.

"충군애국의 '성웅'으로 떠받들려져온 충무공에 익숙해진 눈에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낯설게 다가올 법하다. 그는 봉건적 이념의 순결한 구현자라기보다는 자기정체성을 둘러싼 고뇌와 갈등에 복무하는 실존의 인간으로 그려진다. 그의 고뇌는 무인(武人)으로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충군애국에의 요구에 순순히 응할 수 없다는 데서 온다."

소설에서 이순신은 지독하게 외로워 보인다. 그래서일까 유달리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는 문장이 많다. 김훈은 소설 곳곳에 이순신의 고뇌를 심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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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무인 된 운명을 깊이 시름하였다. 한 자루의 칼과 더불어 나는 포위되어 있었고 세상의 덫에 걸려 있었지만, 이 세상의 칼로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덫을 칠 수는 없었다. 한산 통제영에서 그리고 그 후의 여러 포구와 수영에서 나는 자주 식은땀을 흘렸고, 때때로 가엾고 안쓰러워서 칼을 버리고 싶었다."

김훈은 이순신을 통해 인간과 삶에 대한 고뇌 없이 그저 부서져가는 지금 세상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는 장면을 그는 이렇게 묘사한다.

"내 끝나지 않은 운명에 대한 전율로 나는 몸을 떨었다. 나는 다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였다. 나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수군통제사였다. 내가 임금을 용서하거나 임금을 긍정할 수 있을지는 나 자신에게도 불분명했다. 그러나 나의 무(武)는 임금이 손댈 수 없는 곳에 건설되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중략)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

이 소설은 지난 2004년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서 권한이 정지된 노무현 대통령이 홀로 열심히 읽었다고 알려지면서 더욱 유명해진다.

비겁함 보이지 않는 '리더'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가 가라앉았다. 선장은 승객을 두고 도망쳤다. 같은 해 7월 30일 영화 <명량>이 개봉됐다. 영화에서 부하들이 겁을 먹고 도망칠 때 이순신이 탄 대장선만은 선두에서 홀로 적과 맞선다. 대장선은 끝내 살아남아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가라앉은 세월호와 살아남은 대장선이 교차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이순신이 시대가 요구하는 '선장'으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영화 <명량>은 기본적으로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를 잇는다. 적어도 이순신에 대한 부분은 그렇다. 영화의 핵심 메시지는 이순신이 아들 회와 대화하는 장면에 들어 있다.

"아버님은 왜 싸우시는 겁니까?/ 의리다. /저토록 몰염치한 임금한테 말입니까?/ 무릇 장수 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임금이 아니고 말입니까?/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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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군막까지 불태우며 두려워하는 군사들을 독려하는 장면에서 <칼의 노래>와 맥을 달리한다.

"나는 바다에서 죽고자 이곳을 불태운다. 더 이상 살 곳도 불태울 곳도 없다. 목숨에 기대지 마라. 살고자 하면 필히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병법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능히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처한 형국이 아니더냐!"

영화에서 이순신은 난투 속에서도 홀로 우뚝 서 있다. 아들과의 대화는 계속된다.

"아버님 대체 이 강한 두려움들을 어찌 이용하시겠단 말입니까?/ 두려움은 필시 적과 아군을 구별치 않고 나타날 수가 있다. 저들도 지난 6년 동안 줄곧 나에게 당해온 두려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뿐이옵니까? 그게 두려움을 이용하는 것입니까? / 만일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 용기는 백 배 천 배 큰 용기로 배가되어 나타날 것이다./ 하나 아버님 극한 두려움에 빠진 저들을 어떻게 그런 용기로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죽어야겠지, 내가."

영화에서 이순신은 가장 많이 부서지고, 그래서 가장 초라해진 전선 위에 가장 홀로 우뚝 선 사람이다. 그래서 외롭고, 고단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답답한 시대를 견디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리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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