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치료계 '따뜻한 손'과 감동의 작별 선물

3년간 비밀리에 준비한 환송식

지난 2월 20일 창원시 마산합포구 사보이호텔에서는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이현문(56) 삼성창원병원 재활치료팀장의 정년퇴임을 기념하기 위해 후배 동료들이 마련한 자리였다. 병원 측에서 2월 말 공식 퇴임식을 준비했지만, 이와는 별도로 후배들이 지역 물리치료계의 선구자를 떠나보내는 자리를 미리 마련했다. 

이날 행사를 위해 재활치료팀 직원들은 이 팀장 몰래 3년간 월급에서 일정액을 꼬박꼬박 떼서 모았다. 이 팀장에게 10년간 재활치료를 받은 한 작곡가는 퇴임식 소식을 듣고 딸과 아내 등 가족들로 급히 현악 4중주단을 구성해 행사장을 찾아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기도 했다. 동료와 환자가 준비한 행사장에서 이 팀장은 벅찬 감동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 팀장의 뒤를 이어 물리치료사가 된 둘째 아들 경준(28) 씨 역시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만 32년 근무한 삼성창원병원을 지난 2월 28일 퇴임하고 3월 한국국제대 물리치료과 강의전담 교수로 인생 2막을 시작한 이현문 팀장은 지역 물리치료계의 선각자이자 삼성창원병원 역사의 산증인이다.
신경외과 의사인 큰 형의 권유로 물리치료를 전공한 이 팀장이 병원에 첫발을 디딘 것은 지난 1881년 3월 2일. 삼성창원병원의 원년멤버이다.

6.jpg
이현문 전 삼성창원병원 재활치료팀장 퇴임식./삼성창원병원 제공

1981년 16개 진료과 200병상 규모의 마산고려병원으로 문을 연 삼성창원병원은 1995년 마산삼성병원으로 명칭을 변경, 성균관의대 교육병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2010년 성균관대학교와 삼성의료원의 지역거점 대학병원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이러한 삼성창원병원 32년 역사를 이 팀장은 함께 한 것이다.

이 팀장은 병원을 떠나 학교로 자리를 옮기지만, 장남 경빈(31) 씨가 내과 전공의로 삼성창원병원에 근무하고 있고, 둘째 경준 씨도 3월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 병원에서 일하게 돼 이 팀장 가족과 삼성창원병원의 깊은 인연은 여전하다.

물리치료사 단 4명에서 1500명으로

이 팀장이 물리치료사로 지역 의료계에 뛰어들었을 당시, 경남 전체에 물리치료사는 이 팀장을 포함, 4명뿐이었다고 한다.

“창원병원에 1명, 개인병원에 1명, 밀양에 1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현재 경남에 1500명가량의 물리치료사가 일하고 있으니 감개무량합니다. 당시에는 일반인은 물론 병원 관계자조차 물리치료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이 많은 의사들도 잘 몰랐죠. 수술만 잘하면 됐지, 도대체 물리치료로 뭘 할 수 있느냐는 시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물리치료사가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일을 하는지 알리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1.jpg
이현문 전 삼성창원병원 재활치료팀장./삼성창원병원 제공

의사와 환자들은 수술과 치료만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환자의 회복은 물리치료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수술을 잘해도 재활치료를 제대로 안 하면 치료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사들도 차츰 인식하게 됐다.

“미국에서 연수하고 온 정형외과 의사가 있었는데, 당시 지하에 있던 물리치료실에 와서는 수술실에 같이 들어가자고 하더군요. 예를 들어 무릎 수술 환자라도 어떤 부위에 어떤 수술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물리치료의 방침이 정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외국에서 물리치료의 중요성을 체험하고 온 것이었죠.”

처음 정형외과 소속이었던 재활치료는 1996년 지역에서 처음으로 삼성창원병원에 재활의학과가 생기면서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물리치료는 점차 세분화·전문화 추세입니다. 크게 중추신경계 전문, 근골격계 전문, 소아뇌성마비 전문, 림프부종전문 등이 있습니다. 보통 염좌 등으로 병원에 갔을 때 하는 핫팩 찜질이나 초음파, 경피신경 자극 치료 등이 물리치료의 전부가 아닙니다. 기계보다는 ‘손’을 통한 스킨십이 물리치료에서 중요합니다.”

전문화·세분화되는 물리치료

현재 삼성창원병원 재활치료팀에는 15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뇌졸중·뇌손상환자·중추신경계 질환자를 치료하는 운동치료실과 지역 유일의 척수손상치료실, 근골격계 치료실, 소아치료실, 작업치료실, 언어치료실, 근전도 검사실 등이 있다.

여러 물리치료실을 둔 병원의 경우 물리치료사를 순환근무 하도록 해 다양한 경험과 기술을 쌓도록 하는 곳도 있지만, 이 팀장은 전문성을 위해 한 곳에서 ‘스페셜리스트’가 되도록 한다.

그래서 직원들이 힘들면서도 가장 선호하는 운동치료실에는 국제적인 자격이 있는 전문 물리치료사 4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 팀장의 아들 경준 씨도 뇌졸중 관련 자격증을 땄다.

근골격계 치료실의 경우에도 무릎 전문, 어깨 전문 등 환자 치료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세분화하고 있다.

물리치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는 다양하다. 내과와 신경외과, 정형외과뿐 아니라 소아과와 이비인후과까지 아우른다. 단순 염좌부터 뇌졸중, 뇌성마비는 물론 발성 장애, 삼킴 장애 환자 등이 물리치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1㎏ 미만의 체중으로 태어난 미숙아도 인큐베이터 안에서 물리치료사의 마사지를 받으며 회복한다.

특히 노인인구가 늘어나면서 재활 치료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노령화로 평균 수명이 늘어나 신체적 장애 극복이나 발달이 더 요구되기 때문이다.

환자가 다양해지는 만큼 물리치료사는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다.

4.jpg
지난 3월 2일, 마지막으로 삼성창원병원을 찾은 이현문 전 재활치료팀장이 아들 경준 씨가 환자를 돌보는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삼성창원병원 제공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따뜻한 마음”

여기서 이 팀장은 ‘따뜻한 손’을 강조했다. 기술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함이 환자의 미래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팀장은 팀원들을 이끌고 자원봉사 활동도 매주 했다. 가족이 없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병원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팀원들이 각 가정을 방문해 물리치료를 했다. 그것이 알려지면서 삼성그룹에서 재가물리치료팀에 봉사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환자들의 희망을 줘 회복에 대한 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창원 용지공원에서 환자와 보호자들을 초청해 ‘오뚝이 축제’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환자가 직접 치료 성공사례 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때 발표한 환자는 지역의 한 치과의사. 교통사고로 마비가 와서 절망에 빠졌던 환자였다. 하지만, 재활치료를 접하면서 희망을 가지게 됐다. 이 환자는 “열심히 재활치료를 해서 연젠가는 다시 치과의사로서 역할을 하겠다”며 큰 의지로 열심히 치료했다.

“치료실 문을 열기도 전에 와서 제일 마지막까지 치료하다 가곤 했습니다. 6개월가량 치료하니 팔이 회복돼 특수 전자 휠체어에 앉아 치과의사로 다시 재기했습니다. 재활치료가 재기의 계기를 만들어 준거죠. 기억에 남는 환자입니다.”

2.jpg

아버지의 뒷모습 보고 자란 아들들

아버지의 ‘봉사하는 삶’은 아들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장남 경빈 씨는 공대 진학을 고려하다 결국 의사로 진로를 결정했다. 지금은 삼성창원병원 내과에서 근무하고 있다.

경빈 씨는 “병원에서 아버지는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합니다. 같은 과가 아니라서 직접 부딪히는 일은 없지만, 돌아돌아 아버지 이야기가 들립니다. 아랫사람에게 존경받고 환자들에게 신뢰받는 아버지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제가 더 잘해야겠다고 스스로 채찍질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둘째 경준 씨는 철들면서부터 아버지의 자부심을 느끼며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경준 씨가 물리치료사를 선택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경준 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직장인 병원에 와서 아버지를 보며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을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습니다. 아버지가 다른 일을 해보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아버지처럼 존경받는 물리치료사가 되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경준 씨는 물리치료를 전공하고 2년가량 다른 지역 대학병원·재활전문병원 등에 근무하다 이번에 삼성창원병원에서 직원을 뽑자 얼른 지원했다.

1.jpg
사진 왼쪽부터 차남 경준 씨, 이현문 전 팀장, 장남 경빈 씨./삼성창원병원 제공

“언제나 존경받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습니다. 아버지가 팀원들과 가족처럼 지내며 만들어 놓은 치료실 분위기도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라는 경준 씨는 “어릴 때부터 보아 온 아버지의 뒷모습을 닮고 싶어 이 병원으로 옮겨 왔습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실 이 팀장은 경준 씨가 삼성창원병원에 근무하는 것을 반대했다.

경준 씨가 아무리 잘해도 ‘대선배의 아들’이라는 딱지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관심이 집중돼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팀장이 병원을 떠나 한국국제대로 옮겨도 경준 씨의 일거수일투족이 이 팀장 귀에 들어갈 것이 뻔하다고 부자는 예상했다.

그러나 경준 씨는 “더 잘해야겠다는 부담도 되지만, 의욕을 고취하는 촉매제가 된다”며 “기분 좋은 스트레스”라며 젊은 혈기를 내보였다.

그리고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른 후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신참 물리치료사가 돼 치료뿐 아니라 막내로서의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아버지도 이런 힘든 과정을 다 거쳤구나 하며 아버지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됐습니다”고 덧붙였다.

이 팀장은 “선배가 없어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또, 개척자적 위치에 있다 보니 내가 잘못하면 나 하나 욕먹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지역 물리치료계 전체에 해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늘 조심하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물리치료사에게 제일 중요한 덕목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치료, 따뜻한 스킨십입니다. 늘 최선을 다해 지역 의료계와 환자·보호자가 물리치료의 중요성을 알고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라고 30여 년의 감회에 젖었다.

“전 세계에 2만 개가 넘는 직업이 있다고 하지만, 그중 물리치료사가 된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른 직업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환자의 삶의 질을 보다 향상시키는 일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진, 그리고 대선배에게서 지역의 수많은 후배에게 30여 년 동안 이어진 ‘따뜻한 손’은 오늘도 의료 현장에서 환자들의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고 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