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은행에 '男다른' 바람 몰고 온다

은행 창구에서 만나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지만, 이들 뒤에는 주로 남성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런 은행권 풍경에 변화의 기운이 엿보인다. 전체 여성 직원 비율도 높아지고 있을뿐더러 여성 책임자도 점점 늘고 있다. 더구나 그동안 보수적으로 평가받던 NH농협은행에서 올해 경남지역에서만 ‘여성 지점장’ 4인을 늘려 주목을 끌었다.

얼마 전 끝난 동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 금메달은 모두 여자 선수가 땄다. 역대 올림픽 가운데 출전한 여자 선수도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처럼 한 분야에서 여풍이 불고 있지만 과연 현실은 어떤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가 높아졌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여전히 권력을 쥐고 흔드는 것은 남성이고, 그만큼 남성이 우위에 있다는 통념도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금융기관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다른 분야보다 그 정도가 심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2014년 금융계에도 변화는 왔고, NH농협은행 내부에서 부는 새 바람은 신선했다.

왼쪽부터 박선영, 한정숙, 김현숙, 조미자 지점장./박일호 기자

NH농협은행 경남영업본부(본부장 박석모)는 지난 2월 인사에서 여성 지점장 4명을 배치했는데, 이는 역대 최다 인원이다. 여성으로서 아니, 그보다 지점장으로서 경남 농협은행에 새 바람을 몰고 올 4인을 만나봤다. 조미자(54) 창원시 진해구 장천동지점장, 김현숙(53) 서진주지점장, 창원금융센터 한정숙(53) 개인금융지점장, 창원중앙금융센터 박선영(50) 지점장이다. 인터뷰는 이들이 지점장이 된 지 한 달 즈음인 지난 2월 27일 오후 경남농협에서 진행했다.

스무 살, 농협에 들어간 까닭

농협은행에 발을 딛게 된 사연부터 들어봤다. 어떤 사람이 될까 고민하고 꿈꾸던 고교시절을 마치자마자 이들은 농협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1980년대 초반 스무 살, 스물한 살이었다. 고향 선배 소개로, 농민의 딸로, 근처 은행에서 유니폼을 입고 일하던 언니에 대한 동경으로 농협과 인연을 맺었다.

“그 당시 최고의 직장이 은행이었습니다. 진주에서 고교시절을 지냈는데, 은행에 취직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시험 준비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우연히 고향 선배 중 농협에 근무하는 사람이 있어서 시험 쳐보라는 얘기를 해줬고, 그렇게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김현숙, 이하 김)

김현숙 서진주지점장./박일호 기자

“이번 인사 이후 이동하고 인사기록 카드를 보니 정확히 32년 8개월 정도 일한 것으로 나오더라고요. 숫자만 놓고 보면 참 세월이 빠르다고 느낍니다. 밀양여고에서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스무 살에 농협에 입사를 했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저축반장을 했었거든요. (웃음) 또 지금은 없어진 상업은행에서 유니폼을 입고 근무하는 창구 언니를 봤었는데, 거기에 반하지 않았나 싶어요.” (한정숙, 이하 한)

하지만 처음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지금은 사라진 도구나 다름없는 주판을 제대로 다룰 줄 몰랐기에 학원을 다녀가면서 일해야 했다.

“안동여고를 졸업했는데, 인문고에 다니다 보니 사실 은행에 다닐 생각도 못했었습니다. 농협에 취직한 그때부터 적성을 맞춰가려 노력했습니다. 여고시절 대학 진학을 위한 예비고사 공부만 했지, 따로 준비를 못 했기 때문이지요. 주산 놓는 것부터 안 돼 정말 고생을 했습니다. 부기(자산, 자본, 부채의 수지·증감 따위를 장부에 적는 법)라는 것도 농협에 들어와서 처음 알게 됐습니다. 당시 책임자였던 대리가 직접 가서 학원에 등록해주고, 업무 마치면 학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석 달 뒤에는 부기와 주산 몇 급을 땄고, 그게 밑바탕이 됐어요.” (조미자, 이하 조)

조미자 진해구 장천동 지점장./박일호 기자

“상업계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꼭 오고 싶었다기보다 졸업을 앞두고 취업 담당 선생님이 무조건 농협은 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은행보다 좋은 데가 농협중앙회라고 했어요. 지금은 복지 수준부터 만족스럽고, 농업인의 딸로서도 일할 때 자부심이 생깁니다. 고향이 남해인데, 예전에 부모님은 벼나 마늘 농사, 농사일이 없을 때는 삼베 짜기를 했었지요. 어느 금융기관에서 일하는 이들보다 사명감이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농협 후배들한테도 이야기하고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박선영, 이하 박)

결혼,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던 꿈

그렇게 한참 일하다 결혼이라는 삶의 전환기가 왔다. 경력을 이어갈지, 일을 그만둘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이나 육아에 따른 경력단절 여성의 재취업 문제는 지금도 화두다.

전환기를 지나 지금은 무려 30년 이상 경력이 쌓였다. 이들이 직장생활을 오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 끈기와 의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일터에서 이들의 직장생활을 보호해주고 독려해준 분위기도 있었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점점 활발해진 시대적 배경도 한몫했다.

“88년에 결혼했는데, 그때만 해도 여직원 3분의 2가 결혼을 하면 직장을 나갔습니다. 그래서 사실 조금 고민을 했습니다. 나가라고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여직원은 결혼하면 나간다는 인식이 있었거든요. 근데 이런 생각이 스치더라고요. ‘이왕 발 담근 거 끝까지 해보자!’” (조)

“나 역시 88년에 결혼했는데, 당시 진주에는 결혼하고 다니는 선배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혼하는 것 자체를 그만둬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다니다 보니 세상이 변하더라고요. 결혼한 사람이라도 직장생활을 충분히 잘해낼 수 있었고, 자연스레 승진 공부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김)

“89년 결혼 이후에 제일 어려운 것이 육아 문제였습니다. 사내아이가 둘인데, 아이를 키우면서는 남편도 그만두라는 말을 했습니다. 조금만 더 다니겠다고 한 게 여기까지 이어진 것 같네요. 직장에서 많이 배려해준 덕분에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한)

한정숙 창원금융센터 개인금융지점장./박일호 기자

박선영 지점장은 이 중 유일하게 결혼을 하지 않았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싱글’입니다. (웃음) 결혼하고 직장에 다니는 이들이 존경스럽고, 개인적 여건이나 가정을 돌봐야 하는 사정 때문에 힘든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었지요.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은행 업무라는 게 리스크를 가지고 있어서 쉬운 직장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박)

조직, 그리고 지역사회에 남기는 발자국

경력을 쌓고 지점장까지 오른 데는 당연히 피나는 노력도 숨어 있었다. 오랜 기간 일하다 보니 직장에 대한 자부심과 일에 대한 보람도 커졌다. 여성 후배들에겐 본보기가 됐고, 고객에게도 딱딱하지 않게 다가갈 수 있었다.

지역사회와 함께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도 늘 염두에 두고 있다. 스스로 지닌 역량을 지역사회와 나누는 것이다. 기업체나 기관, 청소년, 노인을 대상으로 한 금융교육 등을 진행하는 이유다.

“금융도 서비스 업종입니다. 경쟁사회에서 이기지 않으면 내 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기관이나 공장을 여신 거래처로 유치할 때면 자긍심, 무언가 이뤘다는 기분이 듭니다. 지점장으로서도 직원들과 한마음이 되어 이처럼 무언가 이루면 보람이 큰 것 같아요.” (김)

“고객과 상담한 이후 상품 가입으로 연결되거나 내가 제공한 서비스 덕분에 고객이 직접 감사함을 표현할 때 정말 감동이 큽니다. 그리고 많지는 않아도 몇몇 후배가 ‘롤모델’이라고 말할 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이 누군가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이고 있다는 게 보람이기도 하고요.” (박)

박선영 창원중앙금융센터지점장./박일호 기자

“섬세한 리더십과 마케팅 전략 기대”

앞서 경남농협에서는 문갑석 삼천포지점장이 올 1월 본부 수탁업무부장으로 발령이 났다. 농협 본부에서 경남농협 출신의 여성 부서장이 나온 일이다. 특히 여성 부서장은 1961년 농협중앙회 설립 이후 처음이었다.

이번 일은 지역본부 인사에서 여성사무소장을 늘리는 시도로 이어졌다. 농협은행 경남본부 경영지원단 정영철 차장은 “앞으로 사무소장 자원으로 여성이 늘어날 것”이라며 “이번 여성 지점장 4명 배치는 더 많이 발굴하기 위한 시작 단계”라고 말했다.

경남본부는 여성의 섬세한 리더십, 특유의 관리능력과 마케팅 전략 등이 조직에 생동감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울러 은행 업무는 고객 다수와 만나는 ‘감정 노동’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뛰어난 면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농협은행 경남본부의 최근 3년간 정규직 직원 채용 현황을 보면 여성 비율이 2011년 46.3%였지만, 2012년 51.4%로 절반을 넘어섰다. 2013년에도 50%를 기록했다.

4급 책임자 승진 현황에서 여성 비율은 더욱 두드러진다. 전체 인원 가운데 여성 비율이 2012년 60.6%, 2013년에는 무려 64.5%였다. 승진자 10명 가운데 6.5명이 여성이라는 뜻이다. 올해 역시 54.8%로 남성 비율을 계속 앞질렀다.

직급별 여성 비율은 3급(지점장)이 아직 5.1%에 불과하다. 하지만 4급(과장) 39.4%, 5급 이하 61.3%로 여성 비중은 점차 커질 전망이다.

농협은행 경남본부 정영석 경영지원단장은 “‘여성시대’에 초점을 맞춘 것은 경영 방침이기도 하다. 최근 초급 책임자인 4급 과장직에서도 승진 인원은 여성이 더 많았다”면서 “그간 농협 하면 관료적인 이미지가 강했는데, 이번 인사를 계기로 탈바꿈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男다른’ 리더십으로 남다른 농협은행 꿈꿔

4명 지점장은 앞으로 농협은행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까. 각오를 듣지 않을 수 없다. 주변 시선 때문에 느끼는 부담도 있지만, 설렘과 포부가 더 크게 와 닿는다.

“진주 여성CEO 모임 회원인데, 공장이나 회사를 운영하는 여성들이 남성 못지않게 많은 사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여성에게는 섬세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큰 것보다 작은 것을 하나하나 다져 나가면, 나중에는 큰 덩어리가 되어 농협과 나 자신한테 많은 보람을 안겨다 줄 것 같습니다.” (김)

“지점장 하면 옛날에는 고객들도 만나기 어려워했는데, 오히려 여성이 지점장인 상황에서는 찾아오기 쉬운 것 같습니다. 직원들도 의사결정 과정에서 문턱이 낮고 좀 더 수월하다고 여기는 것 같고요. 이게 우리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미미하지만, 좋은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조)

“기쁘면서도 어깨가 무겁습니다. 주위 기대가 있을 것이고, 그래서 잘할 수 있을지 불안감도 생깁니다. 여성 대통령도 나오는 마당에 여성 책임자에 대해 지켜보는 시선이 있는 것 같고요. 직원들과 한마음 한뜻으로 행동하면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도 중요한 듯합니다.” (한)

   

“사실 올해 경남 농협은행은 파격적 인사를 했습니다. 남자들도 지점장을 하려면 수년을 거쳐야 했는데…. 그만큼 잘해낼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까 보직을 맡긴 것 같습니다. 업무 지식 습득은 신규 직원이 더 빠르겠지만, 30년 이상 경력으로 책에서 배울 수 없는 부분을 직원들에게 가르쳐주고, 내 역량을 나눠주고 싶습니다.”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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