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마산, 시민들이 주인공이 되는 곳이길

명함에 적힌 ‘당신이 곧 미디어다’라는 활자가 마음에 와 닿았다. 아이엠미디어(주)의 배진우(49) 이사. 그는 매거진, 디자인, 출판, e-book, 광고 등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엮어가는 일을 하고 있다. 타향살이 30년이 되는 그에게 고향 마산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 들어보았다.

배진우 이사를 만난 서울 강남의 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화려했다. 올 3월의 가운데 하루, 짧고 가는 빗줄기가 봄을 알렸다.

중앙대 신방과 84학번. 20년에 가까운 나이 차에도 그는 나에게 존댓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에 모 신문사에 다녔던 선배와 만난 자리가 있었지요. 그가 후배들을 하대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설명했다. 고향 마산을 아끼는 마음도 담았다.

“후배들에게 살기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라는 말 속에 담긴 열정은 무르익었다.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를 할 만큼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현재 인생은 어떤 의미일까. 어린 시절을 지나 대학 4학년 때 창업을 하게 된 과정 등 조금씩 속 깊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 고향 마산에서의 어린 시절, 어떤 기억을 갖고 있나요?

“축복이지요. 행정구역상 마산시였지만, 생활권은 시골이었지요. 어촌이었고, 농·어업으로 먹고 사는 마을이었지요. 자연 친화적인 환경입니다. 그게 제 어린 시절의 감수성과 정서를 만들어나가는데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사는 공간 자체가 놀이터였지요. 손에 잡히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자연이니까요. 그 속에서 모든 것이 해결됐고, 굉장히 건강한 정서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대단히 순수하고 순진한…. 그런 시골 어린이들이었어요. (웃음) 악동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마을공동체였지요. 동네 어른들이 다 보호자였고, 아이들이 그릇된 태도를 보이면 지적할 수 있었지요. 고등학교에 가서는 부모들의 존재나 관심, 그런 것에서 벗어날 기회가 있었지요. 근처에 해수욕장이 있어서 유흥문화를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니까요. (웃음) 마중과 마고를 나왔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마산을 떠났지요. 얼마 전에 아들이 대학을 갔어요. 나는 서울에 살고 있지만, 이 녀석은 지방으로 갔습니다. 예전에 제가 대학 입학한다고 서울로 올라오던 그 장면이 생각이 났어요. 그때가 겨울인데, 난생 처음 서울에 온다는 생각에…. 막연하고 두려웠던 기억도 납니다. 그날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올 때 차창에 보이는 모습이, 내 가슴에 다가왔던 그 모습이 여전히 떠오르네요.”

배진우 아이엠미디어(주) 이사./조문식 기자

- 대학시절, 엄혹한 시기였지요? 학보사 기자생활은 어땠나요?

“예, 대학 다닐 때 학보사 기자를 했지요. 중대신문이지요. 그때 신문이라는 하나의 매체를 맞이했습니다. 기획에서 취재, 편집, 인쇄, 배포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학생시절 관여하게 됐고…. 그 경험을 하게 된 후 ‘이걸 업으로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첫 사업으로 일찍 시작했나봅니다.

“대학 4학년 2학기에 회사를 차렸습니다. 주변 선배들 손을 좀 빌렸지요. (웃음) 4평짜리 사무실을 용산에 얻어서 기획사를 만들었어요. 직원은 대학원 석사과정 1명, 학부 4학년 1명을 채용했지요. 대학원 다니는 석사과정 후배는 군대에 가기 전이었습니다. 각각 86, 89학번이었습니다. 이 친구들을 직원으로 놓고 학교 안 회보, 홍보간행물…. 이런 것들을 수주해서 제작을 대행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인쇄소에 다닌다고 을지로, 충무로를 오가면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졸업하고 1년 만에 망했어요. (웃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했으니…. 교수님 한 분의 에세이를 단행본으로 엮어서 출판을 하기도 했는데 안 팔리더라고요. (웃음) 창고에 재고만 잔뜩 쌓이고…. 그 당시는 학생들이 책을 잘 안 샀어요. 제본이나 복사가 발달해서 학생들이 강의교재도 잘 안 샀던 걸로 기억하지요. 교수님이 ‘잘 팔릴 것’이라고 했는데…. 타격이 컸지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업해서 1년 만에 망했네요. (웃음)”

- 첫 사업의 실패, 그 이후는 어떻게 이어지나요?

“그래서 취업을 하게 된 게 언론이었어요. 서울에 있는 종합 일간지가 아니고 전문지였지요. 5, 6년 하다가 그만뒀지요. 1998년도에 다시 창업을 했어요. 커뮤니케이션 기획사라고 하는데, 기획사지요. 그게 오늘까지 왔네요. 중간에 부침이 많았어요. 개인 사업과 직장인의 과정을 오락가락했지요. 이 사업을 본격적으로 한 것은, 곁눈질 안 한 것은 5~6년 됐어요. 그 전에 다른 사업 하다가 망한 적도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이었는데 ‘나름 획기적인 아이템이다’라고 생각해서 엔터테인먼트 쪽도 했지요. 요즘은 개인 블로그를 가지고 있고, 페이스북 페이지도 하나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인쇄매체지요. 광고든 출판이든 홍보든…. 미디어 환경은 디지털로 점차 바뀌니까요. 사회 전체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바꾸는 것이지요. 끝까지 인쇄를 고집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느냐하는 고민도 있습니다.

배진우 아이엠미디어(주) 이사./조문식 기자

- 삶의 방향이라고 하면 거창할까요?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나요?

“지금 일이 정서에는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사업하고 연관 지어서 이야기 하다보면 미래의 가능성 있는 사업은 아니지요. 앞으로 줄어들면 줄지, 늘어날 일은 없다고 봐요. 경쟁이 심하고 치열한 분야이기도 하지요. 이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합니다. 나도 뭔가 디지털매체, 전반적인 변화에 따라가야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페이스북을 열심히 하게 됐고, 블로그도 열심히 하고…. 콘텐츠 정보를 어떻게 유통시켜서 할 수 있을까, 아이템이 뭘까…. 이런 생각과 고민을 했지요. 나이가 40대 후반쯤 되니까 ‘도시에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면 힘들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귀농도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런 자료를 수집하고 하다 보니까 ‘발상을 달리 하면 귀농은 도시를 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시의 삶을 버리는 것, 그러면 농촌은 어떻게 되겠는가에 대한 고민도 생겼지요. 결국은 농촌도 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봐요. 차라리 도시에서의 삶을 인정하고, 긍정하는 가운데서 희망을 찾는 자연친화적인 삶을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마음이 들었지요.”

- 현실에 반영할 수 있는 대안을 찾으셨나요?

“‘그러면 뭔가?’에 대한 고민 속에서 도시에서 할 수 있는 농업을 생각했지요. 도시에서 식물을 좀 가꾸고, 정서도 좀 순화하고…. 식물도 길러봤습니다. 시골에 가고자 하는 전체 만족은 안 되겠지만, 흉내라도 내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2003년부터는 주말농장을 했습니다. 지금도 계속 하고 있는데, 길도우미가 있지요. (웃음) 농사라고 하기는 좀 그런데…. 농사 체험 정도라고 보면 됩니다. 내 경험, 이런 것을 가지고 도시농업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하고 싶었지요.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도시농업이 확산 되는 것,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주변에 보탬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시인들에게 있어서는 대안적인 삶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여러 가치, 긍정적인 가치들이 있어요. 공유를 하고 싶기도 하지요. 그런 것들을 이야기할 미디어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테마로 블로그를 만들었지요. 개인 담벼락에서. 엮기를 하다 보니까 페이스북에서 맺어진 친구들이 좋아합니다. 그런 소재를 가지고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이 의미 있지요. 지금은 그냥 즐기고 있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좀 조심스럽게 향후 가고자 하는 것도 있지요. 그것도 하나의 SNS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도시농업을 이야기하는, 나누는 공간에서 소통하고 싶네요. 페이스북에 있는 친구들이 ‘도시농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웃음)”

배진우 아이엠미디어(주) 이사./조문식 기자

- 요즘 고향 친구들을 종종 만날 기회가 있나요?

“고향 친구들도 서울에 많이 있으니까요…. 초등학교 친구들도 만납니다. 가포초등학교를 나왔는데 43명밖에 안 됩니다. (웃음) 그중에서 서울과 경기에 5명이 살지요. 그 친구들과 자주 봅니다. 중·고등학교 동창들도 만나고 하지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고향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단순한 지리적인 고향을 떠나 마음의 고향을 찾게 되는데, 회귀본능일 수도 있겠지요. 마음은 항상 그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가고 싶다는 마음만 있을 뿐이지만요. 그쪽에서 가서 살 수 있는 여건은 선택하기 어렵지요. 저를 위해서 고향 소식에 대해 페이스북의 친구들이, 가까운 친구 1~2명이 올려주기도 합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집을 찾아서, 동네에서 수소문해서 사진을 찍은 것도 있네요. 초등학교 사진, 바다풍경, 산 등을 올려서 위로를 해주기도 합니다.”

-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될 이야기가 있을까요?

“사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전혀 몰랐던 세계가 있었지요. 1970년대 선배들부터 시작된, 변화를 위해 노력했던 선배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결과도 없었겠지요. 역사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그 과정에, 한 부분에 제가 있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학생들의 취업에 대해서도 그렇지요. 신자유주의가 공고해지면서 아이들이 바깥에 나가서 먹고살 수 있는 기회들이 굉장히 열악해졌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국가 정치 체제나 사회민주주의를 가지고 고민하라고 하면 어렵습니다. 사회구조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현실문제에 고민하지 않고 개인의 영역에서 고민하는 것을 문제로 삼을 수는 없겠지요. 사회진출의 기회나 폭도 분리됐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우리가 잘못 물려준 것이겠지요. 훨씬 열악한 환경을 만들었지요. 80년대 학번들이 사회 진출할 때 취업의 기회가 많았습니다. 경제구조까지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대기업과 대자본 중심의 경제구조에 포함되지 않으면 루저(패배자)가 됩니다. 그 구조 속에서 어찌 보면 안타깝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 마산이 창원으로 통합된 것은 어떻게 보시나요?

“마산의 이름이 사라진 것은 아쉽습니다. 내 이름이 바뀌거나 사라지는 것은 상실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책입니다. 도시가 분리되거나 통합되는 것, 개편한다는 것은 국가에서 이유가 있어서 진행되는 것이겠지요. 서울에 있어서 내막을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결정되는 과정에서 얼마만큼의 의견수렴이나 합의절차가 진행됐는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통합됐다면 인정해야 됩니다. 개인적인 생각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큰 원칙이 다시 흔들릴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합의 과정이나 절차가 제대로 안 됐다면 문제를 삼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한번 결정된 사안을 번복할 만큼의 대의명분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네요. 그건 결정되기 전에 해야 되는 것이지 지금 와서 분리를 해야 되는 근거는 아니라고 봅니다. 명확한 명분이나 실리가 있다면 해야겠지요.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면 엄청난 국가적인 낭비입니다.”

배진우 아이엠미디어(주) 이사./조문식 기자

- 고향 마산의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요즘도 고향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몇 년 전에 서울에 있는 20~30여 명이 고향 방문 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지역 스토리텔링 사업의 일환으로 모집하는 것이었습니다. 1박 2일로 다녀왔는데, 달라진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도심이 공동화되고 있는 것은 물론 인구가 줄어들면서 시민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달라진 도시 풍경, 개발이 많이 진행된 모습, 바다가 매립되는 것도 봤지요. 시대가, 시간이 흐르면서 발전하는 것은 좋은데 건축이나 건물…. 이런 것들로 발전하는 발전은 건강한 발전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마산만의 고유한 정서와 정체성, 문화…. 이런 것들이 더 공고해지고, 시민들이 가슴에 담아서 내 것으로 할 수 있는 정신적인 발전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지요. 결국 ‘토건중심의 개발’이라는 일반적인 우리나라의 변화가 마산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실패한다는 것을 일본에서 봤지 않나요?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직접 이야기가 되는, 삶이 되는 그런 발전방안을 모색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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