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어디든 갖다 쓰는 것도 신의 부름이라"

지난해 진주의료원 폐원 반대 싸움이 한창일 때 익숙한 이름 하나가 뉴스에 등장했다. ‘박광희’. 무척 익숙한 이름인데 가만 생각해보니 근래 접하지 못한 이름이었다. 잠시 90년대 진주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그걸로 그만이었다. ‘진주의료원 환자 가족대책위원회 대표’ 자격으로 폐원 반대 운동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지만, 진주의료원에 입원해 있다가 다른 병원으로 옮길 것을 ‘강요’하는 의료원과 경남도에 떠밀려 한 요양병원으로 옮긴 그의 모친이 지난해 4월 18일, 전원한 지 43시간 만에 숨졌다. 더더욱 인터뷰를 요청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그렇게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인터뷰 내용 중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기자도 아는 사람이지만, 20여 년 전의 기억이 그들에 대한 뒷담화가 될 수도 있겠고, 그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일 수도 있겠기에 대부분은 익명으로 처리했다.

인권위 활동으로 두 차례 테러 당해

“오죽했으면 ‘대책위원장 전문 목사’라는 말까지 들었을까요. 심지어 도박하다가 잡혀갔다며 어쩌면 좋겠냐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어요.”

박광희 목사 부부./정성인 기자

박 목사가 당시 일을 회상하면서 한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가 진주에서 교회를 열고 채 자리도 잡기 전인 91년 3월 1일 진주에서 오태열·전노진 목사, 이윤호 성공회 신부, 허철수 천주교 신부, 박광희 목사 이렇게 종교인 다섯 명에 민교협 교수 10명이 함께 서부경남 인권위원회를 결성하고 인권운동을 벌였다. 그는 90년 11월에 진주시 하대동 28평짜리 건물에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20만 원을 주기로 하고 교회를 열었다. 넉 달 만이었으니 교회가 자리를 잡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쓰임’을 거부하지 않았고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심지어 육제척인 ‘테러’까지도 감내해야 하는 어려운 길이었다.

“진주지역 민주노조협의회 활동을 하던 김임섭 씨가 경찰에 붙잡혀 간 일이 있어요. 면회를 갔는데 ‘목사님 나 뚜들겨 맞았습니다. 바께쓰를 씌워놓고 잡아 패더라고요’라고 고함을 치더군요. 즉시 대책위를 꾸리고 몇 가지를 요구했어요. 진상규명과 손해배상, 재발방지, 경찰서장 공개사과였지요. 서장이 공개사과를 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하대성당에서 경찰서 간부들과 대책위가 마주 앉았어요. 한쪽에는 서장과 과장들이 앉았고, 맞은편에는 대책위 사람들이 앉았고 서장이 사과했습니다. 그러고는 죽 돌아가면서 악수를 했는데, 섬뜩한 느낌이 오더라고요. 손에 힘을 딱 주는 게 ’아 한번은 당하겠다‘는 느낌이 왔어요.”

그러고 나서 어느 날, 진주에서는 꽤 알려진 ‘35번 종점’ 인근 포장마차에서 당시 민가협 간사를 맡고 있던 여성과 고민을 상담하면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 여성을 집에 바래다주려고 같이 가는데 ‘봉고’차가 옆에 서더니 웬 건장한 청년들이 내리는 것을 봤고, 뭔가에 ‘딱’ 얻어맞았는데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첫 번째 테러였다.

박광희 목사./정성인 기자

두 번째는 김대중 대통령과 관련이 있다.

“DJ 대통령 나왔을 때 이쪽에는 DJ파가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오태열 목사랑 몇몇 같이 하는 사람들이 동방호텔에서 초청강연을 했어요. 강연회 뒤풀이까지 하고 마지막으로 YMCA 근처 포장마차에서 구세군 사관하고 한잔하고 있었는데 옆에 떡대가 시비를 거는 거야. 안 되겠다 싶어 팰 만큼 패 보라 하면서 얼굴 커버 하면서 움츠리고 있었는데 그 사관은 유도를 좀 했거든요. 맞으면서 한 방 엎어치기 하려다가 더 많이 맞아 다리가 부러졌어요.”

그렇게 테러 당한 ‘흑역사’로부터 인터뷰를 시작했다.

진주인권조례 잘 살려 나가야

인권 보호를 위해 애써온 지난한 역사.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1996년이었나. 진주에 삼일유치원이라고 있었어요. 그 유치원 원장이 여교사들을 성추행한 사건이 있었어요. 총력을 기울여 대응했고, 원장은 유죄 판결을 받았지요. 나쁜 사람을 징치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이 일로 진주에 여성 민우회가 생겨났고, 당시 마련된 기금으로 여성인권상도 제정됐다는 거죠. 당시의 고민과 성과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 의미가 크지요.”

어느 지역이나 그런 현상은 있다. 특정 학교 출신이 그 지역의 여론 주도층이자 사실상의 지배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 그 원장도 진주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학교 출신이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갔던 것이 그 원장은 당시 진주지역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왔던 한 단체의 이사를 맡고 있었던 것. 인권위원회 활동에 큰 힘을 보탤 수 있었던 그 단체가 발뺌했고, 그 단체에서 실무를 맡고 있던 ㄱ 씨는 그 단체를 떠나야 했다. 박 목사와 인터뷰 이후 기자가 기억하고 있던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사실 확인차 ㄱ 씨에게 확인을 해봤다. 정말 그 일로 단체를 떠난 것이 맞느냐고. 맞다고 했다. 그만큼 보수적인 진주에서 반체제도 아닌 보편적 ‘인권’을 둘러싼 싸움을 하기에도 힘이 달렸다고 한다.

박광희 목사./정성인 기자

“진주에 처음 왔을 때 보니 기독교계에 토호 삼인방이 있더군요. 명색이 내가 목사인데, 진주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은 것은 전혀 없었어요. 심지어 한 명은 자신이 소유한 대학을 이전하면서 이면계약을 하는 등 굉장히 부도덕한 짓을 했지요. 그들마저도 내겐 넘어야 할 벽이었습니다.”

진주라는 보수적인 동네에서 ‘굴러 온 돌’인 그가 겪었던 일이야 옆에서 지켜봤던 일만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진주를 떠나 있었고, 이른바 ‘운동’으로부터도 한 발짝 비켜나 있었다. 그런 그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진주시 의회가 ‘인권 조례’를 제정했다는 것.

“신문 보도와 서은애 진주시의원 페이스북을 통해 인권조례가 제정됐다는 것을 알았어요. 정말 반가웠죠. 그러면서 든 생각이 그 조례를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를 이제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가 진주에서 활동한 토대는 인권위였다. 그는 다른 건 다 접고 인권위 활동만 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90년대 시대 상황은 그를 인권운동만 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래서 민주화운동에도 관여했고, 교회를 제대로 반석에 세울 기회도 잡지 못했다.

20년이 훌쩍 지난 세월. 그에게 인권, 진주에서의 인권은 어떤 의미였을까?

/정성인 기자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 그런 것 아니겠어요?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맞겠네요.”

‘인권’ 하나를 잡고 20년 넘게 진주에서 고군분투해온 그에게 진주시의회의 '인권조례'는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어떻게 구체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진주를 인권의 도시로 만들고 싶었어요. 형평운동이라거나 역사적으로 봐도 ‘인권 하면 진주 가서 배워라’ 이런 도시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현실적인 이유로 진주를 떠났지만 그런 바람은 늘 갖고 있었죠. 진주를 예술 문화 교육 무슨 무슨 도시라고들 하는데 영양가 없는 것 버리고 진주라고 하면 인권으로 통하게 했으면 좋겠다, 그런 브랜드 하나 있어야 세계 속의 진주 그런 얘기 안 하겠나 그런 것이죠.”

그에게 “인권이란 뭔가?”라고 돌직구 질문을 던졌다.

“관공서 하나를 짓더라도 장애인에 대해 배려를 한다거나. 학교도 마찬가지고. 수없이 많은 아이가 다 차별성이 있고 그래요. 어릴 때는 어릴 때 나름의, 청소년기에는 청소년들 나름의 인생이 다 있고 그런 건데 전부 다 대학 가는 데만 올인해 있고. 그때 그 나이에 맞는 삶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도 인권입니다. 그야말로 각자가 자유로운 제 나름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소명’ 아니라 ‘쓰임’인 것

그는 기독교장로회 목사이다. 목사면서도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운다. 더구나 목회자로서 수입이 아니라 따로 식당을 운영하고 술을 팔기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동군 진교면에 ‘비버스’라는 양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것.

박광희 목사./정성인 기자

산청군 금서면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는 기독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추첨으로 고등학교 배정이 되면서 부산의 브니엘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기독교 계열이었던 그 학교는 매일 수업 시작 전에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방송으로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아이들에게 가서 꿀밤을 먹이면서 놀았어요.”

하지만 그에게도 그 나이 청소년이 하는 고민은 있었다. ‘어떻게 하면 보람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까’는 것이었다. 그런 고민의 답을 군 생활 하면서 찾았다. 산청군 금서면에 있는 고향 집에 혼자 기거하면서 면사무소 ‘방위’ 생활을 한 것.

“혼자 있다 보면 생각도 많이 하고 고민도 깊어지잖아요. 고민 끝에 신 앞에 무릎을 꿇었지요. 내가 원해서 온 것도 아니고 저절로 온 것도 아니라는 것. 내가 사명을 갖고 태어난 게 아니고 내 의지로 태어난 게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가 있다는 것. 누군가가 나를 이곳에 보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이곳에 보낸 분의 쓰임에 따르는 것이 옳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그는 부산 신학대학(지금의 경성대학교 신과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으로 진학했지만, 성서 해석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슴을 떨리게 하는 울림이 없었는데 대학 3학년 때 ‘민중신학’을 접하게 됐다.

“성서 해석을 배우는 것은 하나의 지식이고 지식이 진리가 되고 나를 감동하게 해야 하는데, 이건 그렇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민중신학을 접했는데 ‘이거다’ 싶었어요.”

그리하여 그는 기장(기독교장로회)선교교육원(대학원 과정)으로 진학해 문동환(문익환 목사 동생) 목사 지도로 논문을 준비했지만 결국 논문 제출도 못 했고 당연히 졸업도 못 했다.

진주에 ‘평강교회’라는 이름으로 개척교회를 열었지만, 교회가 미처 자리 잡기도 전에 그는 인권운동에 나서게 됐고, 그의 목회활동이나 인권운동이나 속된 말로 ‘돈’이 전혀 안 되는 일이었으니 생활은 오롯이 그의 아내 몫이었다.

박광희 목사./정성인 기자

교인이 제일 많을 때 50명 정도 됐다니 사실 ‘목회자’로서는 ‘빵점’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부끄럽지 않다.

“나를 보낸 신의 뜻에 따라 살았고,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났으니 아쉬울 것 없는 삶이었지요.”

그는 요즘 교인 중 한 명이 진주시 미천면에 있는 땅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줘서 주일이면 그곳에 가서 예배를 보고 교인들과 만난다. 평일에는 낚시도 하면서 비버스 식당 운영에 힘을 쏟고 있다. “목사는 투잡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그. 교회에서 주는 월급으로 생활하면 바른 설교를 못하기 때문이라는데, 지금의 그는 교회에서 주는 월급으로는 생활할 수 없어 어쩔 수 없는 ‘투잡’ 인생이다. 신의 부름에 응해 살아왔고, 그 삶에 아쉬움도 없다. 많지는 않지만 아직 그의 신앙과 그의 신념을 믿는 사람이 제법 있다는 점에서 나름 보람있는 목회활동을 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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