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출신 세 대통령의 인연 혹은 악연

경남에서 태어나 대통령에 오른 전두환·김영삼·노무현. 동시대 격변기를 함께하다 보니 물고 물리는 교차점도 많았다. 그들의 인연 혹은 악연은 이렇다.

- 전두환과 김영삼 -

12·12쿠데타에 성공한 전두환은 1980년 5월 17일 계엄 정국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전두환에게 큰 눈엣가시는 김영삼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김영삼은 두 차례 걸쳐 2년여간 가택연금을 당했다. 1983년 5월 18일 23일간 단식에 들어갔는데, 전두환을 대신해 회유하러 온 권익현 민정당 사무총장에게 "나를 해외로 보낼 방법이 있다. 시체로 만들어 부치면 된다"며 버텼다고 한다.

3당 합당에 대한 스스로 말을 빌리자면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 김영삼은 대권을 쥐고 나서는 하나회 해체 등 군부 청산에 나섰다. 1995년에는 박계동 의원의 '비자금 폭로'를 시작으로 12·12, 5·18 관련 재수사가 이어졌고, 국민들은 죄수복 입은 전직 대통령 모습을 보게 됐다. 전두환은 자신들을 부정하는 김영삼을 향해 평소 스타일대로 '우리와 손잡은 당신은 뭐냐'는 식으로 받아쳤다. 'TK 홀대론'에 젖어있던 대구·경북은 이러한 전두환에 동조하는 정서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5·18 특별법 제정'을 외치며 거리에 나선 대학생들을 향해 '수고한다'며 음료수를 건네는 아주머니들 손길 또한 많았다.

김영삼은 무기징역이 확정된 전두환을 1997년 대선 직후 특별사면했다. 그때 추징금은 아직도 1000억 원 넘는 꼬리표로 남아 있다.

- 김영삼과 노무현 -

잘 알려진 대로 노무현은 통일민주당 총재이던 김영삼 권유로 정계에 입문, 1988년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김영삼은 노무현을 상도동 자택으로 수시로 불러 이야기 나누는 등 정신적·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후원자였다. 하지만 1990년 노무현은 김영삼을 향해 울분의 목소리를 쏟아내야만 했다. 3당 합당에 대한 당내 의결 당시 노무현은 "이의 있다. 반대 토론을 해야 한다"고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이후 노무현은 김영삼이 그토록 싫어하던 김대중과 함께했다.

그렇게 소원했던 둘 관계를 푸는 특효약은 역시 선거였다. 노무현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13년 만에 김영삼을 찾았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은 'YS 시계'로 지난 시간을 허물어트렸다.

"총재께서 1989년 일본에서 사다 주신 시계다. 총재님 비난하고 다닐 때는 농 안에 뒀는데, 총재님 생각나면 차고 다녔다."

하지만 김영삼은 이후 노무현 탄핵 정국 때 '그럴만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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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과 노무현 -

1981년 10월에 있었던 '부림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 탄압이었다. 영화 <변호인>을 통해 잘 알려졌듯, 노무현은 이 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이후 인권변호사·재야운동가 이미지로 두드러졌고, 김영삼에게 스카우트까지 됐다.

그리고 1988년 12월 청문회에 출석한 전두환을 향해 명패를 집어 던지는 노무현 모습은 많은 국민에게 강렬히 다가갔다. 이 모습은 이후 보수언론에서 '다혈질 정치인'으로 입에 올리기 좋은 거리가 되기도 했다.

- 전두환과 김영삼과 노무현 -

1992년 3월 24일 제14대 총선. 세 사람은 묘한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이들을 묶는 매개는 허삼수(78)다. 허화평·허문도와 함께 '삼 허'로 불리며 전두환 최측근이었던 허삼수는 5공화국 초반 권부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노태우 정권 때 재기를 노렸다. 전두환으로서는 이랬든 저랬든 12·12쿠데타와 5공 정권 초석을 다진 부하가 정치권 중심에 있다면 괜찮은 보험이 될 노릇이었다.

허삼수는 앞서 1988년 제13대 총선 때 부산 동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당선자는 노무현이었다.

4년 후 리턴매치가 벌어진 것이다. 이때는 상황이 달라도 많이 달랐다. 이때 노무현은 김대중이 이끌던 민주당 후보로 재선을 노렸다. 하지만 김영삼은 그대로 둘 수 없었다. 3당 합당 당위성을 인정받기 위해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압승해야만 했다. 가장 신경 쓰이는 지역구 가운데 한 곳이 허삼수-노무현이 맞붙은 곳이었다.

김영삼은 지원유세를 위해 부산을 찾았다. 4년 전 통일민주당 총재 시절 노무현 당선을 위해서는 이렇게 말했던 터였다.

"허삼수는 반란의 총잡이다. 국회가 아닌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

하지만 민자당 총재로 허삼수를 당선시켜야 할 때는 이렇게 말했다.

"허삼수는 충직한 군인이다. 뽑아주시면 중히 쓰겠다.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시기 위해서라도 허삼수를 뽑아달라."

노무현은 득표율 32.25%에 그치며 63.55%의 허삼수에게 완패했다. 하지만 노무현은 이때부터 지역주의 타파에 대한 갈망을 느꼈고, 그것은 곧 훗날 대권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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