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하듯 사회운동 해야죠"

어느 경비 아저씨가 분신을 시도했다. 한 달 여 만에 숨을 거뒀다. 아파트 주민의 모욕적인 언행 탓이었다고 한다.

유통기간 지난 음식을 인심 쓰듯 건네고, '어이 경비'라고 부르고,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언·폭행하고…. 경비 아저씨를 대하는 2014년 우리네 모습이다. 

조선시대 '형평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다. 진주가 발원지였다. 멸시받던 백정이 벌인 차별 철폐 운동이었다. 이제 백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그렇다. 남자와 여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몸이 자유로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차별은 여전하다.

지난 1992년 진주에서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다. 차별과 편견을 없애고 평등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권춘현(51·진주시 평거동) 씨는 이곳에서 사무국장·운영위원장 등을 지내다 지금은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 그가 하는 일, 그리고 현재 모습은 지난 삶의 궤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의지대로 하지 못한 선택들

권춘현 씨는 함양에서 태어나 8살 때부터 진주에서 지냈다. 어릴 때 말썽꾸러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머니가 "춘현이 같은 아이는 열 명도 키우겠다"고 자주 말했다.

"특별한 꿈은 없었습니다. 그냥 초등학교 때부터 혼자 다니며 사색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말도 별로 없고 외톨이처럼 지냈죠. 어머니께서 이런저런 부업을 하셨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현실을 알고 많이 도와드리려 했습니다. 용돈도 또래 반 정도 밖에 못 받았지만 얼마든지 버텼지요. 주위로부터 '법 없이도 살 아이'라는 말도 종종 들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 들어가서는 공부도 곧잘했다. 특히 사회 과목에 흥미가 있었다. 고등학교 진학 무렵 이미 정신적으로 성숙해 있었다. 학교 선택도 스스로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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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춘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남석형 기자

"당시 공부 좀 한다 하면 모두 진주고등학교로 갔죠. 저는 거창고등학교에 마음이 갔습니다. 자유로운 학교 분위기가 저한테 맞을 것 같았거든요. 부모님·선생님 모두 반대했죠. 결국 어머니를 위해 진주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고교시절 내내 그 선택에 대한 응어리가 있었죠. 서울대반이 존재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혼나는 분위기…. 그러한 교육제도에 대한 불만 같은 것이었습니다. 학교 뒷산에 가서 고함이라도 질러야 마음이 좀 홀가분해지고 그랬습니다." 

그는 큰형 영향을 받아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주변은 또다시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교대를 가겠다고 하니 선생님이 가타부타 말도 없이 뺨부터 때리는 겁니다. 학교 처지에서는 일반 대학교에 한두 명 더 넣는 게 우선이었겠죠. 그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결국 경상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죠."

이러한 사회에 대한 순응이었을까, 아니면 반항이었을까. 그는 사법시험에 반드시 붙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준비할 무렵,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인쇄소 운영, 신문사 경영도 사회운동"

그는 책에 파묻히고 싶었다. 서울 교보문고에 가기 위해 고속버스에 올랐다.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가 우연히 옆좌석에 앉았다. 서울 가는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회학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래서 아예 사회학과로 전과까지 했다. 금서도 접하고 야학교사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대학 1학년 끝나갈 1982년 말,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자 했다. '주관과 객관'이라는 학회지를 만들고 편집장을 맡았다. 

20여 명이 모여 '넝쿨'이라는 학습 모임도 조직했다. 여기 출신이 나중에 학생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런 힘들이 모여 제법 단단한 조직이 됐다. 애초 음지에서 활동하다 바깥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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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춘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남석형 기자

"집 앞에 형사가 늘 대기하며 저를 감시했죠. 어머니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아는 선배라며 인사시켜 드리고 그랬습니다. 나라에서는 공직에 있는 형님들을 통해 저를 압박했습니다. 그래도 형님들은 저를 이해해 주는 편이었습니다. 자기들 승진에 지장이 있는데도 말이죠. 옥살이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붙잡혀가면서 어머니도 아시게 됐어요. 제 뜻을 굽히지 않고 설득하자 어머니도 저를 믿어주셨습니다."

그는 대학을 가까스로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을 계획했다. 학생운동을 이어가기 위한 이유가 컸다. 대학원 합격증이 집에 오자, 모친은 덩실덩실 춤을 췄다. 동네잔치까지 열었다. 바라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줄 알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 크게 실망한 건 당연했다. 이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는 대학원에 바로 진학하지 못했다. 그럴만한 형편이 못됐다. 입대를 선택했다. 그 안에서도 자신이 할 역할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1987년 대선 때였습니다. 우리 부대원들이 완전무장해 출동할 준비를 했습니다. 화염방사기까지 지급됐어요. 제2 광주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이야기가 들렸어요. 그런데 저는 입대 전 전력이 있어서 배제하더군요. 다행히 실제 부대원들이 투입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소문대로 일이 벌어지면 제가 어떻게 할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지요. 군대에서도 뜻 맞는 사람 몇몇과 느슨한 조직을 만들고 있었거든요."

제대 후 그는 시민사회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진주YMCA 시민사회위원, 진주민주청년회 초대 회장 등을 맡았다. 

그리고 도서출판 '형평' 편집장, <진주신문> 창간 멤버로 활동했고, 이후 인쇄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2002년에는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2위로 낙선했다. 산청에서 한동안 농장을 운영하다 2006년 다시 <진주신문> 대표이사를 맡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사회운동'과 떨어져 있지 않다.

"인쇄소 운영할 때 경찰들이 들이닥쳐 문초를 당했습니다. 선거 앞두고 간첩단 사건을 만들려 했던 것 같습니다. 공무원 형님, 신문기자 친구들이 뛰어다녀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진주신문 맡았을 때도 저는 또 다른 사회운동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2년 여 간 <진주신문> 대표이사를 지내고 나서는 교육 현실에 눈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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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춘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남석형 기자

형평운동은 곧 인권운동

그는 참교육학부모회 진주지회·경남지회에서 간디학교 살리기, 대학입시 개선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학교운영위원회, 평거동 주민자치위원회 활동 등 구석구석 주어진 역할을 마다 하지 않았다. 이때 학생인권에 많은 관심을 둘 수 있었다. 이는 곧 차별철폐라는 형평운동과도 맥이 닿는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 방향이 2003년경부터 변화했죠. 이전까지 기념사업 중심이었다면 이후부터는 인권실천으로 더 나아간 거죠. 이때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했습니다. 형평운동이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지만, 많은 걸 포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적 약자라 할 수 있는 학생·이주노동자·장애인 인권을 같이 고민하고 힘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적으로 학교 내 장애인인권운동이 전개됐다. 어느 날 울면서 전화한 어느 학부모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휠체어 타는 자녀가 들어갈 초등학교가 없다는 겁니다. 다들 시설이 안 돼 있다며 거부한 거죠. 이전 백정들이 학교 입학을 거부당했습니다. 그에 맞서 야학을 만들고, 학교 입학 운동을 했습니다. 시대가 흘렀는데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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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춘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남석형 기자

형평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이를 공론화했다. 직접 실태조사하고, 관련시설 예산 편성에 공을 들이며 일정부분 성과를 거뒀다.

2012년에는 인권조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진주시장은 시민의 인권 보장·증진을 위한 인권정책 기본계획을 5년마다 수립·시행하며 매년 기본계획에 따른 연도별 시행계획을 수립·평가하고, 이를 위한 인권전담부서를 신설하도록 한다'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잘 다듬어진 내용이지만 시장 의지에 따라 좌우될 여지가 많다. 이 때문에 '시장 소환' 등 이를 강제화할 방안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그는 형평운동을 곧 교육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인권 관련 박물관·연구소도 있습니다. 우리도 형평운동가 강상호 묘 중심으로 역사관·공원을 만들어 교육의 장을 마련하자는 것입니다. 공원 수립계획은 세워져 있는데, 예산 집행에서 자꾸 뒤로 밀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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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춘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남석형 기자

지금 돈 벌려고 사업하는 이유

그는 두 살 밑 아내, 그리고 음악하는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유치원 교사였던 아내와는 3년 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연애할 때 헤어지려고 마음먹었죠. '나는 사회운동할 사람이다. 돈도 못 벌고 감옥에나 갈 사람이다'라며 제가 먼저 이별 이야길 꺼냈습니다. 아내도 받아들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산청에서 만나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오는데 택시와 부딪히는 사고가 난 겁니다. 병원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을 때 제가 그랬죠. '운명인 것 같다. 그냥 살자'고 말이죠."

반지 하나씩 주고받은 채 단칸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늘 바깥을 떠돌았기에 집안 경제는 아내 몫이었다. 거기다 대체에너지 사업을 계획했다가 사기까지 당하는 사고(?)를 쳤다. 경제적·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내는 '당신 몸만 성하면 된다'고 했다. 평생 아내에게 감사하며 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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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현재 '유한회사 춘염원'을 아내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전통염색 기법으로 만든 베개·손수건·이불 같은 것을 판매한다. 또 전통염색 체험장과 허브농장을 운영한다. 최근에는 천연염색 전용세제 판매에도 나섰다. 벌여 놓은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제 강점기 때 가족 모두 독립운동가인 집안이 있었습니다. 재산이 많았는데 형제 모두 동의해서 독립운동에 썼지요. 지금 제가 돈 벌려는 목적도 그렇습니다. 독립운동하듯 온몸을 던져 사회운동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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