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메고 조선 백성 살륙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는 임진왜란 때 조선정벌 선봉으로 나선 일본 무장이다.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와 더불어 1진으로 조선에 상륙한 그는 화승총을 앞세운 압도적인 무력으로 조선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우리에겐 당시 집권자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아끼던 장수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그에겐 잘 드러나지 않은 이력이 있다. 바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1584년 '아고스띠뇨'란 세례명을 받고 천주교인이 됐다. 아고스띠뇨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영어로는 어거스틴)를 포르투갈 식으로 부르는 발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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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피디아

고니시는 그래서 조선정벌을 '하느님이 명하신 성전'으로 이름 붙였다. 흡사 십자군을 연상시키듯 깃발도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 문양이었다. 전투가 치러질 때에는 밤마다 진중에서 포르투갈인 종군신부가 집전하는 미사를 올리며 승전을 기원했다. 그가 이끌고 온 침략군 1만 8000여 명 중에도 크리스천이 2000여 명이나 됐기에, 이런 의식은 사기를 고무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반면 성전을 수행하는 일본군에 맞선 조선은 무찔러야 할 사탄으로 묘사됐다. 조선 백성들은 예외 없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도륙됐다.

포르투갈인 예수회 신부인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Historia De Japan)에는 이런 내용이 잘 담겨있다. 그는 절절한 애정을 담아 교인인 고니시를 찬양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고니시와 사사건건 대립하던 가토 키요마사에 대해 "관백(關伯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으로 악랄한 이교도(가토는 불교도)다. 교활하고 책략에 능해 아고스띠뇨의 명예와 전공을 최대한 헐뜯는 위선자"라고 맹공을 퍼붓는다.

일본사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이 책은 객관적인 사서가 아니다. 예수회 신부들이 16세기 일본을, 그들이 보고 들은 내용을 토대로 만든 편년체 기록물이다. 그러다 보니 천주교인과 이교도를 확연하게 가르는 이분법적 시각이 곳곳에 녹아 있다.

고니시는 당연히 성전을 수행한 위대한 인물로 묘사 된다. 예수회 신부들 눈에 참화에 시달리는 조선백성은 없었던 것 같다. 

고니시는 임란이 끝난 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승계한 히데요리 편에 섰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패해 할복을 명받는다. 그러나 자결을 금지하는 천주교인이었던 그는 할복을 거부하고 참수 당한다. 고니시 시신은 천주교 방식으로 매장됐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일본인 실력자이자 독실한 교인이었던 고니시가 죽자 무척 애석해했다고 한다. 

고니시는 원래 약종상(藥種商) 집안에서 장사를 시작한 상인 출신이다. 자주 들르던 우키다 나오이에에 의해 무사로 발탁됐다가, 토요토미 눈에 들어 본격적인 무장으로 성장한다. 가토 등은 이 때문에 늘 고니시를 '약도매상 하던 애송이'라고 깔보곤 했다.

지금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고니시가 어떤 정신세계를 지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독실하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그가 천주교 교리에 신실했다는 건 의심할 바 없다. 침략전쟁을 성전으로, 조선을 사탄으로 인식한 것도 분명하다. 거기다 전통 무가(武家) 출신이 아니라는 '콤플렉스'도 고니시를 고니시답게 만든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가 지닌 '교리적 확신'이 침략전쟁에 도구로 사용됐다는 건 씁쓸하다. 사랑과 평화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침략군 깃발로 변해 조선인들 시쳇더미에 서 있었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고니시는 역사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길게 쭉 뻗은 단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생생한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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