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눈이 오름에 앉아 소리 없이 울더라

아, 역시 제주도군! 제주도에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음을 끝내 인정하는 감탄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갈 때마다 처음인양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곳이 제주도라고. 그리고는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나뉘는 제주도의 행정 구도를 바꾸어 놓는다. 더러는 해안과 내륙으로 나누고 더러는 한라산과 올레길로, 더러는 관광지와 자연마을로…. 어떻게 가르든 다 제주를 나름대로 즐기는 방식이다. 나에겐, 제주도에는 금능 바다가 있었고 용눈이 오름이 있었다.

금능해변과 비양도

제주도 여객터미널에서 서쪽 바닷길을 따라가면 군데군데 하얀 모래와 푸른 빛깔의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가장 먼저 만나는 해변이 이호테우해변이다. 이호테우해변에는 두 마리의 목마 등대가 서 있다. 마치 ‘트로이의 목마’를 연상시키는 이 등대는 마주본 채 서로를 부르고 있다.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 만나지 못하는 애닮은 연인 같기도 하다.

이호테우해변에서 곽지과물을 지나면 제법 큰 항구가 나온다. 한림항이다.

“제주가 섬인데 왜 해변이 아름다운 건만 생각했지? 제주에 있는 항구라면 유람선만 떠올렸고 어선들이 조업을 하러 나가는 항구 풍경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네.”

한림항의 규모와 부산스러움은 제주 여행자들에게 마차 싶은, 낯선 풍경으로 다가온다.

/권영란 기자

울긋불긋 깃발을 세운 고깃배들이 도열하듯이 정박해 있는 한림항은 그대로 또 하나의 장관이다.

한림항을 살짝 지나면 협재해변이다. 이곳은 제주 서쪽 바다를 보기위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다. 이른 봄볕이지만 꽃샘바람이 차가운데 어디에서 몰려왔는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바다 앞에서 환한 웃음들을 흘리고 있다. 마치 마티스의 그림 속 사람들 같다. 사람들 너머로 뭐라 말할 수 없는 투명하고 푸른 물을 데코레이션 해놓은 듯 바다가 펼쳐져 있다.

수개월 전부터 제주 한림면에서 살고 있다는 한 유명 여행작가는 지난해 11월 제주에 살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왔다. 이곳에 작은 까페를 만들어 운영하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쓸 계획이었다.

“최근에 이곳 집값과 땅값이 너무 올랐어요. 이곳에 살러 오는 사람들은 많아졌고 집 구하기는 그리 만만치 않아요. 빈집이 있다는 얘기 듣고 찾아가면 너무 값을 올려 말해요. 주인이 당장 집을 팔 마음이 없다는 얘기지요. 그리 급하게 마음먹지는 않았으니 이곳저곳 천천히 둘러봐야지요.”

그는 서울에서 이곳에 이사 온 뒤 매일 산책을 나가는데, 대부분 금능해변으로 발길이 가게 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협재 바다가 가장 아름다운 줄 아는데 사실은 금능 바다가 더 아름다워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거기로 가요.”

/권영란 기자

금능해변은 협재해변에서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금방이다. 금능해변은 고즈넉하다. 띄엄띄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일 뿐, 바다도 바람도 햇볕도 차분하다. 점점 푸르러지는 바다 끝에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섬이 있다. ‘섬 중의 섬’이라 일컫는 비양도다. 비양도는 천 년 전인 고려 때 분출한 것으로 추정하는 화산섬이다.

금능해변과 비양도는 닿을 듯이 빤히 서로 마주하고 있다. 협재해변에서 바라볼 때와는 사뭇 다르다. 협재에서 바라보는 비양도가 살짝 비껴가는, 만나지 못하는 연인이라면 금능에서 바라보는 비양도는 먼 길을 돌아와 금방 내 품으로 안겨들 듯이 숨을 가다듬는 연인이다.

용눈이 오름에 머물다

“큰 왕릉 같은데.”

제주 내륙을 다니다보면 야트막하고 둥근 오름들을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제주에는 368개의 오름이 있다. 오름은 분화구를 가진 기생화산구를 말한다. 오름은 산의 제주 방언이다. 하지만 정작 오름에 가면 이게 산인가 싶다. 지리산이나 와룡산, 무학산 등 크고 험한 산을 끼고 사는 뭍 사람들은 오름이 산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저 제주에만 있는 것인데, 그게 오름이라 생각한다. 높이로는 그들에게 언덕일 뿐이고, 경주 시내에 가면 볼 수 있는 큰 왕릉처럼 보인다. 거기에다 제주는 도로를 달리다보면 봉긋봉긋한 젖무덤 같은 봉분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제주의 지형상 내륙이라도 사방이 트이고 키 작은 풀로 덮여있어 봉분마저도 작은 오름 같다(물론 분화구는 없지만).

내륙을 잇는 1119번 도로에서는 보이는 게 전부 오름이다 싶고, 해안을 따라 제주를 비잉 두르는 1136번 도로를 따라 가도 군데군데 오름이다.

성산에서 가까운 용눈이 오름은 지금은 작고한 김영갑 사진작가의 작품으로 더욱 널리 알려진 곳이다.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시간에 따라 김영갑 작가가 담아놓은 용눈이 오름의 풍경은 많은 사람들을 설레게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용눈이 오름을 향해 갔다. 용눈이 오름과 가까운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가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그의 사진을 통해 제주를 만나고 용눈이 오름을 만나고 있다.

/권영란 기자

조금 늦은 걸음이었을지 모른다. 이른 봄볕 아래 용눈이 오름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봉긋하게 솟은 둥그스름한 선과 천천히 굽이 돌아 올라가는 길만으로도 아름답고 편안했다. 눈에 꽉 차듯이 들어오는 용눈이 오름은 1136번 도로에서 간간히 눈에 띄던 봉분을 확대해놓은 듯했다.

“오르기가 아주 좋은데. 주변이 탁 트여있으니 멀리 바다까지 보이는데.”

세화해변일까, 성산 쪽 종달바당일까. 멀리 하늘인지 바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수평선이 마치 아지랑이처럼 어질어질거린다.

용눈이 오름을 오르면서 슬쩍 뒤를 돌아보니 멀리 수평선이 보이고 바다 빛깔이 아른거린다. 오름 정상에는 분화구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굳이 오름을 다 오를 필요는 없다. 중턱에 앉아 내려다보니 굽어 돌아가는 길이 아름답다. 길을 따라 오르는 사람들이 바람에 팔랑거리는 나뭇잎처럼 보인다.

오름에도 둥근 봉분들은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다. 제주는 봉분만 만들어놓는 게 아니라 그 둘레에 크고 작은 제주돌들을 어른 허벅지 높이만큼 네모나게 쌓아놓았다. 뭍에 사람들이 묘 주변에 나무를 심거나 석축을 쌓는 것과 같은 의미일까. 아님 짐승들이 들어가지 말라고 해놓은 걸까. 근데 참 이상한 건 제주는 그런 봉분마저도 소박하고 정겹다는 것이다. 오름이든 밭 한 가운데든 툭툭 던져놓은 공깃돌처럼 자리잡은 봉분들에서 오히려 애틋한 사람 냄새가 난다.

/권영란 기자

용눈이 오름 중턱에 앉아 그냥 그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을 뿐이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햇볕이 여려지고, 바람이 달가닥거리고…. 정상에 있다는 분화구는 보지 못한 채 그렇게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와도 좋다. 용눈이 오름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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