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이 길은 소통이고 추억입니다

엄마 손을 잡은 고사리 손이 정겹다. 심술궂은 봄비도 오늘만큼은 자취를 감췄고 간간이 부는 바람은 반갑다. 3·4월 색색 꽃잎이 물러간 자리에는 어느새 푸름이 가득하다. 등산화, 기능성 면바지, 반소매 티, 반바지. 허리에 동여맨 빨간 셔츠와 벙거지 모자, 손목에 질끈 묶은 손수건까지. 누구는 햇살을 피하고자, 다른 누구는 맞이하고자 갖춰 입은 옷들도 봄 냄새에 한데 어울린다. 어떤 이는 ‘벌써 여름이 왔다’며 즐거워한다. 늘어지기 쉬운 일요일 오전이지만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하다. 운동장을 힘차게 뛰는 아이, 그를 지켜보며 미소 짓는 할머니, 목마 태운 아이에게 봄을 선물하는 아빠, 유모차 속 잠든 아이를 지그시 바라보는 엄마. 추억을 쌓고자 찾은 발걸음은 가볍다.

입구서부터 시끌벅적한 음악 소리가 흥을 북돋더니, 이내 부추전 굽는 냄새가 풍긴다. 운동장 한편에 차려진 널찍한 무대 앞으로는 몇몇 사람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속속 도착하는 사람들을 맞는다. 음향기기를 점검하고, 행사 진행표를 곱씹어 보는 모습이 흥겨워 보인다. 다른 편에서는 4대 사회악 근절 내용을 담은 리플릿과 전단 등을 나눠주는 홍보 캠페인이 벌어지고, 바람개비와 솜사탕을 만들어주는 부스도 준비가 한창이다. 오전 8시부터 무리를 지어 운동장에 도착한 학생들이 자원봉사라는 문구가 적힌 옷가지를 갖춰 입는 모습도 눈에 띈다.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활기찬 주말을 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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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종 부대공연을 관람하는 참가자들./김구연 기자

5월 봄 끝자락, 여기는 ‘2013 진해만 생태 숲 걷기대회’가 열린 창원시 풍호체육공원·드림파크 일원이다.

손수 만드는 축전 한마당

경남도민일보가 주최하고, ‘진해만생태숲걷기대회조직위원회’가 주관하며 창원시가 후원하는 ‘진해만 생태 숲 걷기대회’가 올해로 3회를 맞았다. 그동안 시민들에게 마음 편히 자연과 노닐 수 있는 장을 마련한 대회는 이제 창원을 대표하는 축전으로 발전했다. 그사이 ‘숲’과 ‘자연’은 함께 즐기면 더 좋다는 생각이 퍼진 것일까. 간혹 ‘등산 고수’로 보이는 1인 참여자가 보이기도 했지만, 대부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운동장을 메웠다. 특히 올해는 도시락을 준비해 산책과 소풍을 동시에 즐기려는 가족들이 부쩍 늘어난 모습이었다. 또 부모님, 아들 부부, 손자·손녀 등 3대가 함께 김밥을 싸들고 대회에 참가한 이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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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사에 참가한 가족./김구연 기자

약속한 오전 9시가 되자 대부분 참가자가 도착했다. 이번 대회는 인터넷·e-mail을 통해 선착순 5000명을 신청 받아 진행했다. 참가비는 무료. 초등학생 이하가 부모와 동반만 한다면 참가자격도 제한이 없었다. ‘공짜로 즐길 수 있는 추억 여행’인 셈이었다. 본격적인 걷기대회가 있기 전 간단한 식전행사가 열렸다. 축하 인사를 전하고자 단상에 오른 경남도민일보 구주모 대표이사는 “걷기대회는 남녀노소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모든 이의 축제”라며 “누구나 걸을 수 있는 이 길이 함께 걷는 즐거움이 더해져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큼직한 번호표와 기념 손수건이 배부됐다. 가슴, 등, 엉덩이, 배, 모자 등 다른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번호표를 부착한 이들은 이내 번호를 견주기도 했다. 오늘만큼은 이름 석 자를 대신할 번호표. 특히 대회 막바지에 경품행사 추첨번호로도 쓰인다고 하니, 그 의미는 더 각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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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을 푸는 참가자들./김구연 기자

출발 전 운동장 곳곳에는 여유가 넘쳤다. 경쟁이 없는 대회는 그저 한나절 나들이처럼 다가왔다. 서둘러 갈 이유도 앞지를 필요도 없다. 마냥 즐거운 어린 아이들은 인조 잔디구장을 뒹굴기에 바빴고, 벌써 김밥으로 배를 채우는 커플도 보였다. 한 부부는 “집이 바로 이 앞이다”라며 “평소 공원을 제대로 애용하지 못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왔다”고 전했다. 부산에서 온 한 가족은 “오늘 흘린 땀으로 가족애를 쌓을 것”이라고 했다.

이윽고 신나는 음악이 다시 흘러나왔다. 무대에 오른 강사의 율동에 맞춰 함께 몸을 풀고 나서 식전행사는 모두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5000여 명이 내딛는 힘찬 발소리에 맞춰 ‘걷기대회’가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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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원함에 글을 쓰는 아이./김구연 기자

순위 없는 대회, 느림과 즐김으로

풍호체육공원을 출발하여 천자암을 지나 반환점을 돌아오는 길. 내려오는 길에는 목재문화체험관도 만나볼 수 있었다. 길이는 총 7km. 하지만 많은 숲길이 그러하듯 진해 생태 숲 길 역시 평지만 지속하지는 않는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시원한 내리막길이 펼쳐져 있다. 이를 보고 누군가는 ‘인생과 닮았다’고 했던가. 이번 대회 코스에서는 처음부터 가파른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지레 겁먹고 돌아가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서로 끌고 밀어주며 발걸음에 힘을 실었다. 첫 번째 포인트인 천자암까지는 1.2km 거리였다. 차 타는 일에 익숙해졌을 법한 어른들도, 엄마 등에 업히기 일쑤인 아이들도 오늘만큼은 제 다리를 믿었다. 가파른 언덕을 넘어서자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참가자들을 맞이했다. 한 학생을 두 팔을 벌려 바람을 맞았고, 다른 여자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엄마 등 뒤로 수줍게 숨는 아이와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연방 닦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함께 걷는 즐거움에 심취했다고 할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걸을 길이지만 기분은 사뭇 달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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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완수 창원시장./김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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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오영 경남도의회 의장./김구연 기자

반환점을 돌자 진해만이 한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손만 뻗으면 닿을 듯한 바다와 사방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숲은 초록으로 물들었고, 간간이 보이는 색색 꽃과 조화를 이뤘다. 부단하게 움직였던 다리와 함께 걸어준 동지를 향한 감사의 말도 오갔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은 훈장처럼 여겨졌다. 그사이 서둘러 가자고 보채는 아들에게 한 아버지는 훈훈하게 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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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회구간을 걷는 시민들./김구연 기자

“오늘 걷기대회에 순위는 없단다. 뛰지 않아도 되니 천천히 가자꾸나.”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다시 힘찬 발걸음이 시작됐다. 앞으로 남은 거리는 3.5km. 왔던 길을 거슬러 풍호체육공원으로 돌아오면 됐다. 이전 구간보다 내리막길이 많지만 체력적인 문제가 뒤따를 수 있었다. 이에 반환점으로 가기 전 곧바로 하산하는 길을 마련했었지만, 대부분 사람이 꿋꿋하게 전진했다. 이제 씩씩하게 돌아오는 일만 남았다. 이날 대회에는 유니폼을 맞춰 입고 단체로 온 이들도 제법 많았다. 경남교육청 직원과 교사 120여 명이 노란색 유니폼을 입고 고영진 교육감과 걸음을 함께 했고, ‘창원시 진해구 걷기운동 연합회’ 회원 120여 명도 단체로 참가했다. 도착지로 향하는 길에는 체력이 떨어진 아이들을 위해 목마를 태우고 걸음을 지속하는 아빠들도 있었다. 연방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함께 완주하겠다’는 희망으로 묵묵히 전진하는 아버지들 모습은 ‘가족애’를 담았다. 애완견과 함께 산책을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 시선을 의식한 듯 더 당당하게 걷는 몇몇 강아지들 모습은 색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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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회구간을 걷는 시민들. 길가에는 꽃들이 피어 있다./김구연 기자

어느새 친구가 된 참가자들

“경남 김해에서 왔어요. 다른 대회 일정과 겹쳐 어렵사리 참가하게 됐는데 참 좋네요.”

평소 마라톤·걷기 행사에 자주 참가한다는 부부는 환하게 웃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기념촬영에 열중하던 둘은 “이 좋은 계절에 걸을 수 있다는 거 자체가 축복이다”고 전했다.

4남매를 이끌고 대회에 참여한 한 어르신은 “어릴 적 산·들에서 뛰어놀던 때가 생각나 훈훈하다”며 “동생들과 함께 이 걸음을 즐기겠다”고 밝혔다.

반환점과 하산 포인트에서 얻은 ‘어린이용 스크래치 복권’과 ‘전체용 스크래치 복권’을 챙겨든 이들은 벅찬 마음으로 최종 목적지를 향해 갔다. 하산 포인트에서부터 풍호운동장까지는 내리막길 연속이었기에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오갔다. 이윽고 도착한 목적지. 처음 출발할 때 느낌과는 사뭇 다른, 벅찬 기쁨이 참가자들 사이에서 맴돌았다. 손뼉을 마주치며 방방 뛰는 사람도 있었고, 서로 다리를 풀어주는 커플도 보였다. 화장실로 뛰어가는 사람, 음료를 찾는 사람, 돗자리를 깔고 싸온 음식을 나눠 먹는 가족…. 잔치를 막 끝낸, 혹은 더 큰 잔치를 시작하려는 정겨운 시골 동네 같은 풍경은 걸음이 가져다준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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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걷다 중간중간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김구연 기자

오후 1시께부터는 부대행사가 진행됐다. 그사이 부대행사 맞은편 가장자리에 자리한 ‘먹거리 장터’에서는 부추전과 김치를 아낌없이 제공했고, 막걸리와 미숫가루도 맛볼 수 있도록 했다. 이외에 진해시니어클럽이 마련한 솔방울 목걸이 만들기와 미니 솟대 만들기, 진해소방서의 심폐소생술 체험관, 창원문성대학의 타투 체험도 인기를 끌었다. 무대 위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귀여운 몸동작으로 청중을 사로잡았고, 진해여고 학생들의 댄스 공연도 이어졌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마임공연까지 끝나자, 고대하던 경품행사가 열렸다. 김치냉장고, 노트북 등 다양한 경품이 소개될 때마다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졌다. 번호표에 걸어보는 행운. 기분 좋은 긴장감이 운동장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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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는 가족들./김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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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회에 참가한 꼬마./김구연 기자

“발표하겠습니다. 노트북 주인공은 만 사천….”

진행자 입에 맞춰 웃음과 탄식이 오갔다. 행여나 뽑힌 번호를 지닌 사람이 없을 때에는 너나 할 거 없이 카운트 다운을 외쳤고, 경품을 받고 금의환향하는 참가자에게는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비록 경품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모두가 즐거웠던 시간. 함께했던 시간 동안 대회에 참가한 이들은 어느새 가족이 돼 있었다. 55인치 LED TV 경품 추첨을 끝으로 모든 대회는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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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주모 경남도민일보 대표이사(오른쪽)이 경품 당첨자에게 경품권을 주고 있다./김구연 기자

누군가는 “성적, 순위에 급급해 하는 아이들에게 여유도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참가했다”고 밝혔고, 다른 이는 “자연의 소중함을 깨우치고자 왔다”고 했다. 한 가족은 “가족과 함께 웃고 즐길 수 있었다”며 감사해 했고, “내년에도 반드시 개최하자”고 당부하는 이도 있었다. 어디서, 누구와 어떤 동기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함께 가는 길을 통해, 걸음을 통해 자연을 알았고,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함께한 땀방울 속에는 무엇보다 말과 글로 다 하지 못하는 소통이 있었고 자기 치유가 있었다. 사람들은 번호표 대신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는 알림표를 내걸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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