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환자와 함께 해온 삶

치매 병동은 인생의 축소판

"영이 할매, 아침 식사는 많이 하셨어요. 자~. 손 한 번 잡고 화이팅~.", "금자 할매 노래 한 번 불러주세요. 잘하는 일본 노래 불러보세요. 하나, 둘, 셋, 넷~."

하루 두 번 진행하는 전체 병실 진료의 첫 번째 회진은 오전 10시. 그 시간 창원시 마산합포구 우산동 시립마산요양병원 4층 병동은 시끌시끌 벅적했다. 401호 6인 병실에서는 인생의 황혼기를 훌쩍 넘기신 할머니들이 그를 반갑게 맞이한다.

김재영(신경과 전문의·44) 진료원장은 혼자 회진을 돈다. 그의 회진 방법은 병원에 부임한 지 6년이 지났지만 변함이 없다. 진료원장 명찰을 단 흰 가운만 입지 않았으면 그가 의사인지 환자 보호자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김 원장은 어머니에게 문안 온 아들처럼 친근하게 손을 잡고 어깨를 어루만지며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묻고 있다. 할머니 환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시콜콜한 꿈 이야기부터 옆 할매 환자가 피곤해서 코를 골며 잤다는 소소한 정보를 그에게 쏟아낸다. 401호 할머니들 사이에는 김 원장을 몰라보는 환자도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환자 앞에서 눈높이를 낮추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짧은 문장으로 대화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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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영 시립마산요양병원 진료원장./박민국 기자

"어머니 제가 누구예요? 김. 재. 영. 어머니 말동무 김. 재. 영. 어머니 소꿉친구 김. 재. 영." 

환자가 고개를 돌려 외면을 해도 그는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고개 돌린 환자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어머니 좋아하는 노래 불러 드릴게요. 눈 감고 들어보세요. 엄마~하고 나~하고.(후략)"

401호 한 병실만 회진을 하는데 30여 분이 훌쩍 넘어간다. 그의 진료는 의학적 치료보다는 닫힌 마음에 인공호흡을 하듯 때로는 자식처럼 친구처럼 말을 건네며 환자와 소통하고 있었다.

"치매 환자 제1치료법은 환자 생각을 상식으로 정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을 바탕으로 환자를 대하면 그 환자들이 따라올 수도 없을 뿐더러 마음 고통만 더 심해지죠. 그래서 저도 회진을 돌 때는 의사가 아닌 친구이자 아들이자 때로는 환자 배우자 역할도 맡죠. 치매 병동은 인생의 작은 축소판입니다. 희, 노, 애, 락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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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영 시립마산요양병원 진료원장./박민국 기자

가난 그리고 두 번 이사, 두 번 도움

김 원장은 1971년 거제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 고향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가 태어나던 해, 페인트 도색을 평생 직업으로 여기셨던 그의 아버지는 부산 영도로 취업을 위해 가족과 함께 이사했다. 비가 오면 하루를 공치는 페인트공 아버지 곁에는 늘 술병이 있었다.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때도 페인트공 가장의 가족들은 고단했다. '달동네'라고 불렸던 부산 영도구 청학동에서 신선동에 있는 중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등교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는 버스 '회수권'을 사달라는 이야기 대신 그냥 걸어다녔다. 삼 남매를 키우고자 신발 공장에 나가셨던 어머니는 그에게 '공부만이 너의 인생을 바꾼다.'라고 강조하셨다.

가난하지만 평범한 청소년 시절을 보내던 그에게 갑작스런 불행이 찾아왔다. 그가 경남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7년 여름,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이다.

"비록 가난한 가족의 가장이셨지만 아버지라는 든든한 후원군이 사라지니 앞이 캄캄하더라고요. 길이 없었습니다. 단칸방에서 다시 단칸방으로. 어머니를 돕고 동생들을 챙길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다고 깨달았죠. 개천에서 용이 안 되면 이무기라도 되어야 한다고 마음먹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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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영 시립마산요양병원 진료원장./박민국 기자

신발 공장과 생선 공장 일을 번갈아 하며 아버지 빈자리를 메워주시던 그의 어머니는 두 번째 이사를 한다. '달동네' 청학동에서 김 원장이 재학 중이던 경남고등학교 근처 대신동 단칸방으로 옮긴 것이다. 참고 서적 하나 사 주지 못하는 김 원장 어머니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학업 대책이었다. 학교 경비 아저씨가 하교를 재촉하면 집으로 돌아왔지만 학업 성과는 눈에 띄게 달라지지 않았다. 과외, 학원은 사치라 여겨도 그 흔한 참고 서적 없이 선생님 강의와 교과서만으로는 큰 능률이 나지 않았다.

"제 인생에 느끼는 두 번의 큰 빚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1학년 학기말에 학교 서무과 선생님의 도움이에요. 학교 앞 서점으로 저를 불러서 필요한 참고 서적을 고르라고 하시는 거예요. '수학 정석', '성문종합영어', '맨투맨 영어' 등 처음으로 참고서를 가지게 되었죠. 제 인생에 기억되는 첫 번째 도움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지켜보며 응원해 준다는 것이 또 하나 공부에 목표가 되었고 학업에 대한 자신감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정 형편을 고려해 포항공대 진학이라는 꿈을 꾸었다. 한 번의 재수 그리고 두 번의 실패는 더는 그의 꿈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에게 선택할 여건은 많지 않았다.

"포항공대 입시에 두 번 실패하고 더는 진학에 매달릴 수만은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전기, 후기로 나눠 대학 입시를 진행했는데 어머니께서 점수에 맞추어 인제대학교 의예과에 넣어보라고 하셨어요. 그러시면서 3만 원을 주시더라고요. 원서 접수를 하려고 인제대학교에 갔는데 전형료가 5만 원인 거에요. 다시 어머니에게 돈을 받으러 갈 수도 없고 입시전형을 포기하려고 하는데 뒤에서 원서 접수하던 경남고 출신 선배가 전형료 2만 원에 차비하고 밥 사먹으라고 2만 원 더 해서 선뜻 4만 원을 주시는 거에요. 영화에나 나올 만한 이야기가 저에게 펼쳐진 거죠. 당시 연락처라도 받아 놓았어야 했는데. 급하게 원서 접수한다고 그만…."

그렇게 그는 두 번의 도움을 받으며 1991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한번은 서무과 선생님, 또 한 번은 일면식도 없는 고등학교 선배, 두 번 다 뜻하지 않은 선의였기에 그는 늘 마음속에 누군가를 돕는 것에 대한 빚을 안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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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영 시립마산요양병원 진료원장./박민국 기자

첫 이성, 첫 데이트 그리고 첫 근무 

그는 인제대 의과대학 의예과 2년 동안 과외지도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 본과 4년을 마치며 수술과는 거리가 있는 내과, 그중에 신경과를 선택했다. 그가 지닌 내성적인 성격도 진로를 선택하는데 한몫을 했다. 그는 대학 모교 병원인 부산 백병원에서 전공의 4년 과정을 수료했다. 힘들게 느껴지던 레지던트 시절 태어나서 처음 사귄 이성 친구는 평생 반려자가 되었다.

"그 시절 가까이 있는 분들이 간호사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죠. 레지던트 1년 차에 처음 데이트를 했습니다. 그 후로는 병원에서 자연스럽게 우정과 애정을 쌓아갔죠. 당시에는 장모님이 결혼에 반대하셨어요. 처음으로 처가에 인사드리려고 마산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에 수박 들고 내렸는데 의사 사위는 격이 안 맞는다고 오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내를 만난 지 1년 6개월 만에 결혼에 성공했고 첫 인삿날 오지 말라고 하셨던 처가에 자주 갑니다. 장모님이 아직도 그때처럼 마산 삼계에서 돼지국밥 집을 하셔서 병원 직원들 회식하는 데 종종 이용합니다. 후후."

그는 32살에 전문의 과정을 마치고 공중보건의사로 군 복무를 대신했다. 첫 근무지는 합천군 쌍백면 보건지소였다. 김 원장은 농촌에서 근무하며 고령화해가는 사회를 보았고 치매에 대한 의학적 학문을 넓혔다.

"보건지소에서 근무하면서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을 많이 만났죠. 당시 약간 치매가 있으시던 동네 어르신을 자식들이 잘 모시겠다고 서울로 모셔간 경우가 있었죠. 그 할머니는 6개월 만에 상태가 심각하게 나빠지셔서 돌아오셨어요. 치매가 예방도 중요하지만 한번 걸리게 되면 최대한 뇌의 퇴화를 늦추는 방법이 환자 눈높이 맞는 관심과 대화라는 것을 그때 근무하면 깨달았죠. 돌이켜보면 군 복무를 대신했던 첫 근무지가 치매 전문 신경과전문의로 생활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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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영 시립마산요양병원 진료원장./박민국 기자

아름다운 인생 갈무리의 동반자

김 원장이 의대에서 신경과를 전공하고 본격적으로 치매 환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금 근무지의 전신인 마산시립치매요양병원 제1대 병원장으로 취임한 2008년 11월 1일이다. 개원과 함께한 병원 역사는 그의 역사이기도 하다. 마산시립치매요양병원은 35실 215병상에 신경과, 내과, 재활의학과, 가정의학과, 한방과 등으로 2008년 진료를 개시했다. 2010년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면서 조례 변경에 의해 지금 명칭인 시립마산요양병원으로 의료기관 명칭을 변경했다.

올해로 개원 6년차를 맞이한 병원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13년 보건복지부로부터 공립치매병원 지정의료기관 선정, 경남지역 최초 요양병원 의료기관 인증을 획득했다. 김 원장과 전 의료 스텝들이 힘을 모아 '의사 1등급, 간호사 1등급' 병원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2014년 10월 치매전문병동 증축 공사를 마치고 의사 9명에 간호 인력 58명 직원 78명이 49실 295병상에 환자를 맞이하기 위한 시스템을 재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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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영 시립마산요양병원 진료원장./박민국 기자

"처음 병원장으로 부임했을 때 병원 앞은 논과 밭이 전부였습니다. 공기가 좋은 농촌 모습이었지요.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고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는 주거 단지가 만들어지고 있지요. 이제 치매요양전문병원으로 재도약할 기회입니다. 치매나 어른들의 요양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예요. 늘 우리 일상 곁에 존재하죠.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하느냐가 관건이지. 환자들이 자연만 보고 느끼며 생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고 있다고 느껴야 하는 것도 중요해요. 이제 병원이 제 위치를 찾아갑니다."

수명 연장과 더불어 증가하는 치매, 그리고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노령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김 원장의 발걸음은 늘 바쁘다. 하루 12시간 병원을 지키며 누군가의 아름다운 인생 갈무리를 위해 오늘도 그의 회진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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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영 시립마산요양병원 진료원장./박민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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