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마산 부자로 화제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인터뷰 대상자는 안에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마산 사람들에게는 ‘약속 장소’로 기억되는 이곳에서 오래간만에 누군가를 기다려보고 싶었다. 아쉽게도 예전 그 느낌이 진하게 퍼져오지는 않는다. 연말에다 주말 오후인데도 이곳에 서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지나가는 이들이 때로는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는 것 같아 머쓱할 정도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아니 마산 창동에 있는 제과점 코아양과 앞이다. ‘20여 년 전 이곳에는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그가 나타났다. 얼마 전 예기치 않은 유명세를 치른 ‘코아양과 아들’ 조재영(38) 씨다.

“너 TV 드라마 나왔더라” 연락 쇄도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는 19년 전 서랍 속 기억을 일깨우며 2013년 사람들을 열광케 했다. 마산 사람들에게는 지난 11월 방영된 ‘7화-그해 여름’ 편이 특히 그러했다. ‘마산 3대 부자’라 하여 ‘무학소주’ ‘몽고간장’ ‘시민극장’ 아들이 미팅 남으로 등장해 확실한 한방(?)을 보여줬다. ‘코아양과’ 아들도 언급됐는데, 군대 휴가를 얻지 못해 미팅에는 참석 못 한 인물로 설정됐다. 조재영 씨가 실제 그 주인공이다. 그는 드라마 방영 후 주변 사람들로부터 연락받고서는 어리둥절해했다.

“코아양과 직원으로부터 ‘TV 드라마에 왜 나오셨어요’라는 문자를 받았어요. 뭔 얘긴지 몰라 놀랐죠. 이전까지 드라마 ‘응사’를 챙겨보지는 않았기에 본방송은 못 봤죠. 얘길 듣고 다시보기로 뒤늦게 봤는데…. 미팅하는 그 장면이 너무 웃기데요. 재미있어서 한참을 웃었어요. 아주 우스꽝스럽게 표현됐지만, 기분 나쁜 건 전혀 없었어요. 제가 언급되는 게 너무 신기하기도 했고요.” 

그는 드라마 배경인 1994년에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군대는 그 이듬해 갔다. 그런데 우연히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다고 한다.

“극 중 설정과 같이 실제로 비상이 걸려 군대 휴가가 연기된 적이 있어요. 작가가 진짜 내 뒷조사를 했나 싶어 놀라기도 했어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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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아양과 조재영 씨./김구연 기자

드라마 덕에 때 아닌 유명세를 치렀다. 뜸하던 주변 사람들로부터 연락도 많이 받았다. 매장에 와서 이야기 꺼내는 이도 많았다. 손님이 한동안 평소보다 늘기도 했다. 

재영 씨는 마산 부자로 언급된 기업·극장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 시대를 기준으로 봤을 때는 어느 정도 현실성 있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코아양과는…. 그런 것보다는 그 시대 사람들이 퍼뜩 떠올릴 수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았다고 생각해요.”

1982년 개장 이후 마산 대표 빵집으로 

지금 코아양과는 번듯한 하얀색 4층짜리 건물이다. 이는 1990년대 말 리모델링한 것이다. 이전에는 빨간 벽돌로 된 건물이었다.

“함안이 고향인 할아버지가 일본에 자리 잡으시면서 경제적 여유가 좀 있는 편이었죠. 아버지가 할아버지 돈을 빌려 건물을 세우셨어요. 건물 만들어지고 바로 빵집을 하신 건 아니에요. 처음에는 5~6평 정도 여러 개로 나눠 가게 임대를 줬어요. 일종의 백화점 혹은 데파트 같은 형태였죠. 그런데 세 얻은 사람들이 장사 좀 안되면 금방 나가고 하니, 아버지도 골머리를 앓으신 거죠. 그래서 아예 이 건물 전체를 활용해 직접 장사를 하시기로 한 겁니다.”

그렇게 1982년 코아양과가 탄생했다. 그런데 재영 씨 아버지는 이전에 빵과 관련한 일을 한 경험이 없었다. “아버지가 젊을 때 유럽 배낭여행을 가셨어요. 배를 타고 말이죠. 그때 한 끼 식사로 프랑스 빵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맛이 너무 훌륭해서 신선한 충격을 받으셨나 봐요. 그게 머릿속에 한동안 남아있었는데, 마침 건물을 활용하게 되다 보니 제과점을 택하게 된 거죠.”

항간에는 ‘개점하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빵이 동 났다’ ‘제빵 기술자들이 잠 안 오는 약까지 먹어가며 수요를 맞췄다’ 등의 얘기가 떠돈다. 하지만 실제는 개장하고 몇 달간은 장사가 잘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고 한다.“다른 지역에서 제빵 기술자도 모셔오고, 상권도 괜찮았죠. 그래도 자리 잡는 데는 석 달 정도 걸렸다고 들었어요. 아버지가 직접 빵을 만드시지는 않았지만, 일본까지 발품 팔아 재료도 사고, 이것저것 배우는 등 열정을 아끼지 않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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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아양과 조재영 씨./김구연 기자

그렇게 코아양과는 고려당·태극당과 함께 1980년대 마산 대표 빵집으로 자리 잡았다. 코아양과는 옥수수식빵, 고려당은 크로켓(고로케), 태극당은 밀크셰이크가 대표 메뉴였다. 서로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도 않아요. 우리는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우리 장사만 잘하자는 쪽이었어요.”

지금 태극당은 사라지고 고려당은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코아양과 건물 지하에는 ‘코아정’이라는 일본식 분식점도 있었다. 물론 재영 씨 아버지가 함께 운영했다. 코아만두는 당시 파격적으로 비빔만두를 선보이며 대박을 터트렸다. 하지만 몇 년 후 주방장들 간 갈등으로 흐지부지되며 문 내리게 됐다.

오늘날 마산지역은 합성동시외버스터미널, 경남대 인근이 젊은 층 많은 번화가 구실을 한다. 하지만 1980년대는 창동이 마산뿐만 아니라 경남 최고 중심가 중 하나였다. 그러한 창동에서 코아양과는 시민극장·학문당서점과 함께 약속 장소로 많은 이가 발걸음 했다. 

20대 중반에 가업 잇기로 결심

재영 씨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에게 인기 좋았다. 학교에 빵을 가져와 아이들에게 종종 나눠주고는 했다. 요즘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이런저런 얘길 듣는다.

‘생일 초대받아 갔는데, 너희 집 곳곳에 빵이 있는 걸 보고 너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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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아양과 조재영 씨./김구연 기자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에게는 다 주면서 나한테만 빵을 안 줘서 너무 섭섭했다. 내가 그리 밉더냐.’

어릴 적에는 코아양과 건물 위층에 살림집이 있었다. 집 곳곳에 빵이 쌓여있었다. 늘 빵을 접하고 자주 먹었다. 빵으로 학교 도시락을 대신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리 질린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고 한다. 

단지 빵 좋아하던 재영 씨가 부모님 일을 이어받을 결심을 굳힌 것은 스무 살 지나 군대 다녀온 이후다. 

"형제는 저, 그리고 누나 둘입니다. 사실 어릴 적에는 ‘특별히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뚜렷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러다 군 제대 후 일본 과자전문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때까지도 꼭 이쪽 일을 하겠다는 방향이 섰던 건 아니고요. 그냥 요리와 음식 자체가 좋았거든요. 그런데 말이죠, 아버지는 제과점을 하시지만 기술자가 아니라 늘 사람을 써야 했어요. 아버지가 워낙 철두철미한 분이라 우리 집 일이 좀 힘든 편이었어요. 그래서 전국 제빵 기술자들 사이에 그런 얘기가 퍼져 사람 구하기가 더 쉽지 않았죠. 아버지가 그런 점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셔서, 결국 가업을 잇게 된 거죠"

재영 씨는 일본에서 4~5년가량 일을 배웠다. 주방에서 설거지하면서 어깨너머로 제빵 기술을 틈틈이 익히기도 했다. 돌아와서도 일본을 자주 드나들며 연구를 이어갔다. 

그런 시간 속에서 이제 어느 정도 자리 잡았지만, 스스로는 ‘유명 제빵 기술자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코아양과에는 재영 씨 부친·모친이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큰 누나가 매장, 작은 누나가 생산, 재영 씨가 케이크·과자 쪽을 맡고 있다. 둘째 매형까지 상무로 있으니 온 식구가 함께하는 셈이다. 전체 직원 수는 16~17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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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아양과 조재영 씨./김구연 기자

요즘은 대기업 브랜드 빵집이 골목 곳곳에 자리해 경쟁이 만만찮다. 젊은 층은 특히 그러한 브랜드를 많이 찾는다. 하지만 대기업에서 대량으로 생산하기 어려운 메뉴도 많아 코아양과는 그 자존심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인기를 끈 메뉴가 지역에서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지역만이 선호하는 맛·취향·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코아양과는 지금도 일본 업체들과 계속 교류하며 새 제품 개발에 신경 쓰고 있다. 

“지역민 향수 달래는 책임감 크죠”

재영 씨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20대 중반 이후 연애할 시간이 없었다. 판매는 오전 8시부터 밤 11시까지인데, 미리 준비하려면 새벽 4~5시에 출근해야 한다. 그렇게 일과 씨름하는 생활을 10년 가까이했다. 그래서 요즘은 코아양과 일에서 잠시 한 발짝 물러나 있다. 

“사람들은 빵집 일이 이리 힘들다는 걸 잘 모르죠. 20~30대 대부분을 일과 집만 오가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많이 지치더라고요. 지금은 잠깐 아는 분 일식집에 나가 일을 배우고 있어요. 제가 음식·요리 자체를 좋아하거든요. 다른 걸 배워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곧 다시 돌아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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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아양과 조재영 씨./김구연 기자

마산지역 사람들에게 코아양과는 단순한 빵집에 그치지 않는다. 옛 시간을 끄집어내는, 기억의 한 조각이다. 30년 전 아이가 어른이 되어 자녀와 함께 찾는 경우가 많다. 지팡이 짚고 찾는 노인도 많다.

“우리 가족에게는 30년 흔적이 스며있는 곳이죠. 그렇다고 우리 가족만의 공간은 아니죠. 마산에서 지내다 외지로 간 분들이 ‘빵 좀 부쳐달라’는 전화를 많이 하지요. 또한 타지 생활하다 잠깐 마산에 온 분들이 ‘옛 생각이 나더라’며 매장을 찾기도 합니다. 참 고마운 일이죠. 향수를 느껴 찾아오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명맥을 이어가야 하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코아양과는 계속 그렇게 마산 사람들과 함께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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