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관 관장을 꿈꾸던 소년, 정형외과 의사로

어린 소년의 놀이터는 병원이었다. 병원 맨 위층이 외가댁.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청진기를 만지고 주사기로 물총 놀이를 했다. 같이 놀아주던 간호사를 이모로 불렀다. 누군가에게는 스트레스가 되는 ‘병원 냄새’, 포르말린과 크레졸 향기에 소년은 익숙했다. 소년에게 병원은 낯섦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외할아버지 병원에서 함께했던 사람들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게 그에게 남아 있다.

인터뷰보다는 진료가 먼저

그를 인터뷰하려고 병원 측과 섭외 중에 그가 ‘농업인 대상 무료 의료지원’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틀에 갇힌 병원 진료실보다 농촌 현장에서 만남이 더 생동적일 것이라는 판단은 오판이었다.

의료지원이 있던 경남 함안군 가야농협 함읍지점은 인근에서 온 어르신들께 점령당해 있었다. 진료 대기실이 있는 지점 앞마당부터 그가 진료를 보는 농협 2층 강당까지 팔다리가 욱신거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긴 줄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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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인 의료지원 모습./박민국 기자

“인터뷰를 진행할 상황이 안 되네요. 진료가 끝나려면 몇 시간을 기다리셔야 할 텐데. 어쩌죠.”

편찮으신 어르신들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 진료하는 사진 몇 장을 찍고 발걸음을 돌렸다.

이튿날 아침 전화가 왔다. 12시 30분에 만나자는 것. 점심시간을 이용해 진료실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그리고 딱 한 시간만 시간을 낼 수가 있다고 했다.

관절·척추 전문병원을 표방하며 2013년 11월에 개원한 창원힘찬병원이 그의 근무지다. 

“어제는 시간 내서 멀리까지 와주셨는데 헛걸음하시고 오늘도 점심때에 인터뷰하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전성욱(43) 부원장은 방금 나간 진료 환자가 앉았던 의자로 안내했다. 

“저에게는 인터뷰도 중요하지만 환자 진료가 우선이라 시간을 못 맞춰드려 죄송하네요. 대신에 한 시간 동안 무엇이든 여쭤보세요.”

체육관관장을 꿈꾸던 소년, 정형외과 박사로 

어린 시절 전성욱 부원장에게 병원이란 낯설지 않은 놀이터였다. 그의 외가는 경북 포항이다. 그곳에는 아직도 지역민에게 ‘포항의 슈바이처’라고 기억되는 외할아버지 한영빈(2003년 작고) 박사가 세운 병원이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는 병원을 놀이터 삼아 들락거리며 의사인 외삼촌과 약사인 부모님은 훗날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의사라는 직업을 어렸을 적부터 자연스럽게 보아서 커서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잡혀 있었나 봐요.”

그의 집안은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의사 9명을 배출했다. 어릴 적부터 의사라는 직업을 숙명으로 아는 가풍에서 성장한 그에게는 애초 다른 꿈이 있었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고 운동을 좋아했던 그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대표 수영 선수를 했다. 모든 운동에 자신이 있었던 그는 체육관 관장이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정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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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욱 창원힘찬병원 부원장./박민국 기자

“공부보다 운동을 더 좋아했죠. 운동을 열심히 해서 스포츠 지도자가 되면 꿈꾸던 체육관 관장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지만 그때는 체육관 관장이 목표였어요.”

그가 꿈꾸던 직업은 약사인 어머니에 의해서 조금씩 수정됐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의사, 더 정확히 정형외과 의사라는 목표로 바뀌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운동을 하는 것도 좋지만 운동하는 사람들이 탈이 났을 때 그것을 고쳐주는 것도 큰일이고 더 보람된 일이라고 하셨죠. TV에서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보며 선수가 쓰러졌을 때 열심히 달려가는 주치의가 정형외과 의사라는 말씀은 아직도 생생해요.”

운동선수 주치의가 되리라는 그의 꿈은 의대를 선택하는 계기가 됐고 집안에는 또 한 명의 의사 탄생을 예고했다.

경희대 의대에 진학한 그는 스포츠의학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의대 예과시절 약사이셨던 아버지 인맥을 활용해 학교에서 가까운 태릉선수촌을 드나들며 운동이 아닌 부상 운동선수 재활 훈련을 지켜보았던 것은 지금 그를 있게 한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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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욱 창원힘찬병원 부원장./박민국 기자

“저의 멘토이자 스승님이 인공관절수술로 세계적인 권위자이신 유명철(전 경희대학교 의무부총장 관절·류머티즘센터 정형외과) 석좌교수님이세요. 교수님에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이 정형외과 의사로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죠.”

그는 유명철 석좌교수 밑에서 정형외과 전 과정을 거치며 더 넓은 세상에 눈을 떴다. 유 교수팀원으로 국외에 나가 학술대회를 참가했고 수술 시범을 펼쳤다. 세계적인 정형외과 석학들을 만나는 기회도 덤으로 뒤따랐다.

“2002년 유명철 교수님과 프로야구 LG 김재현 선수 고관절 수술을 함께 했던 기억납니다. 수술도 재활도 성공해서 김재현 선수가 2007년 한국시리즈 MVP를 받은 것은 정형외과 의사로서 큰 보람이죠.”

아들과 아빠는 하버드대학 동문

그는 유 석좌교수에게서 배움을 이어가며 열정을 쏟았다. 스승의 도움으로 세계적인 인맥을 구축해 나갔다. 2006년, 기회는 스위스 간쯔 교수 편지로 왔다. 외국 세미나와 학술대회를 통해 알게 된 간쯔 교수는 전 부원장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르는 것을 질문하고 연구하는 열정을 높이 샀다. 간쯔 교수는 그가 언제든지 자기 곁에 와서 배우는 길도 열어주었다. 전 부원장은 한 통의 편지를 간쯔 교수에게 보냈다. 인공관절 분야에 현주소를 볼 수 있는 하버드 의대병원에 펠로우(전임의) 과정을 할 수 있게 추천해 달라는 것이었다. 간쯔 교수는 흔쾌히 추천서를 보내주었고, 그는 2년간 가족과 함께 하버드 의대에서 연구하는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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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중 사진./본인 제공

“하버드 의대 병원이 인공관절이 생산되는 원초기지에요. 그곳 연구실에서 제품 아이디어를 내고 생산을 하고 우리는 그것을 수입해서 쓰고 있죠. 인공관절에 A에서 Z, 원산지나 다름 없죠. 그때 같이 갔던 아들 녀석은 하버드 의대병원 연구원 자녀를 위한 유치원에 다녔거든요. 요즘도 아들 녀석은 저랑 같은 하버드 동문이라고 이야기해요. 자기는 하버드 7살에 졸업했다고.”(웃음)

미국에서 연구하며 인정받는 길은 성실함뿐이었다. 언어 소통이 완벽하지 못하기에 연구 자료로 승부를 겨뤘다. 늦은 시간까지 연구실을 지키며 자료를 준비했다. 그의 열정은 통했고 한국인으로서는 7번째로 하버드 의대병원 정형외과 전임의 과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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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관절 연구소 연구실에서./본인 제공

한국에 돌아온 그에게 후학을 가르칠 대학으로 가려면 시간적, 경제적 기다림이 필요했고 고민도 깊어갔다. 집안에 의사가 많다는 것은 그가 고민을 할 때 함께 할 수 있는 동지가 많다는 것. 외삼촌은 내과의사, 이모는 피부과의사, 이모부는 안과의사 등 의사 친척들은 불투명한 대학교수 꿈보다 그가 배워 온 학문을 바로 활용할 수 있는 개업의사 길을 권했다. 외할아버지께서도 개업의사로 자수성가했고, 포항지역에 많은 기부를 하여 존경을 받은 것도 그의 진로를 선택하는데 영향을 줬다. 

2010년.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관절 수술을 하는 목동힘찬병원 정형외과 과장 자리를 선택했다. 개업의사 꿈을 이루려면 하버드에서 배워 온 학문 연구를 바탕으로 현장 실전 경험이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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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의대 전임의 과정 수료증./박민국 기자

할아버지를 닮고 싶은 의사손자

목동힘찬병원에서 4년을 보내며 무릎 인공관절, 인공고관절 등 4000여 차례 수술을 달성했다. 실전 경험을 풍부하게 쌓아가면서도 마음 한쪽은 허전했다. 미래에 개업의사로 독립하려면 병원 경영분야에 참여해 보는 과제가 남았기 때문이다. 전문병원 과장으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2013년 11월. 관절척추센터와 내과, 마취통증의학과, 영상의학과를 진료과목으로 병상 123개에 의사 10명, 직원 150여 명이 포진한 상원의료재단의 아홉 번째 창원힘찬병원 개원은 그에게 과제를 풀어줄 기회로 다가왔다.

개원업무를 맡아 미리 와 있던 창원힘찬병원 안농겸 병원장은 그에게 구원 요청을 했다. 병원 경영에도 참여할 수 있는 부원장 직함으로 경남지역 관절 척추 환자를 수도권 아닌 창원에서 치료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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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 중 모습./박민국 기자

가족과 떨어져 생활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목동힘찬병원에서 팀워크을 발휘했던 안병원장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2014년 3월 1일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창원에 발을 디뎠다. 그는 훗날 개업의사로 나아가려면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창원힘찬병원을 경남지역 관절 척추 분야에 으뜸 병원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뿐이었다. 5개월이 지난 지금 목표를 향한 그의 진료와 병원 경영은 순항 중이다.

“요즘 웬만한 병원 의료장비나 기기, 약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다른 외적인 요인이 환자에게 더욱 중요하죠. 의사의 권위를 낮추고 환자의 권리를 높이는 의료서비스가 필요한 이유죠. 특히 저희 병원은 환자 해피콜 서비스를 시행합니다. 친절하지 않은 의사나 직원은 퇴출입니다.”

경남 각 지역에서 오는 외래환자가 늘어나며 그의 진료 시간은 더욱 빠듯해졌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농업인 의료 지원은 빠지지 않는다. 의료인 길을 먼저 걸은 외할아버지, 외삼촌 등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의사로서 목표는 늘 외할아버지 같은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지역민에게 슈바이처로 기억되는 것처럼 저도 그분의 길을 언젠가는 걸어가야겠죠. 그것이 손자로서 임무고요.”

대학병원 인턴 시절 기나긴 업무 시간을 극복하고 수액을 맞아가며 연애 끝에 만난 아내는 아직도 그를 지켜주는 버팀목이다. 그는 주말마다 서울과 창원을 오가며 만나는 가족에 더 소중함을 느낀다. 딸 바보인 전 부원장이 아내와 아들, 딸과 떨어져서 생활하면서도 외롭지 않은 이유는 그에게 익숙한 기다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보고픈 가족과의 만남을 기다리듯 진료실에서 그의 손길이 필요한 환자를 기다린다.
“오늘은 가족이 오는 날이에요. 그래서 저녁 시간 인터뷰를 사양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벌써 1시 30분이네요. 전 오전 진료부터 화장실을 한 번도 못 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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