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열적인 홍(紅) 여사입니다"

'소나무집'을 지도 애플리케이션에서 찾아봤다. '이런 곳에 식당이 있을까?' 싶었다. 함안군 법수면 국도변에 있는 식당은 낡았지만 주인의 애정이 듬뿍 담긴 모습이었다. '소나무집' 찾아간 이유는 음식을 맛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남다른 역경을 거치며 살아온 홍해옥(56) 씨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가진 건 개근상뿐이었던 '근성소녀'

홍 씨는 1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나 창원시 대산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막내라 집안사정을 체감하며 자라지는 않았지만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부모님의 삶은 고단 해보였다고 했다.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던 아버지는 딸에게 '가시나'라는 소리 한 번 안 했던 어진 성격이었지만 노름을 즐겼다. 자기가 번 돈은 물론이고 돈 냄새를 맡아 집안에 숨겨둔 공납금 같은 것을 들고 사라지시고는 했다. 어머니 고생이 말도 못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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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해옥 씨./서정인 기자

"어머니가 몇 십리를 걸어다니면서 생선을 팔았어요.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시면서 힘들게 돈을 버셨죠."

홍 씨는 운동과 노래를 좋아하는 활달한 성격이었다. 학교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대학에는 가지 못했다.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졸업하고 나니 무얼 해야 하나 싶었다. 마침 동네에서 신문을 보던 집이 있었다.

"시골이라 뭘 할지 막막하고 정보도 없고 그랬어요. 근데 동네에 어느 한 집이 부산지역신문인 국제신문을 보고 있더라고요. 거기 구인광고 나온 것들을 보고 이력서를 넣었어요. 부산에 있는 미화예식장, 쥬단학화장품, 관광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전부 오라고 하는 거예요. 예식장에 가고 싶더라고요. 그 길로 아는 친척 하나 없는 부산으로 갔어요."

10명을 뽑는 데 170명이 왔다. 중·고등학교 내내 받았던 개근상을 얘기하며 당차게 면접을 봤던 게 뽑힌 이유인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부산생활은 편히 발 뻗을 자리 하나 구할 수 없이 고되기만 했다.

"자취할 형편이 안 되어서 처음 몇 달은 친구 사촌 언니 집에서 생활했어요. 그러다가 계속 있을 수 없으니까 미화예식장 옆에 있던 여성회관에서 당시 7700원을 주고 잠을 잤어요. 불도 안 들어오는 방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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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모습./서정인 기자

예식 때는 신부를 따라다니며 드레스를 잡았고 식이 끝나면 세제물로 청소를 했다. 같이 일했던 동료들은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사라졌지만 홍 씨는 저녁 당직 수당을 받고자 매일 자청해서 당직을 섰다.

"여성회관에서 자는 돈도 아까워서 신부대기실에서 몰래 자다가 경비아저씨한테 들키기도 하고.(웃음) 그렇게 1년 2개월 정도 지냈는데 예식장에서 경리 일을 하던 분이 시집을 가게 되었어요. 사장님 사모님이 그 자리에 제가 들어가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부족해서 못 한다고 하니까 사모님이 해보지 않고 포기하지 말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해주시더라고요. 그 말에 용기를 얻어서 밤에 종이 찢어서 돈 세는 연습하고 주산 연습하고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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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해옥 씨./서정인 기자

생전 해본 적이 없는 일에 막상 부딪히니 따라오는 스트레스가 생각보다 엄청났다.

"예식이 끝나고 계산해달라고 하면 제가 아직 일이 손에 안 익어서 느리니까 사람들이 막 '경리가 왜 이렇게 시원찮노' 이런 말을 해요. 그때는 어리니까 그런 소리 들으면 얼굴이 벌게져서 돈도 제대로 못 셌어요. 돈이 모자라서 월급도 못 받은 적도 있고요. 그렇게 사니까 너무 힘이 들고 벗어나고 싶었어요."

결혼이라는 선택

22살 아가씨는 행복한 표정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예쁜 드레스도 눈에 자꾸 들어왔다. 또 결혼만이 이 생활을 멈추는 길 같았다.

"큰언니가 시장에서 장사를 했는데 거래하는 재일교포가 있데요. 교포다 보니까 시장 오실 때 특이하고 예쁜 물건도 가지고 오고 엔화도 많이 들고 다니셨데요. 언니가 주선을 해줘서 그분 아들이 부산으로 선을 보러왔고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결혼한 사람에게는 어머니가 둘이었다. 일본과 한국을 번갈아 드나들었던 시아버지가 일본에서 만난 여자, 그리고 한국에 있는 시아버지의 본처, 남편은 시아버지가 일본에서 데려온 아들이었다. 이런 속사정 때문에 홍 씨의 남편은 시어머니에게 냉대받으며 살아왔다고 했다. 

"결혼하고 나서 시댁에 가니까 전기가스 밥솥도 있고 목욕 안 하고는 밥을 먹을 수 없고 식사 때 갈치를 엄청 큰 것을 먹고 살아 있는 꽃게도 내오더라고요. 시집을 참 잘 왔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아기 아빠랑 시댁에서 살았는데 시아버지가 잠시 일본 가시고 나면 시어머니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못살게 구는 거예요. 그때가 마산 해운동 주택 하나가 600만 원 할 때였는데 1000만 원을 가지고 시댁에서 나왔어요. 전셋집을 얻고 700만 원이 남았는데 남편이 동창생이랑 합판대리점을 동업하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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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내부 모습./서정인 기자

경험 없는 사람에게 사업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운도 따르지 않았다. 비가 많이 오는 날 창고에 물이 들어가 합판이 모두 망가져 버린 것이다. 삶은 본격적으로 홍 씨를 매섭게 몰아갔다.

"빚이 생긴데다가 아이도 태어났는데 먹고살 길이 없어서 언니에게 갔어요. 언니네 집에 방이 10개가 있었는데 우리한테 하나를 내줬어요. 남편은 아직 힘들어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제가 어시장에서 장사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수제비를 온 정성을 다해 만들어서 머리에 이고 어시장에 갔죠."

시장에 왔지만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발만 동동 구르며 서 있으니 옆에서 지켜보던 장사꾼들이 답답해서 먼저 말을 걸었다.

"'새댁 아까부터 뭐 하는 거요? 들고 온 게 뭐요?' 물어보셔서 그제야 '수…수제비요' 하고서 냄비를 보니까 퍼져서 못 먹게 됐더라고요. 제가 안 돼 보였는지 옆에 장사하시는 아주머니들이 한 숟갈씩 떠드시고는 돈을 조금 주시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 식혜로 종목을 바꿨지만 실패, 과일을 팔아 봐도 실패였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오이를 떼어다가 팔기 시작했다.

"더 안 되겠다 싶어서 용기를 내서 소리를 냈어요.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니까 주변 분들이 시끄러워서 미더덕도 못 까겠다고 하실 정도로 열심히 팔았어요. 물고기 올린 판자 옆에 아이를 눕혀놔서 볼에 비늘이 붙어 있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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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내부 모습./서정인 기자

살아보려고 시작한 일이 '독'으로

"그렇게 언니네 집에서 너무 오래 있으니까 형부는 우리가 갑갑한 거예요. 약주를 드시고는 짐을 다 끄집어내서 길에 내놨어요. 우리 아이가 홍역을 앓는 상태였는데요. 지금도 그 상처를 못 잊어요. 그 길로 나와서 작은 방을 얻어서 살았는데 아이 아빠가 처음 월급을 타온 적이 있어요.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24만 5000원을 벌어왔는데 세상에 그 돈이 얼마나 값진지…. 시댁에서 가지고 나왔던 1000만 원은 돈이 아닌 것 같았어요. 근데 월급 받은 걸 어떻게 알았는지 동업할 때 생긴 빚을 갚으라고 사람들이 집에 찾아왔어요.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시댁에 말을 많이 해서 시댁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어요."

하지만 예전과 같은 이유로 이번에도 시댁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가족에게는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했기에 홍 씨는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곧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나이 29살 최연소 소장이 되었다. 하지만 홍 씨는 그게 추락의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내실이 다져지지 않았는데 인정을 받으니까 더 잘하고 싶어서 무리를 한 거죠. 교만과 허세였죠. 가짜 가입자를 만들어서 제가 보험비를 내면서 유지를 하고 영업운영비를 타기도 하고요. 그렇게 하면 받는 돈도 있지만 일단 보험료는 메워야 하니까 급전을 쓰기도 하고 보증도 서고 형제들이 보험 들어놓은 걸 이용하기도 했고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하니까 결국은 실패했어요. 빚이 산더미처럼 불었어요. 아이들 아빠랑 다투게 되고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더라고요."

그 뒤 셋째 언니의 도움으로 식당을 운영하는 등 재기하고자 애를 썼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다. 남편과의 불화는 계속됐고 결국 이혼 도장을 찍는다. 사정상 두 아이와도 떨어져 살게 되었지만 홍 씨는 여전히 뭐든지 해주고 싶은 엄마였다.

"딸이 미대를 가고 싶어 했어요. 근데 미술이 돈이 많이 들잖아요. 딸이 미술학원 특강을 듣고 싶다고 저를 붙잡고 말하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신문을 보고 주유소에 찾아가서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1년 반을 일하고 식당에 취직하려고 알아보는데 그때가 IMF 때라서 일자리가 없는 거예요. 실업자들이 넘쳐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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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 모음./서정인 기자

막다른 길, 눈물의 박카스

힘들게 세차장에 취직을 했다. 열심히 일을 했고 새로운 인연도 찾아왔다. 홍 씨는 세차장에서 번 돈 조금을 가지고 분식집을 하기로 했다. 절대로 실패할 수 없었다. 서로 의지하기로 한 사람이 '개농장'을 하겠다며 함안에 마땅한 곳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옮겨 온 곳이 바로 이곳이다.

"여기 와서 세를 주고 얻은 가게에서 분식집을 시작했고 풀빵도 같이 해볼까 싶더라고요. 근데 도시에는 1000원, 2000원 해도 유동인구가 있으니까 조금씩 계속 팔리는데 여기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으니까 조금 팔고 남으면 다 식어버리잖아요. 그래서 생각해낸 게 '무조건 한 판에 2000원' 이렇게 파는 거였어요."

그게 먹혀들어갔다.

"파출소, 면사무소 이런 데서 한 판씩 막 사가는 거예요. 근데 장사가 좀 되기 시작하니까. 집주인이 자기가 해야겠다고 가게를 비워달라고 하는 거예요."

가게는 탈 없이 잘 자리 잡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겉과 달리 홍 씨의 속은 바짝 타들어가는 상태였다.

"농장 키워서 큰돈을 만들어주겠다고 하니까 번 돈 족족 농장에 쏟아부었죠. 저는 장사 때문에 외출도 못 하고 하니까 우울증에 걸렸어요. 재혼한 것도 괜히 부끄러운 데다가 우리 아이들한테는 잘사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압박이 있어서 마음은 곪아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횡포를 당하니 대응할 힘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또 빚을 내 당시 가게의 뒤편에 있던 지금의 '소나무집'을 샀다. 그때가 2003년 즈음. 태풍 '매미'가 상륙했고 주변지역도 피해를 입었다. 근처에는 마땅한 식당이 없었던지라 복구현장에서 일을 하던 노동자들이 '소나무집'에 밥을 먹으러 오기 시작했다. 홍 씨에게는 동아줄 같았던 손님들이었다.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 드실 밥을 하기 시작했어요. 근데 그전 자리에서 저를 쫓아냈던 집주인이 우리 가게에 손님들이 못 오도록 방해를 했어요. 손님들이 차를 못 돌리게 쇠사슬을 나무에 걸고 그러더라고요. 오던 손님들도 길이 불편해지니까 발길을 끊으셨어요. 너무 절박했어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박카스 다섯 상자를 사서 편지랑 같이 공사를 담당하는 건설회사에 택배로 보냈어요."

편지는 이런 내용이었다. '부족하지만 훗날 성공해서 수기를 쓸 수 있다면 이 회사 덕분이라고 할 거다. 기회를 달라. 그러면 내가 직원들을 위해 정말 좋은 영양사가 될 것이다.' 편지가 마음을 움직였는지 이틀 뒤에 건설회사에서 사람들이 왔다. 배달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무조건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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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해옥 씨./서정인 기자

이제 훨훨 날 거예요

시샘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비워준 가게 건너편에 있던 주유소 사장이 새 건물을 지었는데 식당 할 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홍 씨는 번듯한 건물에서 새 가게를 꾸리고 싶었지만 욕심이었는지 계획대로 잘 안 되었다. 다시 '소나무집'으로 돌아온 홍 씨는 가게고 빚이고 다 놓고서 훨훨 날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내놓은 가게는 팔리지 않았다. 사겠다는 사람도 나타나고 근처에 공장에 들어선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결국 이 가게를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은 여전했고 생활은 어려웠죠. 그런데 어느 날 손님이 식사를 하시고는 저랑 얘기를 좀 나누셨는데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동영상을 좀 찍자고 해서 찍었어요. 그분이 함안 법수중학교 동문 인터넷 커뮤니티를 운영하시는 분이셨는데 동영상을 올리신 거예요. 그래서 회원들 몇 팀이 찾아오셨어요. 오시는 분마다 정성껏 대하니까 소문이 나고 가게가 좀 알려지게 되었어요. 어느 순간 다시 제대로 살아보자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스스로 극기훈련을 하기 시작했어요."

1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했다는 훈련은 자신을 밖으로 꺼내는 것이었다. 가게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신발도 장화와 슬리퍼, 겨울용 털신이 전부였다. 홍 씨는 장화를 신고 둑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꽃 같은 것도 키워본 적이 없어요. 저 살기가 바빴으니까요. 처음에 훈련하기로 마음먹고 둑을 따라 걷다가 펼쳐지는 강을 봤는데 눈물이 '투둑' 하고 흘렀어요. 좀 더 걸으면 나오는 수문 위에 올라가서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었어요. '홍해옥은 꼭 성공한다!' '소나무집은 꼭 성공한다!' '홍해옥은 해낼 수 있다!' 크게 세 번 외치고 음악을 틀고서는 몸을 제 맘대로 흔들었어요. 눈물이 막 흐르더라고요. 가게로 돌아와서는 찬물로 머리를 감고 세수 하고요."

그렇게 한지 일주일 째 되던 날. 가슴 속 돌멩이가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더니 가게로 돌아오는 길에 예쁜 야생화가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생활의 변화를 주려고 하니 남편과 다툼은 잦아졌다. 결국은 폭력적인 성향까지 드러낸 남편에게 홍 씨는 이혼해 달라고 요구한다.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홍 씨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앗싸! 홍 여사!

'소나무집'의 대표 메뉴는 가오리 비빔국수이다.

"비빔국수 메뉴가 없어서 가오리 비빔국수를 만들고 이름을 '앗싸! 가오리 비빔국수'로 했어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빨간색으로 현수막을 주문해서 가게 앞에 달았어요. 주방에서 손님들이 가게로 오는 소리가 들리는데 '앗싸, 앗싸' 하면서 올라오시더라고요. 느낌이 오는 거예요.(웃음)"

'소나무집'은 저녁에 장사를 하지 않는다. 이유는 여러가지라고 했다. 저녁에 인적이 많지 않은 곳에서 술에 취한 손님들을 상대하는 게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고 저녁에는 충분히 쉬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손님 중에서 초면에 반말을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면 말 놓지 말라고 해요. 거기에 저도 좋게 응대해주면 가게의 질이 달라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원래는 가게에서 살았는데 이제 다른 데 집을 구해서 살아요. 낮에만 장사하는데 이상하게 수입이 점점 나아져요. 나름 규칙을 정해 장사를 하니까 제 스타일에 맞는 손님들이 오시더라고요. 저녁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강을 따라 돌기도 하고 다른 식당에 가서 밥도 한 그릇 사먹어요. 이제야 자유로워요."

아직 짊어져야 할 짐이 있긴 하지만 홍 씨의 표정은 밝았다. 한 해 한 해 나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전거로 시작해 지금은 오토바이를 구입해 열심히 타고 있고 내년에는 더 절약해 승용차를 살 생각이라고 했다. 홍 씨는 '소나무집'이 시간이 지나도 계속 불리는 사랑노래 같은 존재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오후 5시. '소나무집'의 하루가 저물었다. 홍 씨는 빨간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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