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포카라 거리에서

보름 만에 돌아온 휴양도시 포카라. 아침거리를 천천히 걷는다. 포카라 호수 너머 설산이 아득하다. 설산 속에서 헤맨 그 기억이, 마치 점심을 먹고 해 잘 드는 의자에 앉아 꾸벅 졸면서 꾼 꿈인 것만 같다. 5년 전 아프리카에 다녀왔을 때도 그랬다. 분명히 현실이지만, 어딘가 비현실적이고 낯설고 아득한 이 느낌. 지난 여행길을 통해 변한 것은 무엇일까, 변하지 않은 것은 또 무엇일까. 온갖 기억과 감정으로 눈이 아득해지는 한낮 포카라. 문득 뒤돌아보니 거리에는 여전한 삶들이 묵묵히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해발 2010m 까사 마을, 안개 자욱한 계곡, 아침이다. 토마토, 양파를 곁들인 토스트로 배를 채운다. 주방에서는 앳된 여자 아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을 시작한다. 어젯밤 숙소 앞에서 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눈 네팔인 수학교사가 저 멀리 밭두렁을 걸어 학교로 가는 게 보인다. 한 무리 트래커들이 산을 오르고 있다. 우리가 내려온 길을 따라 그들이 올라간다. 며칠 전에 지나온 좀솜(해발 2720m)까지 가는 길이리라. 오전 9시가 넘었지만 안개는 걷힐 기미가 없다. 숙소 식당 조그만 냉장고가 힘겹게 냉각기를 돌린다. 일상은 어디서나 이렇게 시작된다. 삶은 어디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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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사(해발 2010미터) 마을, 안개 낀 계곡.

나는 봄을 보고 있다. 봄이 나에게 다가오는 게 아니라 내가 봄을 향해 걸어간다. 산 아래로 내려갈수록 연두에서 초록으로 봄이 짙어진다. 깎아지른 절벽산과 이곳 사람들의 일상, 그 너머로 이제 설산은 사라지고 없다. 길가에는 보리가 팼다. 어제는 밭에 감자를 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오늘 본 감자밭에 푸른 잎이 성성하다. 저기 바나나 나무도 열매를 매달고 우뚝 서 있다. 순식간에 아열대다. 겨우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이 급격한 기후변화를 몸이 따라가지 못한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 어제는 일부러 샤워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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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사(해발 2010미터)에서 따또빠니(해발 1200미터)로 가는 길, 절벽산을 깎아 만든 길.

길은 꾸준히 내리막길. 절벽산 허리를 깎아 만든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걷는다. 그 끝자락에 따또빠니(해발 1200m)가 나타난다. 따또는 네팔어로 따뜻하다는 뜻이고, 빠니는 물이란 말이다. 결국 따뜻한 물이란 뜻인데, 실제로 이곳에 노천 온천이 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가벼운 차림으로 온천에 향해 나선다. 숙소 너른 정원에 귤나무가 가득하다. 조악하다 싶게 꾸민, 커다란 노천 욕조, 그 안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입장료를 내고 온천에 몸을 담근다. 수온은 30도 전후인데 딱히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이런 호사가 오랜만이라 몸은 더없이 편안하다. 병맥주를 한 병 시킨다. 주위는 온통 절벽산, 한 손에 맥주를 들고 노천 온천에 앉아 눈을 감는다. 아, 이대로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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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사(해발 2010미터)에서 따또빠니(해발 1200미터)로 가는 길, 푸른 봄.

따또빠니부터는 교통편을 타고 네팔 휴양도시 포카라까지 가기로 한다. 일행인 영실이 몸 상태가 조금 심각해 보여서다. 토롱 라 고래를 넘는 날 가볍게 동상에 걸렸었는데 그게 가벼운 게 아니었다. 영실이 발가락이 검게 죽어가고 있다. 우선 따또빠니에서 베니까지는 로컬버스를 타야 한다. 힌두교 풍 장식으로 치장한 작은 버스에는 현지인과 여행객과 흙 먼지로 가득하다. 버스 스피커에서는 기사가 틀어놓은 인도 대중가요가 고막을 찢을 기대로 쿵쾅댄다. 험한 길을 달리느라 미칠 듯이 흔들리는 버스와 그 음악이 묘하게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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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또빠니 노천 온천.

도로는 아찔한 외길,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건 길이 아니라 낭떠러지다. 아, 저 까마득한 계곡, 차라리 눈을 감고 만다. 두 시간 만에 베니에 도착한다. 영실·호섭 부부와 점심을 먹으며 베니에서 어떻게 포카라로 갈 것인지 의논한다. 안나푸르나 일주는 대체로 이곳 베니에서 끝난다. 버스, 지프, 택시 등 다양한 교통수단이 트래커들을 포카라로 실어 나른다. 우리는 택시를 선택한다. 그렇게 도착한 포카라는 초여름이다. 처음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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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 마을 버스 정류장.

포카라에서 외국인들이 주로 머무는 레이스사이드 지역에 숙소를 잡았다. 짐 정리를 하고 빨래도 하고 한결 느슨해진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일주일 전에 헤어진 일행들을 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험한 여정을 함께 했기에 반가운 마음이 더하다. 우리를 많이 도와준 네팔인 베테랑 포터(짐꾼) 미스터 림부도 그들과 함께였다. 그는 다음날 다시 안나푸르나로 떠난다고 한다.

올해 40살인 미스터 림부는 자녀를 셋 둔 가장이다. 스무 살에 시작한 포터 일이 어느새 20년이 가까웠다. 림부는 히말라야 산속 부족 출신이다. 많은 가족을 제대로 먹여 살리려면 포터 말고 다른 일은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석 달 전 히말라야 석청 사업도 시작했다. 석청은 깊은 산 절벽이 바위에 있는 벌집에서 나오는 꿀이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네팔산 석청이 꽤 유명해졌다. 미스터 림부는 포터 일을 2, 3년만 더 하다 그만둘 예정이다. 나이가 들면서 힘도 부치고 일도 줄어들고 있어서다. 그는 요즘 틈틈이 한국어 공부도 하고 있다. 최근 한국인들이 히말라야 석청을 많이 사가기 때문이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숙소 커튼을 젖히니 포카라 상징인 페와 호수가 보인다. 호수 건너편 산 정상에 하얀 샨티 스투파가 우뚝하다. 일본인들이 세웠다는 평화기원탑이다. 딱히 할 일이 없어 멍하니 침대에 앉아 탑을 보다가 호수로 산책하러 나간다. 조금은 쌀쌀한 호숫가, 아직 인적이 없다. 저 멀리 마차푸차레를 비롯한 히말라야 연봉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포카라 주민의 일상은 이미 분주하다. 이빨을 닦고, 세차를 하고, 어제저녁 미처 치우지 못한 테이블과 바닥을 청소한다. 어딜 가든 도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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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페와 호수 건너편으로 보이는 히말라야 연봉들.

샤워를 하고 나자 아침 햇볕은 어느새 창밑까지 다가와 있다. 빌린 침낭을 반납하러 등산용품 가게에 들른다. 오랜만에 만난 가게 주인 케이시(KC·40)는 여전한 웃음으로 반겼다. 그와 차를 나누며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스무 살에 결혼을 했는데, 일 년 후 딸이 태어났다. 돈을 벌어야 했지만 역시 깊은 산 속에서 할 일이라고는 여행객들의 짐꾼이 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도 포터 일을 시작했다. 첫 손님은 프랑스 사람이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찍고 오는 코스였는데 하루에 100네팔루피를 받았단다. 지금 환율로 계산하면 우리 돈 100원 정도다. 지금은 포터 하루 일당이 15~20달러로 우리 돈 2만 원 전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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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라 시내.

그렇게 돈을 모아 2002년 지금 자리에 등산용품점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사 경험이 없어서 물건을 파는 게 아주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보기에 그는 장사 수완이 아주 좋다. KC네 가게엔 항상 손님이 많다. 성실하고 똑똑한 그는 이곳 포카라에 제법 잘 정착한 포터 출신 사장이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그가 문득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 이틀 뒤 저녁이다.

숙소 근처 한국식당에서 맥주 한잔 홀짝이며 책을 읽는데 갑자기 영실·호섭 부부가 나타난다. 종일 푹 쉬고 저녁을 먹으러 왔단다. 처음 포카라에 도착했을 때보다 한결 편안한 모습들이어서 안심이 된다. 우리는 네팔 전통술인 창을 함께 마시고 헤어진다. 즐거운 술자리여서 제법 많이 마시고 말았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다음 날 아침 7시, 어제 낮에 봐둔 빵집을 찾았다. 레이크사이드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판다는 곳이다. 어제 물었을 때는 오전 6시 30분에 문을 연다고 했다. 7시 정도면 싱싱한 빵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미 대부분 빵이 팔리고 없다. 간단한 빵 몇 개를 사들고 오는 길, 지난밤 화려하던 레이크사이드 거리가 휑하니 왠지 쓸쓸해 보인다. 숙소 근처 네팔인들이 다니는 식당만이 문을 활짝 열고 활기찬 음악을 내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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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라 대형 마트에 진열된 한국 라면.

아침을 먹고 아무렇게나 동네 뒷골목을 들어선다. 놀랍게도 그동안 보지 못했던 넓은 길이 나타난다. 외국인 관광객만 가득한 레이크사이드에는 없는 포카라 사람들의 일상이 여기에 있었다. 조그맣고 허름한 식당에서 짜이(인도식 밀크티) 한 잔을 시키고 밖을 바라본다. 이웃집 할머니가 대문을 나오다 문득 나를 발견하더니 나마스테 인사를 한다. 나도 같이 합장을 한다. 식당 앞으로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차가 지나가고,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축구공을 손에 쥔 남자 아이가 지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은 소가 느릿느릿 그 풍경 속으로 지나온다. 나마스테, 나는 그 소를 향해 공손히 합장한다.

오후엔 영실·호섭 부부를 데리고 병원에 찾는다. 동상에 걸린 영실이 발가락 때문이다. 다행히 크게 잘못되진 않았다. 처방전대로 연고를 하나 사고 돌아오는 길에 눈여겨 봐둔 큰 마트를 구경한다. 우리나라 여느 마트처럼 깔끔한 진열대엔 온갖 상품들이 놓여 있다. 무엇보다 진열대에 농심 과자와 라면이 잔뜩 있어 놀랐는데, 살펴보니 모두 중국 상해 공장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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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 출신 등산용품점 사장, 케이시(KC).

다음 날 저녁 약속대로 KC 집으로 찾아간다. 지은 지 석 달도 안 됐다는 그의 4층 집은 깔끔한 구조와 실내장식으로 아주 현대적인 느낌이다. 케이시가 직접 설계했단다. 와이파이를 설치하고 태양열 발전기를 달면 집이 완벽해진다고 말하는 그에게 나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저녁은 대학에 다닌다는 그의 딸이 만들고 있다. 주 메뉴는 달밧이다. 네팔식 백반인데, 밥에다 채소 커리를 얹어 먹는다. 네팔 사람들은 맨손으로 밥을 먹는다. 나도 따라서 먹어본다. 뭔가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가 나에게 조그만 생선구이를 권한다. 페와 호수에서 잡은 것인데 이곳에서는 아주 귀한 음식이란다. 그 마음이 고마워 나는 합장으로 답례한다.

맥주까지 한 잔 곁들인 후 집을 나선다. 길은 이미 캄캄한 어둠. 더듬더듬 숙소로 돌아간다. 여기 네팔 사람들도 그들 나름으로 잘 살고 있구나 싶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 가난한 나라라는 잣대로 네팔을 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돌이켜보면 지난 여행길에서 만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 잘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잘 살아가는 일만 남은 셈이다. 이렇게 외부를 향한 여행은 결국 내면을 향한 여행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는, 깊고 깊은 포카라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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