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하고 높고 푸르른’ 아름다움을 찾는

정진혜(48) 화가의 15번째 개인전이 진주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6월 3일부터 9일까지 열렸다. 이번 전시는 1994년 첫 번째 개인전이 열렸던 똑같은 장소에서 20년 만에 열리는 것이다. 그는 “설레면서도 부담을 느낀다”며 긴장한 탓인지 다소 경직된 표정을 지었다.

정진혜 화가는 1994년 첫 개인전 ‘외곽으로부터’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5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화랑미술제, 한국국제아트페어, 뉴욕아트페어 등 15번의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2002년부터 진주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서양화반에 출강하며 진주 정수예술촌에 산다.

밑그림을 글로 써내려가는 화가

정진혜 화가는 툭 치면 쓰러질 듯 가냘픈 몸,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빛, 귀를 기울이게 하는 작은 목소리는 예민하고도 슬픈 듯한 인상을 주었다. 15번째 개인전 제목은 ‘쓸쓸하고 높고 푸르른’. 팸플릿 중간중간 화가가 직접 적은 글귀는 ‘슬픔도 미학이 된다’고 말을 건넨다.

지난 6월 3일 경남문화예술회관 제1전시실. 개인전 여는 행사를 3시간 남짓 앞둔 정 화가는 70개 작품을 손수 걸고 작품 제목을 쓰고 있었다. 한두 개는 까맣게 잊어버릴 법한데도 막힘없이 제목을 써내려갔다. 그녀는 미술작품 못지않게 글과 제목을 소중히 여기는 듯했다.

정 화가는 “저는 어떻게 그림을 완성할 것인지 에스키스(밑그림)를 글로 쓴다. 글과 제목을 먼저 쓰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린다”고 설명했다.

보통 화가는 주제를 정하고, 밑그림을 그린다. 거기에 색을 더한다. 그런데 화가인 그녀는 글을 쓰는 작가처럼 밑그림을 글로 쓴다. 거기에 작품의 제목도 미리 정해 버린다. 그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구체적인 형상을 그려낸다.

팸플릿 곳곳에 쓰인 글을 보면.
‘언제부터 저 물과 잎과 꽃과 빛이/ 나를 에워쌌던가?/ 아득하고 길고 오래되었다/ 가만히 다가가 말을 거니/ <슬픔>이라는 것을 닮은 생명체였다./ 작고 낮게, 내밀하게 꽃을 피우는/ 그대, 수련이여!’
‘네가 어둠을 밝혀주는 존재라고 믿는다./ 아무도 없지만, 깜깜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두려움 없이 피어나는 너를/ 찬미하는 새벽.’

풍부한 감성이 깃든 글이다. 유려한 글솜씨는 작품의 흡인력을 높인다.

정진혜 화가./김구연 기자

슬픔의 색은 결코 어둡지 않다

정진혜 하면 ‘슬픔을 그린다’, ‘검은색을 좋아한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작품에 반영한다’는 평이 많다.

정목일 수필가는 “정진혜 작가는 어둠과 동거를 한다. 영육(영혼과 육체를 아울러 이르는 말)을 함께 나누면서 편안해지고 마음의 소통을 통해 정감도 슬슬 풀어놓는다. (중략) 폐쇄 속 어둠이 아닌 소통, 대화, 공감의 세계와 손을 맞잡고 있다”고 말했다.

왜 슬픔이냐고 그녀에게 묻자 “이상하게도 어렸을 때부터 슬픔이 아름다웠다”면서 “대부분 사람은 슬픔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빨리 걷어내려고 한다. 슬픔의 색은 결코 어둡지 않다. 찬란함을 통해 우리는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그것이 곧 카타르시스다”라고 말했다.

유홍준 시인은 정 화가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끄집었다.

“‘슬픔은 정화의 능력이 있다’고 정진혜가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그녀의 작품들을 읽는 단초며 키워드가 되었다.” 덧붙여 유 시인은 “같은 대상이라도 정진혜는 그녀만의 고유한 감성으로 교교히 그 대상을 풀어낸다. 그것이 그녀를 외유내강 생활인으로 또한 화가로 존재하게 하는 표현방식이다”고 설명했다.

우울하고 슬픈 작품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작품에 삶의 우여곡절이 묻어나보였다. 세세하게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정 화가는 제21회 동서미술상을 2011년에 받았다. 이보다 앞서 같은 해 창원상공회의소 1층 챔버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었는데, 몸이 안 좋아보였다. 갤러리 관계자가 화가에게 한 마디 하라고 마이크를 건네줬는데 목소리는 쇠약했고, 몸은 삐쩍 말라 야위었다. 특히나 검은색 드레스를 입어 얼굴에 그림자가 더 짙어보였다.

그때 당시 ‘감기 때문인가’라고 가볍게 어겼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암환자였다.

정진혜 화가./김구연 기자

떨어지는 꽃, 앙상한 줄기, 홀로이 핀 꽃

3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암을 극복했다.

만약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으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녀는 무던하게 받아들였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쿨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일기 쓰듯이 그림을 그렸다. 특별한 메시지를 전한다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 자신의 마음을 기록했다.

그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꽃’이다.

꽃을 좋아해 꽃을 그리는 그녀는 꽃으로 사람의 삶을 이야기한다.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인생 또한 그러하리라. 인생의 여러 감정 중 슬픔을 그림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슬픔을 나눈다.

떨어지는 꽃(落花), 앙상한 줄기, 홀로 외로이 핀 꽃이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슬픔은 슬픔으로 치유되고 아픔은 아픔이 달래준다. 슬픔은 헤아릴 수 있고 아픔은 나눌 수 있을 때 보석처럼 가치롭다”고 그녀는 말했다.

화가는 밤에 피었다가 아침이 되면 눈을 감는 달맞이꽃을 좋아했다.

10여 년 전 창원 동읍 주남저수지에서 밤길을 헤매었을 때, 환하게 핀 달맞이꽃을 보고 길을 찾았던 경험 덕분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아침에 피었다가 밤이 되면 눈을 감는 ‘수련’을 그린다. 달맞이꽃과는 정반대다. 검은색도 많이 걷혔다.

유방암 선고를 받았던 그녀는 건강이 회복되면서 이전보다 조금 더 밝아진 느낌으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전시된 작품 중 가장 눈길을 끈 작품은 200호 두 개를 붙여놓은 대작 ‘어린 영혼의 바다’다. 작품 제목에서 대충 감이 오겠지만, 세월호 침몰사고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푸른 바다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는 마치 배 안에 갇혀 꼼짝도 못하는 어린 아이의 바람과 같아 보인다. 팝페라 테너 임형주의 세월호 희생자 추모곡 ‘천개의 바람이 되어’가 모티브가 돼 나비 천개를 그렸다.

정 화가는 “하마터면 이 작품을 개인전에 못 걸 뻔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전시가 열리기 2주 전, 진주에 있는 작업실에서 물이 새 누전으로 불이 났기 때문. 다행이도 작품이 불에 타지 않고 약간의 그을음만 보여서 재작업을 했다. 처음 의도했던 바와 달리 표현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징조’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정진혜 화가./김구연 기자

슬픔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그녀의 작품은 감성적이지만 밑바탕은 철저히 이성적이고 구체적이다.

정 화가는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에는 불가능한 꿈을 꾸자’는 체 게바라의 말에 나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꿈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목표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림 역시 그렇다”고 설명했다.

꽃의 색깔, 크기, 종류는 물론 구도, 여백 등 여느 것 하나 즉흥적으로 이뤄진 것이 없다. 그녀는 자신만의 감성이 담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까지 치밀하게 배치한다. 그렇다고 너무 계산적으로 꾸며져 인공적인 느낌은 없다. 오히려 작가와 관람객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힌다.

정 화가는 1966년 경남 함양 출신이다. 경남대학교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녀는 전업 작가로 진주 정수예술촌에서 작업 활동을 하고 있다.

솔직히 한국에서 전업 작가로 살아가기는 무척 힘들다. 전업 작가로 살기 위해선 작품을 팔아야 하는데 이상을 접고 현실과 타협할 것이냐, 영혼도 팔 것이냐 고민이 많다. 그녀는 “자신 역시 갈등을 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혹자는 그녀에게 “우울한 그림, 슬픈 그림 그만 그리고 시장에 팔릴 만한 그림을 그려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그녀는 시집 <노동의 새벽>(1984)으로 유명한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을 보고 마음을 되잡았다.티베트, 인도, 라오스, 인도네시아 등 분쟁과 빈곤 지역에서 촬영한 사진들이다. 박 시인은 “사람들이 모이고 고통, 아픔, 아름다움, 진실 이런 걸 나누고 싶어 전시했다”고 말했는데, 정 화가 역시 관람객과 작품을 통해 슬픔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컸다.

사람은 각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이 오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잊거나 잃지 않는 것이다. 정 화가 역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슬픈 책, 슬픈 영화를 보면서 삶을 정화한다. 그림이라고 해서 왜 항상 행복하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이어야 하는가”고 반문하면서 “슬픔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그녀는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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