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승장구 양덕여중의 비결은 모교사랑"

양덕여중 핸드볼 팀의 파죽지세 비결은 지도자의 모교사랑이다.

양덕여중 핸드볼은 지난달 인천에서 열린 '제43회 전국소년체전'에서 대회 2연패를 차지하면서 다시 한 번 최강의 면모를 발휘했다. 이번 소년체전 우승으로 양덕여중은 지난해 3월 열린 중고 핸드볼 선수권대회부터 35연승을 내달리며 최근 출전한 7개 대회의 트로피를 모두 휩쓸었다.

특히 양덕여중의 뿌리가 되는 진주 금산초와 창원 팔룡초에서 유입되는 선수들이 에이스급이 아니다. 초등부에서 에이스로 활약한 선수가 꾸준한 기량성장을 통해 팀을 이끄는 것이 아니기에 양덕여중 핸드볼 팀의 기세가 더욱 놀랍다. 

이 같은 양덕여중 핸드볼 팀의 승승장구 뒤에는 때로는 호랑이 같은 코치로, 때로는 자상한 어머니처럼, 때로는 묵묵히 후배들을 지켜주는 선배의 모습을 한 이근미 코치(41)가 있다. 

양덕여중을 여중부 최고의 팀으로 성장시킨 이근미 코치를 지난 1일 양덕여중 체육관에서 만나 그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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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덕여중 핸드볼팀 이근미 코치./박일호 기자

간식으로 시작된 핸드볼과 인연 

이근미 코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핸드볼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도 키가 크고 핸드볼에서는 귀족으로 대접받는 왼손잡이였다. 

그는 "핸드볼의 'ㅎ'도 몰랐던 어린 시절이었는데 훈련을 마치고 나면 주는 간식이 맛있어서 핸드볼을 시작했던 기억이 있어요. 제가 운동을 하던 시절만 해도 간식이 귀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라며 과거를 잠시 회상했다. 

이근미 코치는 양덕여중을 졸업한 뒤 마산여상(현 무학여고)를 거쳐 청주시청에서 6년간 실업무대를 누볐다. 지금은 성공한 지도라지만 선수시절에는 메달과는 인연이 없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전국대회에서 3위에 오른 것이 유일한 메달에 대한 추억이고, 실업생활동안 베스트 11에 든 것이 그의 활약상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이 전부다. 

메달과는 큰 인연이 없었던 이 코치지만 현역시절 선수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간절하게 소망하는 태극마크도 달았다. 실업 3년차에 대표팀으로 선발돼 1995년 프로올림픽에 출전했고, 1996년에는 애틀란타 올림픽 출전 기회를 잡기도 했다. 

하지만 애틀란타 올림픽 출전을 얼마 앞두고 부상을 당해 결국 올림픽 무대는 밟지 못했다. 

이 코치는 "현역시절 올림픽에 나서지 못했다는 것보다 중학교 시절 제대로 된 지도자에게 배우지 못한 부분이 가장 아쉬워요. 핸드볼 선수에게는 중학교 시절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실업무대를 누비며 알 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제 모교만큼은 지도자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게 하려고 애들에게 조금은 가혹하리만큼 훈련을 시키는 건지도 모르겠어요"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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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덕여중 핸드볼팀 이근미 코치./박일호 기자

중학교 시절 좀 더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면 더 큰 선수로 성장할 수도 있었다는 가정 속에서도 실업무대에서 좋은 훈련을 받으며 선수로서 한결 더 성장했다고 그는 전했다. 

청주시청 시절 그는 새벽운동을 시작으로 야간훈련까지 매일 같이 4번의 훈련을 이어갔다. 소히 '입에서 단내'가 날 만큼 훈련, 또 훈련이었다. 그러던 순간순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만 생각을 더 해보면 또 핸드볼만큼 재밌는 것도 그에게 없었다. 

그렇게 실업무대 6년을 누빈 뒤 1997년 무릎 십자 인대 파열이 찾아왔고, 몸 담았던 청주시청이 해체되면서 정들었던 핸드볼 코트를 그는 떠났다. 

선수 은퇴와 함께 모교 지도자로 첫 발걸음

2004년, 그는 새 출발을 알렸다. 모교인 양덕여중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처음 모교를 찾은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선수수급이 되지 않아 해체위기까지 놓였기 때문이다.

핸드볼은 7명이 코트를 누빈다. 하지만 2004년 첫 부임 당시 선수는 모두 5명이었다. 부랴부랴 선수 수급을 위해 노력했다. 

선수 수급과 함께 2005년 양덕여중은 전국종별선수권대회에서 깜짝 준우승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맺는다. 2006년과 2007년에는 잇따라 2관왕의 영광을 재현하기도 했다. 경남판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이근미 코치는 모교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성적이 났던 이유로 "실업은퇴 후 제가 중·고 등학교 재학시절 배우지 못한 부분에 대해 열심히 애들을 가르쳤고 선수들도 평소 훈련을 열심히 소화해줬기 때문에 성적이 났던 것 같아요"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이 코치는 과거 선수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선수들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키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사실 어릴 때 훈련이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1분이라도 더 자고 싶고 1분이라도 더 누워있고 싶은 게 사람 심정이고, 저 역시도 그런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시절 흘리는 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낄 수 있죠. 제가 중학교 코치를 맡은 또 다른 이유는 중학교 레벨에 따라 실업팀에 갈 수 있는지가 사실상 갈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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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덕여중 핸드볼팀 이근미 코치./박일호 기자

이 코치는 강도 높은 훈련 중에도 공격수에게는 왼손 적응력을 주문한다. 

그는 "제가 왼손잡이라서 더 의존한다고 생각도 이따금 하지만 통상 오른손잡이보다는 왼손잡이가 더 선수생활이 길어요. 그리고 오른손잡이가 왼손만 적응이 되면 양손잡이가 되기 때문에 공격수에게는 슛을 쏠 수 있는 각도가 넓어지니 더 유용한 선수가 됩니다"고 말했다. 

귀족으로 분류될 만큼 핸드볼에서 왼손잡이는 귀하다. 그러다 보니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코치는 스카우트를 할 때도 신체조건과 함께 왼손잡이라면 무에서도 유를 만들고자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물론, 이 코치에게도 몸과 마음이 힘든 시절이 있었다. 바로 2005년 소년체전이다. 당시 이 코치는 만삭의 투혼(?)을 발휘했다. 

2005년 양덕여중과 천안여중의 핸드볼 경기가 열린 충북학생체육관에 이 코치는 만삭에도 선수들을 지도했다. 이 코치는 임산부라는 사실을 잊은 채 경기장이 떠나갈 듯 소리를 질렀고, 선수들을 지도했다. 

이 코치는 "당시 팀을 맡은 지 2년차였고 임신 9개월째였어요. 병원에서는 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말도 들었는데 수동 스타렉스 차량을 제가 직접 몰고 청주까지 갔죠. 특히 소체가 열렸던 5월에는 선수단을 이끌고 삼척, 태백, 서울 등지를 오가면서 연습경기를 가졌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소란스레 선수들을 지도해서 그런지 둘째 연우는 겁이 없어요"라고 아찔한 기억을 꺼내 들었다. 

그는 슬하에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데 성격이 극과 극이다. 첫째 아들은 눈물도, 겁도 많고 성격이 내성적이지만 둘째인 딸은 배 속에서 엄마의 사회적 활동(?) 때문인지 겁도 없고 코치 때 성격을 그대로 지녔다고 한다. 

만삭의 투혼에도 양덕여중은 그 해 소년체전에서 8강에서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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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덕여중 핸드볼팀 이근미 코치./박일호 기자

최고의 엘리트 코치, 태극마크를 이끌다

열악한 환경에도 양덕여중을 최고의 자리로 이끈 이근미 코치는 그간의 노고를 인정받아 지난 4년간 18세 이하(U-18) 국가대표팀 핸드볼팀 코치를 역임 중이다. 더불어 대외적으로도 한국핸드볼협회 기술이사를 역임한 바 있다. 

이 코치는 "열심히 선수들을 가르치다 보니 이렇게 국가대표도 이끌 기회가 생겼어요"라고 말하면서도 "하지만 난 중학교 코치라 고등부 코치들의 보이지 않는 시기도 있었기에 이번 대회만 마치면 대표팀 코치는 다른 훌륭한 후임자에게 넘기고 우리팀에만 열중하려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이 코치는 오는 17일 마케도니아로 출국해 18세 이하 세계 청소년대회를 치른 뒤 8월 5일 귀국한다. 이어 8월 16일부터는 난징 유스올림픽을 위해 중국으로 재차 출국해 8월 30일 한국에 돌아올 예정이다. 

태극마크를 이끌어야 하는 중책이 그에게는 영광으로 다가오지만 한편으로는 걱정거리가 늘어난다. 바로 이 코치의 팀, 양덕여중 지도자로서 2개월가량의 공백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코치는 "지난해에도 국제무대 때문에 팀을 잠시 지도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는데 정말 많이 아쉬움이 남았어요. 그래서 올해는 제자와 후배를 불러 지도를 부탁했어요. 특히 골키퍼 후배를 힘들게 초빙했는데 새로이 합류하게 될 선수와 현 골키퍼의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조금은 마음 편히 출국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문득 최고의 핸드볼 지도자 반열에 오른 그의 꿈에 대해 물었다. 이 코치는 40연승이 꼭 이루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자랑스러운 모교에서 계속 지도자생활을 하는 것과 함께 40연승이라는 성과를 꼭 내고 싶어요. 35연승이라는 성과도 대단한 것이라 자부하지만 내친김에 5연승을 더 추가해 40연승을 꼭 달성하고 싶어요. 12월에는 내년 멤버도 합류하는 만큼 좋은 전력을 유지해 소년체전 3연패도 기록하고 싶어요."

양덕여중 지도만 1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기에 지도자 이근미라는 이름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모교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있기에 양덕여중 핸드볼 팀의 미래는 더욱 밝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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