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꾸리는 '범상치 않은' 한의원

"범상치 않은 분들인 것 같다." 인중천지일한의원을 운영하는 부부를 인터뷰이로 추천한 독자의 말이었다. 거기에다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라는 이름에 궁금증은 더 커졌다.

창원시 의창구 신월동 도로변에 있는 인중천지일한의원에 찾아갔을 때 먼저 눈에 띈 건 입구 옆 유리창에 붙어 있던 예약진료 안내문이었다. '하루 전 예약하시면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진료받으실 수 있습니다.'

예약한 환자가 없다는 시간에 맞추어 도착한 한의원은 차분하고 아늑했다. 대화를 위해 온전히 비워진 시간 동안 우리는 느리게 얘기를 나누었다.

아내인 이상미(42) 원장은 진료를 맡고 있고 남편인 김창호(46) 이사는 한의원의 사무를 맡고 있다. 원래는 다른 직원도 있었지만 2014년 1월 1일부터 부부 둘만의 힘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이 원장을 통해 들었다. 김 이사는 한의원 인터뷰의 주인공은 원장이 아니겠느냐며 말을 아꼈다. 이 원장은 이런 남편에게 먼저 반했었다고 했다. 먼저 두 사람이 만나기 전 과거부터 훑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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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천지일한의원 이상미 원장·김창호 이사./서정인 기자

전산학과, 민요, 명상수련, 한의학-이상미 원장

이 원장의 취향은 어릴 적부터 확실했다. 가요보다 살풀이 음악에 더 신이나 춤을 췄고 한국적·민족적인 것에는 무엇이든 관심이 갔다고 했다.

"부산에 살았었어요. 대학에 갔는데 성적에 맞춰서 전산학과에 들어갔죠. 부산대에 다녔는데 워낙 한국적인 것에 관심이 많아서 '전통예술연구회'라는 동아리에서 춤추고 노래도 하고 악기 연주도 하다가 졸업할 때쯤 진로 고민을 다시 하게 되었어요."

성적에 맞춰 선택한 과는 평생 할 분야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노래 쪽에 관심이 있었던지라 부산 '민요연구회'에서 민요 공부를 하고 과외로 돈도 벌며 지내던 중 이 원장은 한의사라는 직업에 관심을 두게 된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책이 계기였다고 했다.

"도올 김용옥 선생 책을 보다가 관심이 생겼는데. 뭔가 많은 느낌이 함께 왔어요. 어릴 때 이 학문을 알았으면 내 인생이 달랐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굉장히 한국적인 직업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한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죠."

이 원장은 한의학이 사람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일이며 한의사가 되면 동경했던 '참나'에 대한 고민을 매일 하며 환자들을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 무렵 이 원장은 누군가가 건넨 책을 통해 명상수련을 접하게 된다. 우연히 시작한 명상수련은 이 원장과 아주 잘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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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천지일한의원 이상미 원장./서정인 기자

"처음에는 책을 따라서 하다가 다른 사람보다 몸과 마음에 반응이 빨리 와서 수련센터로 갔어요. 센터 안에 '나와 민족과 인류를 위하여'라는 말이 붙여져 있더라고요. 한의사가 되고자 했던 이유와 비슷했던 것 같아요. 한의대는 6년이잖아요. 이 길로 가면 굳이 한의대 안 가도 되겠다 싶었어요.(웃음) 그래서 한의대 특차 넣어둔 상태에서 면접 보는 날 안 갔죠."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회원들을 지도하게 되었다. 그만큼 습득 속도가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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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천지일한의원 이상미 원장./서정인 기자

연탄가스 중독, 공무원 지망생, 명상수련-김창호 이사

김 이사는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아들이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갓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한 3월. 사고가 예고 없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다니려고 구한 자취방이 새로 단장을 했어요. 근데 시멘트 이런 게 안 말랐는데 연탄을 피운 거예요.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서 화장실 가던 중에 '쿵'하고 쓰러졌죠."

이틀 동안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보니 할머니가 온몸을 주무르고 있었다.

"병원에 갈 새도 없이 회생 불가능한 상태였데요. 거의 죽은 목숨이었는데 할머니가 절 깨우셨죠. 식초물로 계속 주무르시면서요. 할머니 기도가, 손자를 살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저를 살린 거죠."

살아나기는 했지만 후유증이 남았다.

"사고 전에는 공부하면 원하는 만큼 성적도 나왔는데 그 뒤로 기억력이 '제로'가 되어버린 느낌이었어요. 돌아서면 기억이 안 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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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천지일한의원 이상미 원장·김창호 이사./서정인 기자

어린 나이에 큰 고비를 넘긴 김 이사는 보이지 않는 쪽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했다. 이 원장과 같은 수련을 하며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다친 기억력을 이해력으로 커버하고 공부도 꾸준히 했다. 부산대학교에 입학해 공대에 다니면서 가족들이 원하는 공무원 기술직 시험을 준비했다.

"근데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어떤 것을 추구하며 살지 늘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들이마시는 공기는 다 연결되어 있잖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다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어요. '홍익인간(弘益人間)'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이 말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았죠. 그렇게 수련을 하다가 군대 가서는 기억력을 회복했는데 제대하고 나서 센터에서 아내를 만났죠.(웃음)"

한마디에 반했다

이 원장은 14살부터 독신주의자였다고 했다. 그런 이 원장의 오랜 생각은 같은 이상을 가진 사람을 만나자 생각보다 쉽게(?) 무너졌다. 정신지도자의 길을 가리라고 마음먹고 한창 수련하며 센터에서 지도를 하던 때 김 이사를 만났다.

"제가 26살 때였을 거예요. 이분이 저희 센터에서 수련을 하셔서 제가 지도자로서 상담을 하고 그랬죠."

이 원장은 굉장히 의욕적으로 센터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조금 공허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랬던 그때 마주한 김 이사의 한 마디는 그 어떤 책이나 가르침보다 깊은 울림이 있었다고.

"이 분(옆에 앉아있는 김 이사를 바라보며)과 상담을 하다가 인생의 목적이 뭐냐고 제가 물었어요. 그러니까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군대 가기 전에 이미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가 제 삶의 목적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당시 이분이 말하는 그 뜻을 정확히는 잘 몰랐지만 당시 저한테는 그게 '답'이었어요. 나의 범위가 내 몸까지 인가. 내 가족까지 인가. 사회냐. 우주냐. 모든 것을 위해 살면 '참나'의 즐거움이 온다는 그 뜻을 느꼈던 것 같아요. 삶의 목적이 보통 남자들이랑 다른 거예요. 남자들은 남녀 관계로만 접근이 되었고 친구들과 인생에 대해 얘기는 해도 명쾌한 답은 들은 적이 없어요. 그때 '아 이분이 나에게 답을 주시네.'라는 생각이 들었죠."

당시 하던 수련을 같이하자고 하는 게 그 사람을 가장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이 원장은 공무원 준비 중이었던 김 이사를 적극적으로 끌었다.

"원하는 삶의 방향은 정신적인 것에 향해 있는데 왜 공무원 준비를 하느냐고 했어요. 부모님 기대에 맞추려는 게 커 보였어요. 그래서 확실히 끌었죠. 이 길로 오시라고요. 지금 생각하니 거기 사심도 더해졌던 것 같아요.(웃음)"

그렇게 닿은 인연으로 결혼한 부부는 세 아들을 키우고 있다. 부산에서 살던 두 사람은 결혼 후 김 이사의 고향인 함안에서 아이를 낳고 분가해 창원으로 왔다고 했다. 전환기였다. 삶터가 바뀌고 가족이 늘었고 직업도 바뀌었다.

"고등학교 졸업 전부터 용돈 벌이로 했던 과외를 아이가 100일도 되기 전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일 중독이었죠. 새벽부터 밤까지 수업을 하니까 돈도 많이 벌고 학생들 가르치는 것도 좋고 보람 있었어요."

하지만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자 과외 때문에 불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그때 잠시 놓았던 한의학을 다시 찾게 된다.

"저녁에도 과외를 하면 밤낮이 뒤바뀌니까 생활에 걸림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마음을 먹고 다시 학교 입학해서 공부를 했고 한의사가 되었죠."

예약하지 않은 환자는 돌려보낸다

인중천지일한의원이 문을 연 지는 4년 2개월. 원래는 여느 한의원처럼 운영했지만 지금은 30분에 환자 1명 정도로 시간을 정하고 시간대별로 예약을 받는다. 당일 예약도 가능하긴 하지만 최소 하루 전 예약을 권한다.

처음에는 거의 모든 생활을 환자에게 맞췄었다고 했다. 환자 수가 2배로 늘었고 신이 나서 한의원 일에만 몰두했다.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24시간 동안 한의원 전화를 핸드폰으로 연결해서 전화도 받고 일요일에 진료하기도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좀 지치고 모든 환자에게 온 힘을 다하는 게 좀 벅찼어요. 쫓기듯 바쁘게 진료하고 나면 내가 미흡하게 진료했다는 생각에 힘들었어요. 제가 더블데이트도 안 좋아하거든요.(웃음)"

예약제를 처음 시작했을 때 환자들이 한의원을 방문했다가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예약제를 완전히 정착하기로 마음먹고 예약하지 않은 환자를 돌려보내는 경우가 생길 때 두 가지 걱정이 생기더라고요. 일단 돈을 많이 못 벌 것 같아서요.(웃음) 그리고 '내가 뭐 얼마나 잘났기에 이렇게까지 하나?' 이런 죄책감이요."

첫 번째 걱정은 어쩔 수 없었다. 하루에 벌 수 있는 돈을 스스로 한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존경하는 스승님이 늘 말씀하셨어요. 상담을 잘해야 하고 침 너무 자주 놓지 말고 한약 너무 오래 쓰지 말고 맥을 자주 짚으라고요. 그렇게 하면서 예약제를 하니까 매출이 1/3로 뚝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도 심하게 걱정되지는 않아요. 덜 쓰면 된다고 생각해요. 20년 전 과외 할 때 150~200만 원을 벌었으니 원하면 노력하는 만큼 돈을 많이 벌 수 있었어요. 그때도 행복하긴 했지만 필요한 돈보다 많이 쌓이면 재테크를 한다든지 땅을 산다든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고 본업에 집중을 못 하게 되더라고요. 고민이 또 생기는 거죠. 이제 그런 생각들이 없어요. 꼭 필요한 만큼은 있으니까요."

스스로 뭐가 잘났기에? 라는 생각이 들었던 두 번째 걱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모든 이유가 환자의 '치료율'을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최소한 하루 전에 예약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한의사도 환자를 더 알고 마음 편히 기다릴 준비가 필요해서라고 했다.

환자의 생명력에 기대 치료한다

인터뷰 중 '생명력'이라는 말이 계속 이 원장의 입에 올랐다.

"가장 좋은 약은 생명력이에요. 침이나 한약은 생명력을 돋우는 도구라고 생각해요. 진료 시간 동안 환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환자가 가진 생명력에 집중해요."

환자들은 보통 자신의 병이 뭐냐고 물어본다. 그러면 이 원장은 환자가 얼마나 좋지 않은 상태인지 설명하는 것보다 환자가 가진 힘에 대해 설명하고 대화를 통해 환자를 파악하는 것에 더 오래 시간을 들인다. 그렇게 하고 나면 어느덧 환자와는 친구가 되어 있다고 했다.

"학창시절에 선생님께 질문을 하면 답을 바로 해주시지 않고 책을 펴고 한참 동안 다른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처음에는 이해도 안 됐는데 30분 넘게 듣고 있으면 딱 깨우쳐지는 거예요. 바로 답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깊고 정확하게요. '원장님 얼마나 치료해야 하는데요?'라고 물으셔도 '잘 모르겠는데요. 같이 한번 해보죠.' 이렇게 하고 깊게 대화를 나눠요. 환자들은 더 편하고 솔직하다고 생각하세요. 환자가 오시기 하루 전에 환자에 대해 확실히 파악하고 생각하고 고민하고요."

인중천지일학당

한 달에 두 번 토요일 진료를 마치고 나면 인중천지일한의원에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인중천지일학당이 열린다. 아이들에게 이 원장이 직접 한문을 가르친다. 환자들 중 자녀교육에 대해 뜻이 맞는 사람들과 힘을 모아 시작했다.

"예전에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1, 2학년 때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같이 사자성어, 명심보감 같은 것을 가르쳤는데 그게 아이들한테 참 좋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시작하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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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천지일한의원./서정인 기자

수업료는 무료이다. 나이와 수업을 따라가는 속도를 고려해 반을 나누지도 않았다.

"무언가에 돈을 조금이라도 들이면 욕심이 생기고 돈을 내는 사람 욕심에 맞추게 되면 이해력이 떨어지거나 어린 아이들에게 수업을 맞출 수가 없는 거죠. 요즘 아이들이 하는 공부는 너무 힘든 '경쟁'이잖아요. 나무가 같이 크면 더 잘 자라잖아요. 공전·자전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어요. 공부를 같이 하면서 친해져서 큰 아이들은 작은 아이들 멘토가 되고 저는 큰 아이들을 돕고요."

중요한 건 공부가 아니라고 했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장이 되기만 하면 만족한다고 했다.

내내 밝은 표정으로 말을 잇던 이 원장이지만 생각이 많은 듯했다. 한의사로서의 의무감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차분한 표정으로 환자가 쇼크 상태에 빠졌던 일을 말했다.

"과로 상태면 침을 원래 안 놔드리거든요. 그런데 환자가 무리해서 일을 하고 오셨으면서 저한테는 몸 상태가 괜찮다고 하신 거죠. 침을 놓고 좀 있다가 쇼크가 왔는데 급하게 응급실로 달려갔어요. 응급실도 바쁘니까 우리 환자한테만 신경을 못 써서 제가 깰 때까지 온몸을 주물렀죠. 환자가 눈을 떴는데 '원장님 죄송해요.' 이러시더라고요. 그때 마음이… 9명을 살리고 1명을 보내는 것보다 9명을 안 살려도 된다 싶었어요."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이 원장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울컥하는 진심과 아내를 바라보는 김 이사의 눈빛이 내내 기억에 남는다. 참 따뜻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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