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참교육 실천했지만 이젠 ‘더불어 희망 만들기’

‘우구(嵎丘) 안종복 선생 정년퇴임’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지난 2월 27일 김해 벨메종호텔에 내걸렸다. 전교조 1세대 선배를 위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경남지부(지부장 송영기)가 마련한 자리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안종복(63) 교사를 다시 만났다. ‘참교육’만을 위해 내달려온 그의 인생사를 들으려고 김해 장유면에 있는 자택을 찾아갔다. 그는 ‘손님’이 온다며 지난 정년퇴임식 때 입은 정장을 다시 꺼내 입은 참이었단다. ‘산모퉁이의 작은 언덕’이라는 뜻을 지닌 호처럼 인생 2막은 다른 사람을 위해 욕심 없이 살고 싶다는 안 교사.
“‘우구’는 오랜 벗인 도예가 달묵 박영현 씨가 지어줬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면서 전환점인 한 모퉁이를 돌아가지요. 그때 작은 언덕이 있어 휴식을 취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제는 빚을 갚을 시간입니다. 한평생 진 빚이 너무 많아요. 저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 시간을 써야지요.”

‘선생이 되어라, 선생은 바람을 타지 않는다’

안종복 교사를 빼고 전교조를 말할 수 없다. 지난 1989년 신문에 대서특필된 ‘전교조 결성관련 교사 23명 구속’ 제하 기사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구속 사유는 전교조 결성 가담. 당시 경남에선 5명의 이름이 올려졌다.

/김구연 기자

안 교사는 89년 전교조 경남지부 초대 부지부장이었다. 그해 6월 재직하던 마산상업고등학교(현 용마고)에서 파면을 당하고 7월에 구속됐다. 이듬해엔 전교조 마산 지회장을 맡아 경남도교육청과 교섭 투쟁을 하다 구속돼 마산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암암리에 고문과 폭행을 당했고, 급성 위출혈로 마산의료원에 입원했다. 천장이 내려앉고 벽이 좁아지는 환각 증세를 일으켰다.

24년이 흐른 지금, 안 교사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이 좋지 않다.

“후배들이 퇴임식을 열어준다고 했지만 마다했어요. 뭐 그런 걸 하느냐고. 그런데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굳이 열었습니다. 병마로 고생을 하고 있지요. 얼마 못 산다는 말도 들은 적 있고요.”

파란만장한 한국현대사를 겪은 그의 얼굴은 어느새 세월의 훈장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1951년 김해 진영읍 하계리에서 태어난 안 교사는 유복자였다. 부친은 일본수력발전소 건설에 강제 징용돼 병을 얻었고, 세상을 떠났다.

“2남 1년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집에서 아버지 얘기는 잘 안 했어요. 얼핏 듣기로는 일본 발전소 짓는데 끌려갔다 할아버지가 겨우 돈을 써서 빼냈다고 하더군요. 당시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탈출하려다 걸려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자세히는 모릅니다.”

예민한 성격에 감성이 풍부했던 그는 저녁 무렵 마을 뒷산에 올라 김소월의 〈초혼〉을 읊조렸다. 그리고 평소 외국어를 좋아해 영어와 영시를 공부했지만, 일부러 일본어는 배우지 않았다.

안 교사는 지금에 와서는 편협한 생각이었다고 말하지만, 어린 소년의 가슴에 일본이라는 나라는 그렇게 남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항상 선생이 되라고 타일렀단다. 모친은 정치적 성향이 강한 그를 염려했다. 외교관과 국회의장이 되고 싶었던 그는 읍장과 군수, 민의원 등이 여는 설명회와 연설회를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김구연 기자

“정치인을 쫓아다니는 저를 보고 걱정을 했나 봅니다. 그동안 숱한 세월을 겪으시면서 말 못할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아직도 어머니 말이 생생합니다. ‘선생이 되어라. 선생은 바람을 타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게 교사가 된 동기였을 겁니다. 그런데 선생도 바람 탑디다. 해직과 구속 등 시대의 아픔이 세찬 바람으로 제게 불어 닥쳤지요. 가장 평범한 교사가 가장 특별한 교사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집안을 일군 조부의 후광으로 진영중학교를 졸업해 부산 동성고등학교로 진학한 그는 3년 후 경상대 사범대학 영어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대학원까지 진학해 영시를 배웠다.

1979년 교사로 첫발을 내디딘 그는 함양 서상중학교로 향했다.

서상중학교,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첫 발령지

/김구연 기자

“퇴임 직전 며칠을 회고의 시간으로 보내면서 크게 느낀 것이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과거가 최근의 과거보다 훨씬 생생하게 떠오른 사실입니다. 35년 전의 초임 학교, 바로 서상중학교 생활인데, 너무나도 또렷해 놀랐습니다.”

10월 말부터 3월 초까지 하염없이 내리던 곳. 양말을 신지 않은 아이들의 발이 짐승발처럼 텄던 춥고 가난했던 오지 마을. 하지만 순수하고 순박했던 곳. 안 교사는 서상면 도천리를 이렇게 회상했다.
모친의 병세로 20대 초반의 나이에 결혼했던 안 교사는 함양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하지만 매일 같이 놀러 오는 아이들 때문에 아내는 가끔 서운했단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한 마을에 살고 있으니 학교가 마을이요, 마을이 학교였습니다. 한마디로 이상적인 교육공동체였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찬 일이었지요. 가끔 아내가 ‘당신이 나와 결혼했는지 아이들과 결혼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내뱉을 정도였으니까요.”

권투를 하겠다며 가출을 한 학생들 찾아다닌 일, 어려운 가정형편이 안타까워 포켓을 털었다고 회상하는 안 교사는 선생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가난하지만 순박했고 자연과 학교가 오묘한 조화를 이뤘던 함양의 하루하루는 행복이었다고 했다.

“오지의 중학교에서 더 넓은 세계(고등학교)로 진학하려는 제자들의 간절한 눈빛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개 숙인 학부모들. 만약 내가 아이들의 편에 선다면 어떻게 책임져야 할 것인가 고민하며 잠 못 이루던 밤들이 어제처럼 기억됩니다. 좁은 철계단을 올라 생전 처음 보는 다락 방, 옷가지와 가재도구와 책과 사람이 함께 뒹구는 것을 본 순간 왈칵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겨우 참았습니다. 그리고 생각지요. 그래 가난이 죄일 수는 없다. 하지만 모두들 온 힘을 다했습니다. 지금 그들이 생활 철학이 분명한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어 참 기쁩니다.”

/김구연 기자

하지만 시대의 아픔은 있었다.

“아시다시피 79년은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그 해 10월 26일 덕유산 아래 서상중학교 교정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온 세상이 떠들썩했고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눈물이 나더군요. 이듬해 5월 어느 날 밤중에 이상한 소리에 잠을 설쳤는데 다음 날 알고 보니 탱크 소리였어요. 한국현대사의 가장 기막힌 역사가 기록되고 있었습니다. ‘광기와 야만의 시대에 교사는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사랑과 배려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지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그랬던 그가 어린 시절 잠재웠던 정치적 성향을 다시 드러내기 시작했다.

1981년 마산상업고등학교에 부임한 안 교사는 89년 교사협의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맡았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유서를 남긴 한 여중생의 죽음.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학생이 한 해에만 150명. 그는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강제 보충수업을 철폐하자고 외쳤고 학생들에게 야간 자율학습 의사를 묻자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담임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참교육’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마산민주학부모회 창립을 주도했고 89년 전교조 경남지부 초대 부지부장을 맡았다. 90년에는 전교조 마산지회장을 했다.

“사람은 시대의 사회 성격에 따라 자신의 삶 목적과 목표가 정해지지요. 민주주의와 노동운동의 메카인 마산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참교육 운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각성한 선생님들이 용기를 내어 학생들을 살리려는 집단적 노력은 이미 1960년대 교원노조가 시작을 했지요. 우리는 30년 전 5·16군사 쿠데타로 꽃을 피우지 못했던 선배들의 맥을 잇는 새로운 함성이었습니다. 빈익빈 부익부는 학교현장에 치맛바람과 돈 봉투가 난무하는 곳을 만들었고, 오랜 군부 통치로 병영화된 나라는 학교를 학생인권의 사각지대로 몰아넣었지요. 마산의 교사들이 죽은 듯 살아 부활하는 현장, 그곳이 바로 새로운 교육의 시대를 여는 숭고한 곳이었습니다.”

/김구연 기자

참교육을 향한 그의 열정은 1991년 보석 석방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994년 김해 대동중학교로 복직하면서 97년 전교조 김해지회장을 맡았고 99년부터 2000년에는 전교조 경남지부 수석 부지부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2003년 7월 2일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자로 인정, 명예회복을 했다.

“저는 전교조로 치면 구시대입니다. 시대는 변했고 세상도 변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지요. 그것은 과거와 같은 압제에 저항하며 싸웠던 방식이 아니라 참교육의 정신과 원칙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싸움은 계속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노조가 합법화되면서 투쟁력이 약화했어요. 오히려 족쇄가 됐지요. 옛날에는 교사들이 모여 자유롭게 책 한 권도 읽지 못했어요. 반면에 단결력은 좋았지요. 하지만 다시 들불처럼 번져나갈 참교육의 희망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그는 전교조 1세대로서 후배들을 걱정했다.

지역문화활동 전념…사람 세우는 일에 희망을

김해 대동중학교로 복직한 그는 2014년 2월 28일까지 줄곧 김해에 머물렀다. 당시 교육청이 그를 마산에서 먼 곳으로 발령을 냈는데 김해였단다. 그 계기로 지금껏 김해에서 살고 있다.

/김구연 기자

안 교사는 2000년에 들어서 김해 YMCA 청소년문화센터소장과 사단법인 발달장애아동 레크레이션치료센터 ‘푸른마을’ 설립 소장, 김해민예총 대표, 경남민예총 부대표 등을 맡으며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특히 시를 좋아해 교사 신문에 글을 보냈던 그는 2006년 봄 〈문학예술지〉로 등단했다. 그의 서재에는 〈소낙비 사랑〉이라는 자작시가 걸려있다.

‘비바람 소리에/귀 기울이면/뜨겁게 묻어오는 그대의 숨결(중략) 우리는 소낙비/소낙비 사랑/어우러져 내리는/참사랑 참비’

이렇듯 그의 시는 순수한 구절이 돋보이지만, 그는 삶 속의 글을 지향했다고 한다. 우회적으로 친일을 비판하기도 했다고. 그래서 ‘아웃사이더’를 모아 계간지 〈천도문학회〉를 펴냈지만 세상에는 단 한 권만 나왔단다.

“퇴임하고 나니 몇몇 분들이 일을 함께하자는 요청을 해왔죠. 현재로는 어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보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보다 적극적으로 하고자 합니다. 우선 시동인회 ‘포엠하우스’ 활동과 ‘김해민예총’ 등 지역문화예술 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저의 빈자리를 저보다 훌륭한 후배 선생님이 지키고 있는데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지난달 평교사로 퇴임한 후 우선 김해에서 문화 사업에 전념할 계획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참된 민주사회실현을 위해 빚을 갚아야 한다고 했다.

“그동안 많은 선후배님께 많은 빚을 지고 살았어요. ‘자유인은 자유인답게 자연인은 자연인답게’ 많은 인생의 선후배님들이 제게 한 충고입니다. 필요한 곳에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아직도 깊은 밤이며 새벽은 항상 깨어있는 자가 맞는 것이기에 물레를 잣는 마음으로 새 시대를 기다리겠습니다.”

사람을 바로 세워 세상을 바로 세우는 데 온 힘을 기울이겠다는 안 교사. 그는 여전히 그의 좌우명 ‘세상을 위해 세상 속으로’를 실천하는 중이다. 

/김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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