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24일 통영 멍게 편을 시작으로 1년을 달려온 '맛있는 경남'. 그 속엔 사람이 있었다. 제철 식재료가 자연이 준 선물이라면 맛은 사람이 준 선물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손이 없었다면 밥상에 어찌 올랐을까.

취재팀은 식재료들과 함께한 삶을 들으면서 식재료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거기엔 도식화한 자료나 계량화한 수치는 없었지만 식재료들을 키우고 보듬은 진짜 이야기가 있었다.

◇대를 이어

맛있는 경남의 소재와 관련해 섭외한 사람들은 대부분 한 평생을 자기 일에 바쳐온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를 이어 일을 해오고 있는 분들도 많았는데 40년 넘게 의령 망개떡을 만들어 온 임영배 씨는 떡을 팔던 어머니로부터 이 일이 시작했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인 1957년 어머니가 떡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떡을 이고 팔러 나가고 저는 아버지와 떡메를 치곤 했죠."

고성 갯장어 횟집을 운영 중인 차태수 씨도 갯장어를 잡던 부모님 일을 돕다가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부모님은 갯장어를 잡고 아들인 차 씨는 회를 뜬다.

창원 단감 편의 우인호 씨도 직장생활을 하며 부모님을 모시고 살다 자연스럽게 농사일을 하게 된 경우다. 젊은 나이지만 이제는 제법 단감 농사꾼이 되었다.

◇고향이 있어서

부모님을 모시다 자연스럽게 자기 일을 찾은 경우도 있지만, 타지 생활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자리 잡은 사람도 있다.

끊임없는 시금치 연구로 유명했던 남해 시금치 편의 최태민 씨도 그런 경우다. 청소년 시절 뭍으로 나와 생활하다 건설회사 전기기사로 재직하던 그는 회사 구조조정으로 직장과 타지 생활을 마감했다. 당시 그에게 믿을 것은 고향 남해뿐이었다.

"촌으로 간다고 하면 아내가 안 따라오지. 그래서 일단 남해읍내에서 잠시 생활 좀 하다가 이곳으로 들어왔지. 나중에 귀향하려면 이 방법을 써먹으라고 하하!" 최 씨는 '귀향의 기술'도 알려 줬다.

남해안 전어 편의 양태석 선장도 외환위기를 겪으며 고향으로 와 배를 샀다.

"그때 하던 일을 말아 먹었지. 다른 일을 해도 안 풀리고, 그래서 배를 샀어. 막둥이가 학교 졸업한 지 10년 됐는데, 그때 어려웠지. 뱃일도 익지 않았고."

함양 흑돼지 편의 박영식 씨는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아이 때는 보통 대통령·장군·사장, 뭐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잖아요.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께 '가축 기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고 했죠." 그 역시 고향 땅 '함양'이 있었기에 지금의 삶이 가능했다.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어 고향으로 돌아온 이가 있다면 그냥 고향이 좋아서 돌아온 이도 있다. 하동 재첩 편에서 재첩국을 파는 조영주 씨는 하동이 그리워 돌아왔다. 하지만 어디 그립다고 해서 마냥 돌아올 수 있었으랴. "제가 결혼을 빨리 했는데 아내가 반대하지 않아서 귀향할 수 있었지요. 하동에 돌아오자마자 재첩 일이 있으니 생활에는 문제가 없었지요." 그에겐 재첩이 있었다.

함양 산양삼 편의 정성용 씨도 고향의 산이 그리워 돌아왔다. 서울서 석유풍로 고치던 일을 하던 그는 손 끝에 밴 석유 냄새가 싫었다. 지리산, 덕유산의 흙냄새를 찾아 돌아온 것이다.

고향은 떠난 이뿐만 아니라 남은 이에게도 희망의 발판이 되었다. 통영 굴 편의 김진열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해부터 통영 앞바다에서 일을 했다. 소년가장이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입니다. 공부는 꿈도 못 꾸었죠. 16살 때 굴 공장에 취직을 했어요. 아마 첫 월급으로 2만 원을 받았죠." 그는 현재 통영에서도 이름 난 굴 생산업자.

◇자연에 몸을 맡기고

이렇듯 고향의 품이 넓은 이유는 고향의 자연이 있는 덕이다. 그래서 그 자연에 기대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은 여기 사람들의 오래된 습관에 가깝다.

멍게 양식 1세대인 홍성욱 씨도 자연을 탓하지 않는다. 그냥 받아들이되 포기하진 마라고 한다. "멍게 양식이라는 게 한 해 바짝 벌어 앞에 빚진 거 갚고, 그러길 반복하는 거예요. 한번 올라갔으니 또 내려가야 하는 거죠. 1990년대 말 물렁증이 왔을 때였어요. 뭐 이거는 원인도 알 수 없으니 손 쓸 수도 없는 거예요. 그냥 앉아서 죽은 멍게 꺼내는 게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손 놓을 수도 없잖아요. 내년을 기다리며 아직 물속에 있는 놈들도 있으니 그걸 어떻게 버려요. 그냥 그렇게 계속 가는 거지요."

하지만 자연은 야속하기보다 너그럽다. 오죽하면 자연에 기대 산다고 하겠는가. 남해 죽방렴 멸치는 자연이 낸 길대로 수백 년을 이어오고 있다.

"죽방렴은 선조들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멸치 습성만을 이용해 잡도록 해 놓았으니 얼마나 훌륭합니까. 재료만 대나무에서 플라스틱으로 바뀐 정도지, 550년 넘게 그 모양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15년째 죽방렴 멸치를 하고 있는 박대규 씨의 설명이다.

하지만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자연이다. 사람이 왜곡시킨 자연은 다시 사람을 왜곡시킨다. 30년 넘게 양파 농사를 지은 윤용주 씨는 기후변화의 피해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예전에는 그리 신경 쓸 일 없이 수확하는 재미만 있었는데…. 요즘은 기후 변화가 심해 어려움이 크죠. 겨울 지나면 봄 없이 바로 여름이 오잖아요. 온도 차가 급격히 변하기 때문에 병이 찾아와요. 영양제 같은 것으로 힘을 보태기는 하지만, 한계가 있죠. 양파연구소에서 새로운 종 개발에 나서고 있지만, 워낙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욕심만은 피해야 할 일이다. 심마니 정성용 씨는 욕심 부리면 안 된다며 수 차례 강조했다. "처음엔 실패도 많이 했죠. 그게 다 '크게' '많이' 하려고 욕심을 부린 탓이죠. 흙에도 여유를 줘야 하고, 낙엽도 있어야 하고 자연이 허락한 만큼 해야 하는 일인데 말이죠."

농사꾼은 아니지만 농사꾼보다 더 농사를 아는 사과박사 성낙삼 씨. 그는 기다리고 연구하면 땅은 반드시 보답한다고 한다. "사과뿐만 아니라 모든 농사는 기본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땅을 잘 만들어야죠. 그러면 10년이 편합니다. 하지만 농민들은 급해요. 땅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그냥 고달픈 농사를 하는 거예요. 그러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술 한잔 먹고 찾아와서는 막말을 쏟아내요. 나중에 알고 보면 저보다 한참 밑의 후배인 경우도 있고…. 어휴, 그런 일이 다반사입니다."

진주 딸기 편의 정동석 씨는 내가 살기 위해서 자연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고 한다. 그가 유기농사를 택한 이유는 농약 때문에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다. 사과 농사를 주력했던 그는 농약을 치다 두 번 쓰러졌다. 1980년께 그는 사무나무 1300그루를 모두 베어 버렸다. 다시는 농약과는 함께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할매들의 손을 거쳐

한때 밤 농사를 위한 항공방제로 '농약녹차' 파동이 일었던 하동 쌍계사 계곡. 이후 항공방제는 중단되었고, 여기 사람들은 비싼 비용을 치르고 자연의 '자연스러움'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녹차와 함께 한 우전차 명인 김동곤 씨는 그냥 기다려 따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녹차는 겨울 지나고 처음 딴 것이 제일 맛있습니다. 즉 우전을 말하는 거지요. 4월 20일 정도 되면 첫 잎을 따고, 5월 초 두 번째, 5월 중순 세 번째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5월 하순부터는 티백용 찻잎을 땁니다. 갈수록 맛이 떨어지기 때문에 하동에서는 5월 안에 거의 작업이 끝납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일일이 여기 '할매'들의 손을 거쳐야 한다. 타 지역의 대규묘·일본식 재배방식과 달리 여기는 쌍계사 계곡 할매들이 손으로 찻잎을 하나하나 딴다.

미더덕도 마찬 가지다. 마산어시장에서부터 진동 고현마을까지 미더덕이 쌓인 곳이라면 할매들이 둘러 앉아 껍질을 까고 있다.

남해엘 가도 삼삼오오 둘러앉아 멸치횟감을 손질하는 모습은 흔하다. 그뿐이랴 단감은 수확기 한철 할매들의 일손이 없으면 감당할 수가 없다.

물메기로 유명한 추도에선 할매들의 칼질이 추도 물메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몇 초 만에 물메기 배를 따고 내장을 빼 씻어 건조대로 향한다.

남해 시금치 밭에선 소리 없이 할매들이 움직인다. 맞춤 방석을 깔고 한 고랑씩 전진하며 시금치를 딴다. 이를 다듬고 묶는 것도 할매들의 손이다. 붉은 노끈에 묶인 그대로 도시로 향한다.

할매들은 늘 춥고 젖은 곳에서 일한다. 진해 피조개 편에선 캄캄한 새벽부터 진해만 작업선에서 추위와 싸우며 피조개를 씻고 선별하는 할매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필 이렇게 추울 때 올라오냐란 푸념이 나와도 할매들에겐 이만한 벌이도 없다. 수건 한 장, 장갑 한 켤레, 칼 한 자루면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살 수 있다.

대부분의 식재료들이 차고 젖은 바닥에 터를 잡은 할매들을 거쳐갔다. 맛있는 경남은 사실 이 할매들의 경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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