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남아있는 대장간·대장장이

창녕대장간은 읍에 자리하고 있지만 사람 발길 많은 곳은 아니다. 오며 가다 우연히 이곳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아는 사람만 찾을 뿐이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곳을 기웃하는 사람은 제법 되는 편이다.

한 아주머니가 대장간을 찾았다. 

"할배, 칼 다 됐는교?"

할아버지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

"돈도 안 되는 거, 천천히 하지 뭐…."

아주머니가 서서 몇 번 더 재촉하자 할아버지는 '허허허' 웃으며 장갑을 낀다. 화덕을 지피자 금세 불씨가 올라온다. 여기에 쇠를 집어넣자 벌겋게 타오른다. 한동안 쇠를 굽고 나서는 기계 힘을 빌려 모양을 낸다. 절단기로 쇠를 자른 후 손수 망치를 내리치며 섬세히 가다듬는다.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쇠는 단단해지고 또 날카로워진다. 그렇게 칼날 하나가 뚝딱 완성된다.

01.jpg
▲ 창녕 대장간./남석형 기자

16살 때 대장장이 길로

엄충기 할아버지는 거창군 마리면에서 3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 시절이 다 그렇듯,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 그것도 10살 때 들어가 16살에 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대장간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산골짜기에서 얼마 되지 않는 땅에 농사짓다 보니 배 채우는 게 쉽지 않았지. 늘 죽 끓여서 가족이 근근이 배나 채웠지. 초등학교 졸업하고 거창에 있는 한 대장간에서 일하기 시작했어.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고 밥만 얻어먹는 거야. 어린 나이에 하기 쉬운 일이 아니잖아. 여름에 그 더운 열을 받으면서 땡기고, 밀고, 굽고 있으면 저절로 잠이 들어. 머리 타는 냄새가 풀풀 나는 것도 모르지. 옆에 사람이 깨워주면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 거야. 어이구, 마지못해 하는 거지."

곧잘 따라가기는 했지만 10대 소년이 버티기엔 힘든 일이었다. 대장간을 뛰쳐나와 집으로 도망가는 일이 한두 번 아니었다. 그때마다 주인이 찾아와서는 데려갔다. 대장간 처지에서도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기술 익힌 아이를 계속 쓰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붙잡혀 오기를 반복하며 10대 시절을 보냈다. 

02.jpg
▲ 엄충기 할아버지와 창녕대장간 전경./남석형 기자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다시 대장간을 찾았다. 배운 게 이것밖에 없다 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 마침 주인이 대장간을 창녕으로 옮기면서 나도 따라오게 됐지. 1970년대에서 90년대까지는 대장간 재미가 아주 좋았지. 대장장이도 기술자라 제법 대접을 받았지. 내가 연애 결혼했는데, 저쪽 집에서도 싫어하지 않았으니까. 남의 집에서 일하는 처지라 돈은 많이 받지는 못했고. 1970년대 말 월급이 신혼살림하기 딱 적당한 6000원 정도였어."

그렇게 10년 넘게 월급쟁이로 일했다. 대장간 주인 기술이 좋았기에 배울 수 있는 건 많았다. 그러다 주인이 다시 거창으로 돌아갔고, 엄충기 할아버지는 창녕에 그대로 남아 자신의 대장간을 차렸다. 1992년 지금 자리다.

"월급 조금 모아둔 것으로 빚 안 내고 마련했지. 그때는 이 주변이 다 논이었어. 굳이 이 자리를 택한 이유가 있지. 바로 위에 우시장이 있었거든. 그때는 혼자서 하다 보니 감당 못 할 정도였지. 남한테 돈 빌릴 일 없이 3년 정도 재미 좋았어. 그런데 우시장 없어지면서 일이 줄어들게 됐고. 그 뒤로는 시대가 변하다 보니 더더욱 그렇고. 이제 전국에 제대로 된 대장간이 몇이나 남아있는지 나도 모르겠네."

여전히 찾는 이들이 있다

그래도 이곳을 찾는 사람은 계속 찾는다. 멀리는 인천·경기에서도 주문이 들어온다. 하동 화개장터 대장간에서도 연락이 오는데, 할아버지가 중간 과정만 거쳐 넘기면 그곳에서 최종 상품을 만드는 식이다. 예전에는 가까운 곳에는 직접 배달도 했지만, 이제는 모두 택배로 부친다. 

03.jpg
▲ 엄충기 할아버지./남석형 기자

지금 대장간 모습은 처음 시작 때 그대로다. 화롯불은 20년 넘게 거의 매일 지폈다 끄기를 반복했다. 쇠 모양을 잡아주는 기계에는 지난 세월을 말해주는 새까만 기름 때가 가득하다. 가끔 말썽을 부리기도 하지만, 기술자 도움 없이 할아버지 스스로 손 볼 정도는 된다.

"일 하는 시간이 정해진 건 없어. 선금받은 게 있으면 제때 맞춰주는 거지. 낫이나 칼 이런 거는 만들어도 돈이 안 되지. 낫 하나 4500원 받아 도매로 넘기는데, 재룟값 빼고 나면 남는 것도 없지. 오래된 사람들 안면 보고 하는 거지. 요즘은 오전 9시나 시작해서 날 추우면 해 지기 전에 문 내려버려. 몸도 안 좋으니 할 수 있는 것만 해야지. 욕심부린다고 될 것도 아니고…."

모든 게 좋은 시절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때 모아 두었던 돈은 이래저래 날렸다. 할아버지는 지금껏 사람을 쓰지 않고 혼자 이 일을 했다. 내리막길로 접어든 지 오래됐기에 배우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서른 넘은 아들도 애초 이 일에는 관심 없었다.

할아버지는 집이 따로 있지만 대장간 뒤편에 있는 허름한 공간에서 먹고 지낸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을 때 할아버지는 장갑을 벗었다. 하지만 식사 아닌 소주 한 잔을 따라 마실 뿐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장갑을 꼈다.

"목이 말라서 마시는 거지. 이렇게 한 잔씩 먹다 보면 하루 두 병은 마신다. 그런데 취할 수가 없어. 뜨거운 데 있으면 땀으로 다 나가거든. 술 취하고 작업하면 웃겨. 그때는 분명히 반듯하게 보였는데, 깨고 나서 보면 비딱하거든. 그러면 다시 손질해야 하니 일 두 번 하는 꼴이지. 나는 낮에 반술 됐다 싶으면 아예 불 꺼버리고 일 안 해. 더 하면 안 돼, 사고 날 수도 있고. 예전에 어떤 대장장이는 술 취해서 하다가 손가락 잘렸잖아. 나는 그런 거 하나는 확실해. 50년 세월 일 하면서 손 같은 데는 한 번도 다친 적이 없으니까."

할아버지 손길은 매우 빨랐다. 하지만 편치 않은 몸은 그만큼 따라가지 못했다.

"예전에 몸 좋을 때는 하루에 호미 100개도 만들었는데, 요즘은 다섯 개나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이전부터 허리가 좋지 않았다. 수십 년 간 무거운 물건을 많이 든 탓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망치질도 이를 더했다. 올해 초 그것이 악화됐다. 눕는 것도 고역이었다. 한 번에 바로 누울 수가 없어 옆으로 누워야만 했다. 병원에 찾았다가 몸을 더 버렸다. 물리치료를 받았는데, 나아지기는커녕 등뼈가 튀어나왔다. 한의원을 다시 찾아 침을 맞고 나서부터 통증은 좀 덜했다. 하지만 구부정해진 허리 때문에 지금은 자동차 운전하기도 쉽지 않다. 

04.jpg
▲ 엄충기 할아버지./남석형 기자

"술·담뱃값은 벌어야지"

대장간 한쪽 벽면에는 사진 액자 두 개가 걸려있다. 할아버지 일하는 모습을 사진작가가 찍은 것이다. 여기 대장간을 찾는 이들은 단지 농기구·생활용품 같은 물건을 의뢰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할아버지 작업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또 이러한 옛 공간에서 추억을 곱씹기 위함도 많다. 인근 주민에게는 오가며 들르는 공간이기도 하다. 작업하는 데 방해될 법도 하지만, 할아버지는 오는 이들 막지 않고 가는 이들 잡지 않는다.

자주 찾는 한 아저씨가 할아버지 말동무를 했다.

아저씨: "그동안 이거 가지고 돈 많이 벌었는데 뭐…."
할아버지: "재료하고 쇠도 사야하고, 탄 없으면 그것도 채워야 하고…. 세 가지를 사야 할 수 있는 일이니, 어떤 때는 월말에 계산해 보면 적자다."
아저씨: "이젠 일 그만할 때 안 됐습니꺼?"
할아버지: "그래도 술값하고 담뱃값은 벌어야지. 담뱃값도 오른다 하더만…."
아저씨: "그만두게 되면 나한테 물려주면 되겠네."
할아버지: "어이구, 지금 당장 가져가라."
아저씨: "돈이 없어서 당장은 못 하고…. 1~2년 정도 배우면 쉬운 건 만들 수 있겠지예?"
할아버지: "1~2년 해서는 어림도 없지. 나도 아직 다 못 배웠는데…. 수십 년 했는데도 말이다."

대화를 나누던 할아버지는 구부정한 몸을 일으키고는 다시 망치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