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속 경남-마산 씨름]학년·학교 구분없이 한데 모여 연대훈련 기술 연마하며 자신만의 노하우 익혀

'마산 씨름'은 1960~90년대 모래판을 평정했다. 그 계보는 김성률-이승삼과 이만기-강호동으로 연결된다. 마산 씨름이 오랜 기간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까닭은 뭘까? 걸출한 실력을 지닌 몇몇 선수가 어느 날 갑자기 나왔기 때문일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특별한 뭔가가 있을 것이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즐겼던 것으로 전해지는 우리나라 씨름은 명절 때 힘 좀 쓰는 이들이 모여 각축을 벌였다고 한다. 지역별 대회이던 것이 전국 규모로 열린 것은 1912년이다. 그리고 1927년 조선씨름협회가 만들어지면서 지금과 같은 왼씨름 방식으로 통일됐다. 이북·경상도 지역은 이전부터 왼씨름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1940년대까지 함흥·함주·평양 등 이북 선수들이 각종 대회를 휩쓸었다. 남북이 갈리면서 1950년대부터는 경상도가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중 으뜸은 마산이었다. 1956년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 1958년 해인대학(현 경남대학교) 씨름부가 창단되며 1960년대 초부터 전국 최강을 자랑했다.

마산 씨름을 이야기할 때 이만기·강호동을 퍼뜩 떠올린다. 하지만 그 앞세대인 '학산' 김성률(1948~2004) 장사를 빼놓을 수 없다. 1960년대 마산 씨름은 잠시 침체기에 빠지기도 했다. 이전까지 씨름계를 휩쓸던 모희규(2001년 작고·모제욱 경남대 감독 부친) 같은 장사가 마산을 떠나고, 경남씨름협회를 품에 안은 진주가 기세를 떨쳤다. 이때 김성률 장사가 등장했다.

마산 토박이인 김성률 장사는 마산상고 2학년 때 정식으로 씨름의 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늦게 시작했지만, 어릴 때부터 유도·축구를 해서 몸은 단련돼 있었으며, 머리도 좋아 하나를 가르치면 두세 개를 알아들었다고 한다. 고등부를 평정한 김성률은 이후 1969년 열린 전국대회 3개를 모두 휩쓸 정도로 적수가 없었다.

김성률, 그리고 마산 씨름이 국민에게 확실히 각인된 건 1972년 '제1회 KBS배 전국장사씨름대회'였다. 이전까지 야외 모래판에서 진행되던 것이 서울장충실내체육관으로 옮겨 열렸고, TV 생중계도 최초로 했다. 이 대회에서 마산 김성률 장사가 우승, 정근종 장사가 3위를 차지했으니 국민들 머리에 '씨름 고장 마산'이 제대로 각인된 것은 물론이겠다.

김성률 장사는 197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딱 한 번 체면을 구겼다. 고등학교 2학년 홍현욱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현역 은퇴가 앞당겨지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겐 경남대학교 제자 이만기(51·인제대 교수)가 있었다. 1983년 첫 천하장사대회에서 이만기가 꽃가마에 올랐는데, 결승에서 홍현욱을 무너뜨린 것이다.

22.jpg

하지만 이만기는 훗날 후배 강호동에게 쓰라린 패배를 당하며 '김성률 후예' 타이틀을 넘겨주기도 했다. 1980년대 '뒤집기의 달인'으로 불렸던 이승삼(54·창원시청 감독)은 현역 시절 주로 한라급에서 뛰었기에 천하장사에는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그 한을 얼마 전 창원시청 제자였던 정경진이 풀어주기도 했다.

'씨름 고장' 마산…. 이렇게 자리하기까지 배경을 좀 더 들춰보도록 하자.

임영주(62) 마산문화원장은 이렇게 해석한 바 있다. "1904년 큰 해일 피해를 입고 난 이후 마산에서 성신대제가 매해 열렸습니다. 제를 지내고 나서 씨름대회를 연 기록이 많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마산은 그 이전부터 씨름을 유난히 많이 했습니다. 마산은 고려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조창이었습니다. 곡식을 배에 실어나르려면 힘쓸 장정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래서 씨름을 장려해 힘센 사람을 발굴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때는 생활 씨름이었다. 지금과 같은 기술보다는 기골 장대한 것이 우선이었다. 이에 씨름인들은 "들판 많은 곳보다는 험한 산 있는 곳 사람들이 그러한 체격에 좀 더 가까웠을 것이다. 이북·강원도·경상도 같은 지역"이라고 한다.

실제 씨름은 산과 떨어질 수 없다. 현역에서 은퇴한 선수들은 "산은 쳐다보기도 싫다"고 곧잘 말한다. 씨름인들은 잔걸음으로 산을 타야 한다. 발이 빨라지기 위해서다. 씨름은 큰발 아닌 잔발이 필요한 종목이다. 현재 마산씨름 전용체육관도 무학산 입구인 서원곡에 자리하고 있다.

과거에는 왼씨름·오른씨름·띠씨름·바씨름 등 지역별 다양한 방식이 있었다. 1927년 지금과 같은 왼씨름으로 통일돼 전국대회가 열렸는데, 경상도에서는 이미 여기에 익숙해 있으니 안착하기 좀 더 유리했을 것이다.

씨름인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마산 씨름은 기술 씨름' '기술에서만큼은 최고'.

김성률 장사는 힘뿐 아니라 발기술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여기에 상대방 심리까지 이용했다고 한다. 동시대에 뛰었던 권영식은 몸은 작았지만 다양한 기술로 거구들을 눕혔다고 한다. 씨름의 기본은 들배지기라 할 수 있는데, 천평실은 이 기술에서 최고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술은 각 개인에 머물지 않았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1960~70년대에는 연대훈련이 특히 끈끈했다고 한다. 학년·학교 구분 없이 지역 씨름인이 모두 한곳에 모여 이 사람도 잡아보고 저 사람도 잡아봤다고 한다. 그 속에서 서로 기술을 배우고 가르쳤다고 한다.

씨름인 출신 배희욱(58) 경남도체육회 사무처장은 "다리가 강한 황경수 선배가 '희욱아, 다리 한번 넣어봐라'고 한다. 그렇게 최고 선수한테 다리 넣어보면 대한민국 사람한테 다 해본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훈련문화 속에서 기술이 자연스레 전수됐고, 이만기·강호동의 배지기·들배지기도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기술은 끊임없는 반복이다. 자신의 몸에 가장 맞는 것을 찾는 작업이다. 한번 몸에 익으면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마산 출신 선수들 가운데는 은퇴 후 다시 모래판에 서거나, 노장으로 오랫동안 활약하는 경우가 많은데, 힘은 좀 달리더라도 기술이 남아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마산은 기술씨름으로 '우승 맛'을 한껏 보았다. 그것은 곧 자존심으로 이어졌다. '우승 맛'을 본 이들은 정신력이 나태해지기보다는, 정상을 지키기 위한 쪽으로 향했다. 훈련하지 않으면 불안감이 컸기에 남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어중이떠중이'에게 질 수 없다는 자존심이었다.

여기에 마산만의 근성도 더해졌다. 경남대학교 모제욱 감독은 현역시절 '잡초'로 불렸다. 다른 선수 같으면 이미 쓰러졌을 법한데, 그는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다. 경기에서 지면 자기 분을 못 이겨 눈물을 흘릴 정도로 승부욕이 강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금 이런 걸 느낀다고 한다.

"씨름은 순둥이보다 강한 아이들이 좀 더 나은 것 같아요. 마산에서 씨름하는 사람들이 기질 면에서 누구한테도 안 뒤집니다. 다른 지역에서 온 아이들은 여기보다 확실히 근성 같은 게 부족합니다. 그래서 후천적으로 많이 만들어주려고 노력하죠."

이러한 세월 속에서 초-중-고-대학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이만기 장사 같은 경우 프로에 뛰어든 이후 활짝 꽃피운 경우다. 이는 마산무학초-마산중-마산상고-경남대에서 기본기를 충실히 닦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씨름인들의 생각이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